4.

창촌년들이 어디를 가겠어, 기껏해야 요 앞 마실정도지. 담배를 뻑뻑대며 옷을 여미는 꼴이 여느 창년들과 다를 바 없었다. 간 밤에 여자 여럿이서 어디로 가는 걸 먼 발치에서만 지켜보던 호석은 그 담배냄새에 찌푸리며 기침했다. 호석의 앞에 앉은 년은 담배 안 피는 년은 여기에서 니가 유일할거라며 웃는다. 그게 뭐가 자랑이라고. 일찍 뒤지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온갖 건강에 나쁜짓만 골라서 쳐 하고 앉아있다. 제이, 며칠 전에 그 남자. 너랑 자고싶어서 온 거 아니지? 여자가 눈을 번뜩였다. 촉도 좋은 년. 하지만 여자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남자는 다른 용건으로 호석을 찾아왔지만 남자는 호석과 섹스했다. 이름이 김석진이었나. 욕망하나 없는 섹스였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결합이었으며 호석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이미 머리속에서는 궁궐같은 집에 살던 여자와의 만남은 지운 지 오래였다.

"언제든지 떠날 여유는 있으면서 악착같이 붙어 있기는 어지간히 있어야지."
"네 눈에도 그렇게 보이나봐."
"그래."
"근데 난 안갈거야."

왜? 여기있는 년은 나가려고 발악을 해도 그게 안되는데. 여자가 묻자 호석은 웃었다. 그냥. 이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여자는 뭐든 이해해 줄 것 처럼 호석을 측은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봐도 너한테 떡 안떨어진다며 호석은 등을 돌렸다. 신기루는 신기루일뿐이야.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 자신이 그 남자와의 섹스를 정당화할 수 있었으리라 믿었다.

여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간밤에 팔자핀 년들이 전부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는 소문만 무성하게 남겨놓고 호석과 몇몇의 여자만 자리를 지키고 앉아 쇼윈도우 마네킹처럼 영혼없는 듯 굴었다. 덕분에 새로운 년들이 들락거리는 건 순식간이다. 다들 하나같이 새파랗게 어리고 예뻐서 저는 견줄 수도 없을 정도인데 뒷구멍 맛을 잊을 수 없는 놈들은 굳이 멀리에서까지 찾아오긴 했다. 밥그릇싸움을 남자랑 한다고 생각하니 약이오른 년들이 호석이 지나갈 때 마다 뭐라뭐라 짓거려대긴 했지만 무시해주니 흥미를 알아서 잃었다. 지들도 여기 있기 싫겠지. 그래도 있어야 하는 걸 알고 여자들은 금방 익숙해져갔다. 호석은 그녀들과는 다르게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호석은 떠나지 않는다. 지나가던 한 년이 멍청하게 아스팔트 바닥을 쳐다보며 마루에 앉아있는 호석을 바라보곤 섹스중독이라며 혀를 찼다. 그럴 지도 모른다. 저를 찾아온 그 남자와도 결국엔 자신이 밀어붙여 했는지도. 생각하는 것도 결국 창촌수준을 떠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옛날부터 동생과는 이런 것 부터 차이를 보였으니 이제 그가 없어져버려서 한심해하는 인물도 없었다.

빨간 원피스년이 죽은 건 일주일 후 호석이 잠깐 슈퍼 다녀온 사이에 자살했다고 했다. 오늘따라 다시 들어가기 싫더라니 그 이유에서였나. 다리벌린 돈으로 동생 장례식 치뤄준다며 쯧쯧 혀를 차던 년은 그 다리벌려 번 돈도 한푼 안남기고 죄다 이자값으로 나가서 장례도 못하고 그대로 작은 상자에 담겨졌다. 호석의 뭔가라도 되는 것 처럼 굴더니 왜 죽었는지 이유도 말 안해주고 가버렸다. 그렇게 당당하던 년이 사람취급 받고 싶어하는 건 아니었는데 왜. 원피스년이 죽은 날은 비도 안오고 그렇다고 해서 해도 구름에 가려서 나오질 못했다. 사람 하나 죽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날 그녀의 붉은 원피스가 공터에서 타오르는 것을 지켜보던 호석이 주머니에서 그녀가 준 돈 몇 푼을 꺼냈다. 그러고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봉투하나를 던져넣었다. 자, 다리 벌리고 번 돈 말고 그냥 평범한 돈이다. 결국 이런 돈만 쫓다가 뒤진년은 아니지만 동경은 했었으리라. 언덕으로 이루어진 창촌 뒷공터 한 켠에 타오르던 연기는 이내 작은 불씨만 남기고 꺼졌다.



5.

제이, 손님 왔어. 호석이 발을 치우며 대답했다. 들어오라고 해. 그의 말에 저 만치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구두굽소리가 가까워진다. 걸음걸이가 느긋한 걸 보니 돈 많은 놈인가 하고, 지레짐작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제이의 방으로 들어왔다. 제 물건 몇가지 없는 횡랑한 방에서 사람하나 시체처럼 앉아있으니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라 거부감인지 아닌 건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는 표정이 봐줄만은 했다. 흰 브이넥 티에 청바지 하나만 겨우 걸쳐입은 호석이 익숙하게 웃었다. 처음이에요? 그의 말에 남자는 입이 굳었다. 호석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쳐다보더니 앞으로 다가서서 넥타이를 슬쩍 잡아당겼다.

"앞으로 적어도 1000억."
"..."
"니 목에 달린 돈."

결국 평범함은 거리가 애초부터 멀었던 호석은 바람빠지듯 웃었다. 그런 돈은 만져 본 적이 없는데. 내 뒷구멍은 천억 정도 되려나? 애써 웃는다. 그러나 그게 남자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생각조차 못한다. 그 여자는 호석에게 한 번 어미노릇 없이 부모 자리를 꿰차려는 속샘인가 한 번 생각해봤지만 그런 큰 돈을 그녀가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호석의 어린 기억 속에 옷장에 숨어있던 그 날을 잊을 리가 없는데 그녀가 창촌에서 벗어나 다시 태어났다고? 다시 태어난 게 아니라 다시 자리에 익숙해진 것 뿐이다. 언제든 다시 여기로 올 수 있다는 것을 잠시 망각하고 있을 뿐이니까. 결국 그게 두려워서 김석진을 시켜 자신에게 통보 했을 뿐이었다.

남자는 나갈 기세도, 그렇다고 계속 버티고 있을 기세도 아닌 채로 서 있었다. 나더러 어쩌라고. 호석은 눈빛이 날카로워질 틈도 없이 남자의 손에 어깨가 붙들렸다. 정복욕을 들끓게 했던 석진과는 다르게 남자의 손은 경우가 없었고 더 단단했다. 내칠 생각도 못하고 멍청하게 딸려오는 호석을 내려다 보던 남자가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렸다. 그 여자가 어떻게 너한테 그 돈을 줄 생각을 했는지 죽어도 용납 못하니까 선택해. 포기할건지 가지고 늘어져서 같이 신나게 물어뜯을건지. 호석의 예상과는 다르게 이미 그의 손에 돈이 들려있는 것 처럼 중얼거린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듯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의 명함을 보며 또 멍청하게 웃은 호석이 그걸 주워들 생각도 안 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쪽 사람들은 이렇게 매정한척 구느라 골치아파하려나. 결국 무슨 돈이든 사람을 한순간에 뒤지게하거나 창촌과는 연관없는 년놈들을 죄다 이곳으로 불러들여오거나 이곳에서 나가게 한다. 참 간단한 사실을 환상에 젖어 잊고 있었다.

"그래서 너는 누군데?"
"김남준."
"그래 김남준씨. 그러니까 당신은 내 누구냐고."

남자가 떠난 자리 그대로 앉은 제이는 웃었다. 정호인이 죽은 지 채 한달이 되지 않았는데 잘도 동생이라 짓거렸다. 역시 그 여자는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평생 인연이 없었을 호인을 자신의 동생으로 만들더니 이 번에는 저보다 더 크고 강한 사람을 동생이라고 만들어놓았다. 난 또 그녀의 다른 애인 쯤일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신나게 뒷통수 맞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 장사는 글러먹었다는 생각을 했다. 큰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호석의 이성을 쥐고 놓을 생각을 못했다. 상대방도 불편한 이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 지 정리도 하지 못했는데 저더러 선택권을 준다. 참 친절도 하지. 돈이라고 좋다고 달려들 년이라고 생각 안해주는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6.

법무 팀장 김남준. 캬. 이게 니 동생이라고? 어디 시발 지나가다 주운 명함으로 구라질이야 개새끼야. 진짜면 나가서 징그럽게 붙어있던가. 호석의 발치로 슬리퍼 하나가 뒹굴었다. 수금하러 온 양아치 나부랭이 주제에 말은 많아서 매번 무시해야지 하면서도 그를 보면 툭툭 내뱉게 되는 게 있었다. 흘리듯 하는 말에 명확한 답을 내게 하는 뭔가가 있는 놈. 호석은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갑자기 굴러들어온 동생이라는 인물이 현실감 없다는 것 쯤은 알고 있지만 태형의 말은 호석에게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징그럽게 붙어있는 건 사양이지만 분명 호석의 목에 1000억이 있다는 것이 그의 선택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창촌에는 흔히없는 사내라는 이유로 태형은 무작정 친구 먹으려고 안달 난 놈처럼 달려들었다. 그냥 사내새끼처럼 수다떨고 싶어서 그런건가 싶었는데 태형은 가끔 호석과 자리를 마련하려고 했다. 여자는 취향이 아니라나 뭐라나. 좆같은 소리를 짓거리면서 호석의 엉덩이를 콱 쥐면 호석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밀어냈다. 경우없는 새끼도 이런 경우없는 새끼가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기다려진다. 상식 선에 한참 벗어나고도 남을 둘이 붙어서그런지 호석을 이상하게 이성을 되찾게 만들었다.

"오늘은 수금 안해도된댄다."
"..."
"저번에 개년들이 팔자피고 나간거 때문에 당분간은 이자걷는 년도 적으니까 휴식."
"그래."
"기둥서방정도는 해줄테니까 같이 가자."

호석은 멍청하게 웃으면서 태형을 본다. 버릇처럼 내뱉는 그런 소리는 가끔 호석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 같긴 한데 현실성이 없었다. 태형도 호석이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했지만 그렇다고 안달낸다거나 강제적인 색은 띄지 않는 게 웃겼다. 태형이 웃으면서 걸어오더니 호석을 양 팔에 가둔다. 밖에서 하는 건 취향이 아니니까 들어가 있던가. 호석의 말에 태형이 한껏 올린 머리를 하고 웃으며 입에 콘돔을 물었다. 절로 아싸가 나오는 얼굴이라 호석은 애써 외면했다. 돈도 안 받고 즐기려는 건 오랜만이지만 태형과의 섹스는 도중에 울든 지랄을 하든 거부감이 없어서 다행이긴 했다. 가끔 소유욕을 띄는 제스쳐 쯤은 호석이 능청스럽게 넘기는 터라 태형도 부담감이 없었으리라.

내가 고아새끼가 아니었다면 지금 니가 보여준 명함 속 새끼가 되어 있었을까. 태형이 얼굴을 호석의 목덜미에 뭍고 중얼거렸다. 부러운거야? 호석이 물으니 그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내 성격에 저런거 하고 있다간 스트레스나 과로 때문에 누구하나 잡아서 죽일 수도 있을 걸. 그의 말에 호석이 일리가 있다면서 웃었다. 누워서는 애처럼 돌변한다는 걸 말하지 못하고 입안에서 맴돌기만 했다. 태형은 깊게 들어오며 웃었다. 너 만났으니까 됐어. 꼴에 있어보이려고 생각해주는 척은. 제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숨을 골랐다.

"너한테 돈이 많으면, 넌 어떡할래?"
"너 데리고 도망간다."
"못, 으...못하면?"

못할 건 없어. 아무것도. 태형이 웃는다. 호석은 그가 앞에 '돈이면' 이라는 말이 없어도 온전하게 알아들었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돈이면 못할 거 없지.
blog image

Written by Zipduck

어...어...(죽어있다) 트위터 @zipzap_duck 비번 1995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