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 Parallel Paradox





<B의 여행>


지민은 의원의 넥타이가 숨통을 조를 듯 바짝 당겨져 있는 것을 쳐다보다 몸을 일으켜 넥타이를 확 당겼다.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진 남자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코 끝으로 담배 찌든 내와 향수 냄새가 섞여  얼굴을 찌푸렸다. 거기다 남자는 커피까지 마신 채라 차마 버틸 수 없을 지경이었다.

"별 생각 없으면 돌아갑니다."

건너편에 무심한 척 앉아있는 태형에게 일어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원이 뚜껑만한 손으로 다급히 지민의 손을 잡았다. 사람이 이렇게 인정이 없어서야. 아무렇지 않은 척 눈썹을 찌푸리자 남자가 가방에서 대뜸 현금 뭉치를 꺼냈다. 옴마. 태형의 찐한 송충이 눈썹이 꿈틀거렸다. 돈벌레 새끼. 저 놈의 썬글라스 안에는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란 놈의 눈이 있을 거다. 에이, 뭐하시는 겁니까 의원니임. 살살 눈웃음치며 살포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일단 선금이라는 소리였다. 의원은 왼 손으로 검지를 오른 손으로는 손바닥을 펼쳐보이며 천 오백을 추가로 지불하겠다는 소리를 했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럼 서비스로 작은 거 하나 주고 잔금 지불되는 순간 큰거 줄게요. 처음이시라 잘 해드리는 겁니다. 손을 뻗어 천 오백을 안주머니에 챙기는 순간 의원의 전화가 울렸다.

"일단 급한 건 해결됐으니까 곧 들어가지."

의원을 따라서 씨익 웃었다. 의원의 어깨 너머로 김태형이 폰을 흔들어보였다. 나이스 타이밍. 어떻게 바로 처리한건가? 의원이 물었다. 괜히 유명한게 아니니까요. 자리에서 유유히 일어나 음식점을 나섰다. 와 씨, 개쫄려. 심장을 붙잡고 있는데 뒤로 기척없이 다가온 태형이 물었다. 선금 일단 나한테 주면 안 되냐? 또 무슨 사고 쳤냐 물었더니 김태형은 손목시계를 흔들었다. 이번 달 생활비 여기에 다 꼴았어. 자랑이다 시발아. 지민이 한숨을 쉬며 태형의 손에 현금봉투를 던졌다. 사실 돈만 받으면 나머지는 다 지민이 처리했다. 일을 끝내고 걸어가는 둘의 뒤로 여고생들이 폰을 붙잡고 난리를 쳤다. 

"우리 오빠 연애한대!"

태형과 지민의 작품이었다. 망할 영감탱이가 계속 시간을 끄는 바람에 늦어졌을 뿐이지.

우리 인생은 엔터만 누르면 게임 끝인 줄 알았다. 컴퓨터 영재로 이름을 날리다 과 입학 초기에 친해져서 만나면 둘이 머리맞대고 코드나 짜고 밤새면서 과제하다 대뜸 군대가기 싫다고 노래를 부르는 놈들이었고 가뭄에 콩나듯 오는 과팅에 나가고 싶은데 당장 프로젝트 제출일이 3일 남아 핫음료를 포도당 주사마냥 다이렉트로 맞아도 완성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있는 둘은 눈물을 머금고 안 나가 시발! 하고 컴퓨터에 코를 박았다. 왜 달려있어도 쓰지 못하니, 꼬추에 거미줄 치겠다며 울분을 토해냈지만 안타깝게도 매일 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손이 바빴다.

우리 군대가면 다 까먹을건데 왜 존나 노력하고 있냐. 코주부 안경처럼 콧대 위에 안경을 바짝 올려 걸친 김태형이 발작증세가 제일 심했다. 인생은 왜 코드같지가 않을까. 만약 그랬다면 우린 억만장자가 됐을거고 적도에 땅투기를 해서 석유왕자를 노렸을거다. 넌 시발 안경을 그따위로 쓰고 다녀서 안 생기는 거야. 지민이라고 마땅한 수가 없어 놈의 커다란 콧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김태형은 콧방귀를 뀌며 삼백안을 떴다. 나 입 한 번 열어봐? 쏘리. 지민이 바로 꼬리를 내리며 사과했다. 그래서 가끔 일탈로 매일 쓰던 안경을 벗고 클럽에가서 원나잇을 하는 갭을 즐기며 객기를 부렸다. 그렇게 2년을 허비하다 김태형은 병특으로 회사에 근무했고 지민은 비교적 조용히 입대하는 편을 택했다. 놈은 자유를 외치며 지민이 없는 사이 속세에서 의무를 다 하다가 지민이 일병을 달자마자 김태형이 다니던 회사가 망하는 루트를 타면서 벼락맞을 확률로 옆부대에 재입대를 하게 됐다. 태형은 휴가를 받아도 쓸 곳이 없다고 군복을 입고 지민의 면회를 왔다. 그래서 한동안 애인 아니냐는둥 농담 때문에 힘들었다. 병신새끼. 인연이 어디 쇠톱으로 자를 수도 없지 않은가. 헤이 빡빡이, 군대 다시 온 기분이 어때. 지민은 대신 2년을 내리 놀렸다. 태형은 존나 군번이 꼬여 후임도 없는 찐따새끼였기 때문이었다. 예상한 대로 제대도 지민보다 더 늦었다.

다시 3학년 복학을 맞춰서 했을 때는 동시에 우주미아가 됐다. 학과 통폐합을 하면서 우주미아 동기들이 다같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하고 과사를 점거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겨우 동기의 아버지가 하는 지역신문사 신문에 사진없이 손바닥 만한 기사로 남았다. 살아남으려 치열하게 발버둥친 게 겨우 다섯 줄로 간결하게 적힌 것을 본 동기들은 체념했다. 떠나갈 놈들은 다 떠나가고 김태형과 박지민만 남아 아는 후배도 없이 찐따마냥 다녔다. 복학 후 뭣같아서 첫 달을 술로 배를 채웠지만 딱히 주량이 많은 것도 아니고 심지어 태형은 한 잔도 못 마셨다. 둘이서 두 병을 채 못비우고 집에 들어가서 디비 자는 것 밖에 할 일이 없었다. 가진건 좆도 없는 운빨이고 특기는 그나마 배운 코드 짜고 재미로 남 신상 터는거였으니. 남은 건 누가 먼저 뒤지나 멸망한 인생 시간떼우기 뿐이었다.

회사 면접관이 말했다. 요즘 개나소나 영재라고 입사지원서 내는데 뭐 어디서 근무한 경력 없어요? 티비에서 수염난 연예인이 죄다 경력직 뽑는데 난 어디에서 경력을 쌓냐 씨발! 하며 난동을 피우는 사회풍자 개그가 떠올랐다. 그때 빡쳐서 술김에 면접관이 집에서 야동 본 내역을 털어서 둘이 낄낄대며 웃다가 시작했던 일이다. 내가 삐뚤어진 게 아니라 사회가 썩은거야 씨발! 태형이 그 날 한 병을 비우고 전사하기 바로 전 외친 말이었다. 객기와 오기로 똘똘 뭉치다 못해 비뚤어진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이것까지 망하면 우린 이번 생은 그른거야. 소소한 취미로 하고 있던 해킹을 어디에는 써먹어야겠다는 그 말에 그때까지만 해도 야동이 은근 자기 취향이라면서 자기 하드에 복사하고 있던 김태형은 다리가 후달려서 못하겠다고 뒤로 내뺐다가 단 번에 손에 현찰로 돈다발을 들고 오자 한동안 간 큰 형님으로 모셨다. 처음에는 깡으로 시작했다가 갑자기 얼마 전, 야당 소속 최의원의 비서가 지민을 어떻게 알고 연락을 해왔다. 이미 양심은 시발 보여주려고 해도 없어서 그런지 초반에 밑장만 잘 깔아놓으면 그르치는 일이 없어서 잘 유지해올 수 있었으나 정치에 껴서 판을 키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조건이 콧구멍이 벌렁 거릴 정도로 흥분되는 것이었다.

부르는 대로 줄게요. 

그래서 조건을 갑자기 바꿨다. 천 오백 플러스 알파.

평범한 학생 노릇과 병행하기가 까다로워서 인생이 좀 피곤해졌을 뿐이지 둘은 이 판에서 알만한 놈은 다 아는 놈들이었다. 승부 조작, 검색어 조작, 더 큰 사건 터트려서 눈길 돌려주기 등등 잔 기술만 해도 수십 여가지나 되었다. 당장에 넘쳐나는 돈이 생기니 당연히 씀씀이가 커지기 시작했고 태형은 시계에 지민은 장난감을 수집했다. 둘의 수집품을 50평이 넘는 월세 주택 거실 한 가운데에 서서 천천히 둘러보면 그렇게 잠이 잘 왔다. 팔면 등록금은 거뜬히 나오는 장난감들과 시계들을 우리 애들이라 칭하며 반대로 학교에서는 바둑판 같은 셔츠와 안경을 고수하는 찌질한 놈들 원투를 나란히 차지했다. 동기들은 과가 없어진 충격을 받아서 저런다는 설을 가장 신빙성 있게 믿었다. 나름 시치미 떼는 데에 프로였다. "김태형이랑 박지민? 걔네? 쫌..." 하는 소리에도 콧방귀를 뀌었다. 인생은 2회차 부터다 친구들아.

"연기 봤냐?"
"구리더라."

지민이 기념으로 주문한 출장 뷔페 음식을 입안에 우겨넣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짜식, 괜히 프로다운 모습을 보고 놀란거면서 괜히 아닌 척 시치미떼는 거네. 사실 존나 쫄려서 죽는 줄 알았다.





난 꿈만 꾸면 이러더라. 아침부터 좆같은 꿈을 꿔서 오전 강의를 말아먹고 새집 지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테라스에 앉은 지민이 옆 집에서 들려오는 노래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저건 무슨 소리야. 저 음악 때문에 악몽을 꿨을 확률이 높았다.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기합소리를 내고 있는 옆집 사람은 필히 정신이 어딘가 이상한 사람임이 틀림 없다고 생각했다. 야 김태형! 옆집에 누가 산다고 했지? 지민의 고함에 2층으로 뛰어올라온 태형이 국자를 들고 대답했다. 몰라. 근데 개좋은 차 끌고다녀. 태형도 이상한 노래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휙 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였다. 이거 무슨 소리냐? 알면 물어봤겠냐. 지민이 테라스에서 빠져나오며 꼭 소음공해로 신고할 거라고 중얼거렸다.

지민은 밤을 새서 눈이 쾡한 태형과 마주보고 앉아 영혼없이 유기농 채소를 우적우적 씹어먹으며 자체 공강이 되어버린 하루를 걱정했다. 대체로 식사 중 이야기 소재는 이 짓을 관두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였다. 둘이 운이 좋아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곤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박수칠 때 떠날 타이밍을 봐두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한정판 시계는 자꾸 나오고 장난감 종류는 날이 갈 수록 늘어나 따라갈 수 없을 지경이었으니 아마 향후 5년간은 용의주도하게 잘 해내야 된다는 결론이 나와서 문제였다.

지민은 안경을 밀어올리고 소파에 누워 티비를 틀었다. 익숙한 스캔들이 연예뉴스에서 아직도 난리였다. 채널을 돌려 드라마를 얼마 보지도 못했는데 초인종이 꽝꽝 리듬있게 귀에 때려박혔다. 딱 봐도 인터폰과 가까운 지민이 징징 우는 시늉을 하면서 누구세요? 하고 물었다. 화면에 가득 차는 콧구멍에 놀라서 인상을 찌푸린 지민이 인터폰에 대고 얼굴 좀 멀리 하라고 질색을 했다. 그제서야 얼굴을 멀리 한 남자가 카메라 렌즈를 쳐다보고 말했다. 아, 옆집 사는 사람입니다. 제가 골프연습을 하다가 마리오가 그 쪽 마당에 날아갔는데요. 좀 찾을 수 있을까요? 지민은 그 말에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골프공이 아니라 마리오는 뭐야. 골프공 애칭인가. 

집 마당에서 골프공을 풀스윙으로 날리는 미친새끼가 어디있나 생각했다. 아침부터 이상한 노래로 잠을 방해한 사람이 아니던가? 지민이 직접 밖으로 갔다. 제발 그 좆같은 노래 볼륨좀 줄여달라고 얼굴을 보고 직접 얘기하면 알아먹진 않을까 해서였다. 골프공인가 뭐시긴가를 찾아주며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집 대문을 열었다. 허리를 굽혀 초인종에 대고 아직까지도 여보세요? 들리세요? 하고 있던 남자가 대문이 열리자 얼굴이 확 펴지며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김석진이라고 합니다. 덥썩 잡아오는 손에 지민이 식겁을 하며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직접 찾아볼 수 있을까요? 순식간에 압도당한 지민이 몸을 조금 피해주자 석진이 마리오~ 마리오~ 하면서 손뼉을 짝짝 내려치고 입으로 쉭쉭 소리를 냈다. 뭘 찾나 싶었더니 마당 뒷 편해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털이 흰 앵무새였다. 이상하게 우는 소리를 내며 깃털을 세우고 석진의 손에 얌전히 내려앉은 앵무새는 지민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마리오가 골프채만 보면 발작을 해서."
"..."
"학대는 절대 아니에요. 유달리 길고 빛나는 것만 보면 싫어하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연습을 안 할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하! 안녕히계세요!"

흑흑 계속해서 우는 마리오가 한 번 푸드덕 대더니 "지! 지!" 하고 소리를 쳤다. 석진이 놀라 부리를 급하게 감싸고 빠르게 사라졌다. 뭐야. 석진이 한 번 몰아치고 간 탓에 할 말도 못한 지민이 멍하니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옆집이 왜 왔대? 뒷북을 치는 태형이 물어봐도 지민은 고개를 내저으며 그 말 밖에 안 했다.

옆집 진짜 개또라이야.





*
생긴건 진짜 정상적인데 또라이력이 그렇게 높은 사람은 처음 봤다. 저 사람은 분명 김태형도 감당 못할 또라이라고 또라이라고 확신했다. 그를 마주한 5분여의 시간은 다신 겪고싶지 않은 시간이었다. 지민이 강의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김태형의 말 처럼 잘 빠진 고급 외제차에서 내린 석진이 지민의 손을 또 잡아왔다 또! 지민은 또 한 번 식겁해서 왜, 왜이러세요. 하고 뒷걸음질쳤다. 과도한 친절을 내뿜으며 쫓아오는 그를 피해서 달아났다. 나중에는 그 외제차를 끌고 자길 쫓아오는 건 아닌가 싶어 집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다 김태형이 집에 돌아오는 시간에 같이 집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스토커로 신고해버릴까."
"쫓아다니는 건 아니잖아."
"아직 안들킨 걸 수도 있어."

오, 그럴싸한데? 태형이 투턱을 만들며 다시봤다는 표정을 했다. 그럴싸하긴 뭐가. 처음에는 최의원이 뿌려놓은 스파이 인줄 알았는데 그 영감탱이 깡으로는 아닐게 뻔하고 만약 내 말이 진짜면 큰일 나는거야 새끼야. 꽤 진지한 표정의 지민을 안쓰럽게 쳐다보다 그런데 왜 그사람이 널 뭐가 좋다고 계속 치대는지 모르겠네 하며 또 박지민 만물 하등설을 주장하는 김태형이었다. 주둥이 안 닥치면 널 갈아서 옆집 마리오 밥으로 줘버릴거야. 마리오의 정체가 골프공이 아니라 앵무새였다는 사실도 이상했다. 그 강렬한 옆집 이웃 김석진의 등장 이후로 일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고역이었다. 우리 또 이사가야되나보다. 이 근방에서 가장 조용한 동네라 해서 이사를 왔는데 난데없이 옆집에 또라이 하나가 입주를 해 다 망쳐버린 것에 대해 애도를 표하며 다시 이사갈 준비를 했다. 김태형은 나름 집이 마음에 들었는데 니가 괜히 민감한 거 아니냐면서 툴툴댔다. 그럼 넌 계속 여기 있던가. 하는 말에 태형은 짐을 챙기긴 했지만 여전히 납득이 안된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김석진이 찾아와 자기 얼굴 어떠냐며 물어왔다. 과자를 사러 가는 길이었는데 어찌나 이런 우연이 다 있는지 마침 마트를 다녀온 석진이 봉투를 찰랑이며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지민은 얼굴이 썩어들어가며 초등학교 때 괴담을 처음 듣고 무서워서 일하러 가야하는 엄마한테 등하교를 같이해달라고 떼써본 적이 있는 빨간마스크를 떠올렸다. 김석진이 진짜 빨간마스크면 개이득 아니냐는 생각이 이상하게 들었다. 하지만 지민은 정신나간 생각은 집어치우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 남자는 지금 내게 매력발산을 하고 싶어 난리를 치지만 엄연히 스토커였다!

"자꾸 이러시면 한 대 칠거에요."
"네?"

고도의 발뺌스킬을 구사하는 석진을 보며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한 지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 다가갔다. 저번부터 계속 저랑 마주치려고 의도하고 손을 갑자기 붙잡질 않나! 게다가 얼굴이 어떠냐고 물어보기까지! 너무 심한거 아닙니까? 스토커짓도 정도껏 하세요! 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석진이 고개를 갸우뚱 하다 갑자기 아학학학! 고개도 못들고 배를 잡고 폭소했기 때문이었다. 순간 발끝부터 차오르는 무안함에 얼굴이 홍조가 올라와 붉어진걸 가리기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제가 멀리서 와서 적응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무례했다면 죄송해요. 오늘 청소하다가 마리오집에 얼굴을 긁혔거든요. 그래서 봐달라고 한 건데."
"외국에서 오셨어요?"
"아, 뭐 그런거죠."

진짜 왼쪽 볼에 생채기가 나 있었다. 지민이 눈을 굴리며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지만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도 좀 이상한데? 생채기가 뭐라고.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니 석진이 지민의 손을 잡으려다 말고 자기 집을 가리켰다. 진짜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어요. 오늘 저녁 저희 집에서 드실래요? 그 말에 거절할 수가 없어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를 해도 왜 그딴 오해를 해서 이 상황까지 오게 만들었나. 지민은 접시물에 코를 박아도 뒷통수가 터져 뒤질것같은 기분이었다. 후식으로 과자먹으려 나왔다가 저녁식사를 맞이하게 된 지민은 석진의 호(號)가 있다면 아마 '큰손' 김석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푸짐하게 차린 음식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 이거 다 못먹어요. 지민은 벌벌 떨며 말했지만 석진은 싱글벙글이었다. 괜찮아요! 제가 다 먹거든요. 그리고 지민은 인간의 입에 블랙홀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석진은 디저트로 작은 조각케익을 내오며 토하기 직전인 지민을 식겁하게 만들어놨다. 여러모로 맞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소파에 앉아 마리오가 횟대 위에서 혼자 놀다가 지민을 쳐다보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걸 바라봤다.

지민아!

"응?"

마리오가 지민을 불렀다. 너 내 이름 어떻게 알아? 대화가 잘 통하는 것도 아닌데 놀라서 반사적으로 물어봤다. 석진이 아무말 못하고 말 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김태형이 아침마다 일어나라고 지민아! 지민아! 불러대서 내 이름 외웠구나 그치? 집에 가서 김태형한테 말해주면 웃겨서 죽을거야. 웃으면서 쳐다보자 마리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흑흑 거리면서 우는 소리를 냈다. 꼭 누구 우는거 흉내내는 것 같네. 뭐 따라하는거에요? 석진은 대답없이 웃었다. 그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
디지털에 맹신하는 사람들에게 절망적인 소식이지만 지금은 인터넷 연결이 되어있지 않아도 해킹이 가능할 만큼 발전된 시대다. 지민은 최의원의 잔금을 받고 나서 여당 최고의원이 섹스 스캔들 상대와 나눈 카톡 전문과 호텔 로비의 CCTV사진을 신문사에 투고했다. 돈에 눈이 먼 강기자는 익명으로 온 메일을 자기 식으로 맞춰 단독보도했고 지민은 그의 이메일로 메일을 보낸 흔적을 완벽하게 다른사람으로 만드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포털사이트의 검색어 1위는 거래 종료를 알리는 신호탄 같은 존재였다. 일이 늦어지면서 계속해서 컨택해오던 최의원의 비서가 깔끔한 일처리에 감사를 표한다며 최의원과 다시 한 번 자리를 요청했다. 처음 만났을 때 보다 훨씬 후련한 표정의 의원이 지민에게 악수했다. 앞으로 종종 부탁하겠다고 손에 힘을 주며 앞에 선 지민을 눈에 천천히 담았다. 지민은 실내에서도 벗지않는 선글라스를 치켜세우며 웃었다. 언제든지요. 지민의 위로 CCTV카메라가 빛났다.

태형이 제어하고 있는 한적한 카페 CCTV아래에서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고 있던 최의원은 지민의 뒤로 등장한 남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이고 김검사님, 여길 어쩐 일로? 댁이 근처십니까? 지민이 빠르게 태형에게 신호했다. 3분 이내로 정리하고 데리러 와. 지민은 태연하게 최의원의 옆에 붙어서 작은 아버지, 저 이만 동아리 모임 때문에 가 볼게요. 하며 태연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최의원과 악수하고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너무 놀라서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하얗게 질린 지민을 보던 김석진 검사가 제복 차림으로 지민을 한 번 쳐다보다 다시 최의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가 자리를 방해했네요. 이 근처에 행사가 있어서. 사람좋게 웃는 얼굴이 지민을 향해 호의롭게 웃었던 것과 매우 닮아있었다. 

지민을 흘깃 돌아본 최의원이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그래, 다음에 시간 내서 만나자꾸나. 용돈 필요하면 말 하고. 지민의 연기에 맞장구쳤다. 평소같았으면 개소리 하지 말라며 앞으로의 관계는 없다고 정색할테지만 상황이 달랐다. 김석진씨가 검사였다니. 아마 CCTV로 그 광경을 다 지켜봤을 태형이 180을 밟더라도 이 상황을 무마하진 못할거다. 지민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석진을 지나쳐갔다. 걸어가면서 다리가 풀려 넘어지진 않을까 신경쓰며 걸어가다 코너를 돌자마자 벽에 기대어 섰다. 썬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가 지민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 같았다. 제대로된 사고가 불가능했다.

"벌써 가십니까?"
"네? 아, 급한 일이 있어서."

비서가 작게 목례하는 뒤로 김태형의 차가 엄청난 속도로 진입하고 있었다. 비서가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고개를 두리번 거리다 태형의 차에 올라탄 지민이 씨발!을 외치며 발로 조수석 바닥을 쿵쿵 내려찍고 신경질을 냈다. 알아본 건 아니겠지? 지금 당장 집에서 나가자며 신경질을 냈다. 가장 엿같은 건 최의원이 지민을 비웃었다는 것이다. 지민은 다시는 최의원과 친척인 척 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빠르게 집으로 돌아갔다. 태형은 지민의 촉이 맞는 것 같다면서 더 호들갑을 떨며 핸들을 움직였다. 지민은 태형이 그러거나 말거나 자꾸 제복차림의 석진이 자신의 얼굴에 시선을 던지던 그 찰나의 시간이 생각이 나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제복은 드럽게 잘 어울렸다.

이제 당분간 일은 쉬어야겠다며 벌렁거리던 심장을 진정시킨 지민이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앞 유리로 상체가 날아갔다가 그 반동으로 다시 좌석에 처박혔다. 이 씨발 운전 제대로 안 할래? 신경질 부리며 태형을 쳐다보던 지민이 대문 앞에 쭈그려 앉아 아이스크림을 쭙쭙거리며 앉아있는 석진을 보고 으아아악!!!! 소리를 질렀다. 태형과 지민이 동시에 소리쳤다. 쌍둥이여?! 동일인물이라면 제복의 김석진이 순간이동을 해서 옷을 바꿔입고 앉아있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쪽도 이름이 김석진이었다.

1번 도플갱어다.
2번 쌍둥이다.
3번 귀신에 홀린거다.

1번과 3번이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교정시력 1.5인 지민이 그걸 잘못 볼 리가 없었다. 지민이 차에서 내려 침을 꼴깍 삼키며 석진에게로 태연하게 걸어갔다. 만약 1번이면 도망이고 3번이면 도망이다. 저 멀리서 지민이 걸어오자 석진이 어? 지민씨 어디 다녀오시는가봐요? 하고 지민을 반겼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잠깐 친구좀 만나고 왔어요. 지민은 그 찰나의 순간에 김석진이 사실 김석징이라던가 김슥진일 가능성과 그의 그림자가 제대로 박혀있나를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은 김석진이라고 했고 그림자도 제대로였다. 다리가 풀릴 뻔 한 지민이 급하게 석진의 손을 붙잡고 열려있는 그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김석진씨 혹시 쌍둥이에요?"
"네?"

등 뒤로 마리오가 지민아! 지민아! 하고 울부짖었다. 석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참이고 말이 없었다. 만약 쌍둥이가 아니라면 지민이야 둘이 만나지 않기를 비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다만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아서 만약 두 명의 김석진이 서로를 마주하는 순간 심장마비로 돌연사해서 아침 점심 저녁 뉴스에 그대로 복붙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그랬다. 왠지 자기때문에 죽은 것 같아서 찝찝하니까. 지민이 대답이 없는 석진의 어깨를 짤짤 털었다. 빨리 대답해요. 난 방금전에 너무 놀라서 여기로 달려왔으니까! 마리오가 또 우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반대로 석진이 씨익 웃으면서 당황한 지민의 볼을 쿡 찍었다.

"인사라도 해 주지 그랬어요?"
"쌍둥이죠? 그쵸?"
"저 외동입니다."
"..."

석진이 진정하라며 커피를 내 왔다. 방금 전까지 잠을 못자서 카페에서 샷을 추가해 마시고 왔는데 또 커피라니. 뭐라 말도 못하고 인상을 쓰며 한 모금 들이킨 지민이 그냥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꿈은 그냥 만사가 꼬인 악몽일뿐이라고, 일어나면 그냥 최의원을 만나기 전 날이라고. 

"당신이 본 게 맞아요. 그 놈 김석진 맞으니까."

이게 무슨 개소리람. 지민이 커피를 뿜어버릴 기세로 흥분했다. 삼키고 말해요. 삼키고! 석진이 기겁을 하며 손을 흔들자 지민이 가까스로 꿀꺽 삼킨 후 토해내듯 대답했다. 저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요? 출생의 비밀이 있다던가 어렸을 때 헤어진 쌍둥이 형이라거나 할 가능성도 없습니까? 그 말에 석진이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어때요, 이쪽 김석진도 꽤 잘생겼어요?"
"뭐,뭐래. 농담하지마요."
"농담 아닌데요?"

지민이 얼굴을 쭉 빼며 방금 전부터 싱글벙글인 석진을 노려봤다. 아무리 봐도 나 놀리는 것 같은데. 지민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말아야지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석진이 지민에게 직접 김석진을 멀리서 보여준 후에야 지민은 이 믿기지 않는 일을 믿어야되는 상황에 처해 당황했다. 점심을 먹고 나와서 동료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는 석진을 멀리서 바라보던 석진이 지민에게 말했다. "3초 후에 알바생이 번호따러 옵니다." 지민은 믿을 수 없었으나 진짜 몇초 안되어 알바생이 다가와 뭐라고 말을 걸었다. "앞에 앉은 놈이 테이블에 커피를 뿜어요. 제가 게이라고 말하면서 거절했거든요." 푸학, 앞자리에 앉은 동료가 커피를 뿜었다. 지민은 자리에서 토하고 싶었다.





생각을 달리하면 할 수록 이해가 안 되는 건 이해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고 했다. 지민은 관찰자 시점에서 눈 앞의 현상만 보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김석진의 자아가 분열되었다거나 이미 손 쓰기 전에 본인의 도플갱어를 만나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를만큼 정신이 나갔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게 심신건강에 좋았다. 눈을 반짝 빛내며 지민과 마주앉아 어깨에 마리오를 올려두고 있는 석진은 이렇게 사람이 이렇게 진심으로 하는 말을 못믿어야 되겠냐며 답답해했다.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라는 말에 도대체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그걸 군말없이 믿겠냐고 버럭 화를 냈다. 그건 받아들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쯤은 알고 있지만 석진의 강압적인 태도로 보아 오늘 내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토할 때 까지 저녁을 차려줄 것 같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김석진은 쉽게 말해 자신을 김석진B라고 소개했다. 지민이 그럼 나는 박지민C에요? 라고 하니 김석진이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안다며 손바닥을 짝! 쳤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A세계에서는 박지민A와 김석진A가 만나게 된다면 Z세계의 박지민Z는 김석진Z랑 만나게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세계의 수는 지민씨의 선택에 따라 이미 셀 수 없이 많이 생겨요. 오늘 아침에 넥타이를 멜까 말아야 할까 고민했다면 넥타이를 메고 가는 세계와 메지 않고 가는 세계가 이미 생겨있다고 보면 됩니다. "

확실하게 말 해줄 수 있는 건 난 이 세계의 김석진이 아니에요.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요. 지민은 표정관리가 어려워서 하마터면 자기가 지금 석진의 집에 앉아있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지민은 약간 사이비의 느낌이 났으나 신흥 종교냐는 물음은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알았으니 집에 돌아가봐야 한다며 돌아 나가자 다가와 붙잡았다. 다른 김석진을 보고도 안믿겨요? 

"그럼 어느 선택지의 김석진 입니까?"
"오, 진짜 천재시네."
"제가 쫌 합니다?"

읭, 이 번에는 석진이 투 턱을 만들었다. 뭔가 또 휘말리고 있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지민은 고등학교 때 생기부에 적겠답시고 읽었던 평행우주에 관련된 교양책을 떠올렸다. 이런 학문을 만들다니 그냥 소설책을 쓰세요, 하며 느낀점에는 '아주 유익한 책이었다'를 갈겨적었는데 이걸 실제로 겪어보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1번 도플갱어다.
2번 쌍둥이다.
3번 귀신에 홀린거다.
4번 평행세계에서 온 김석진이 내 앞에 있다. 나는 박지민C.

새로 추가된 4번이 심히 구체적이라고 해도 현실성이 있는 보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김석진은 1,2,3번의 보기들을 전부 던져버리고 4번을 주장하며 추가로 증거를 원하면 언제든지 다시 찾아오라고 지민을 내쫓아버렸다. 언제는 자기 말 믿어달라면서 이 번에는 지민을 내보내 버리다니. 배신감에 재수 옴붙었네! 하고 문 앞에서 소리치던 지민이 등 뒤에서 마리오의 비명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최의원 조심해요. 석진이 그렇게 말 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꺼림직한 앵무새와 평행세계에서 온 김석진B.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계속해서 뒤를 돌아봤지만 석진은 대문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최의원이랑 만난 걸 어떻게 알지?"

여어, 왔는가 하며 지민을 반기던 태형이 "오 시발!" 소리치며 자신의 고급 시계들을 먼저 이삿짐에 싸 들고 여행가방을 꾸렸다. 지민은 그 혼란 속에서 짱구를 굴려대느라 태형이 자신의 진열되어 있던 피규어의 팔 하나를 작살냈다는 사실마저 인지하지 못했다. 침을 꼴깍 삼킨 태형이 부러진 팔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눈치를 보며 방으로 들어갔다. 지민은 2층에 대고 소리질렀다. 야! 짐싸지 말고 대기해봐. 지민의 말은 평소에 태형에게 아주 신빙성 있는 소리였으므로 태형은 알겠다며 제발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지민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서재로 달려가 데스크탑의 전원을 켰다.













"계세요? 김검사님."
"검사인건 아네요?"
"문좀."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골프자세를 연습하고 있던 석진이 고개를 한 번 들어 인터폰에 비친 사랑스러운 지민의 얼굴을 감상했다. 괘씸해서 다시 찾아오면 놀려주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하루만에 빠싹하게 공부를 마치고 온 지민이 기특해서 상으로 양쪽 볼을 모찌처럼 쭈욱 늘려잡고 입술에 키스를 퍼붓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지민이 심장마비가 올까 두려워 충동을 잠재우고 문을 열었다. 얼마나 심하게 공부를 했는지 눈 아래가 쾡한 지민이 심통한 볼을 하고 서 있었다. 다짜고짜 "다 이해해요! 이해하는데, 도대체 여긴 왜 온거에요?" 딱 봐도 에라 모르겠다 그냥 한 번 속아넘어가자 심보인 지민이라 살짝 못미더웠으나 이 정도 발전이 하루만에 이뤄진 것이 어딘가 싶어 손을 잡아 끌어 집으로 향했다. 지민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 처럼 발을 질질 끌어 집에 들어가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민에게 설명하자면 아주 긴 시간이 될 것 같았다. 석진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지민이 어떻게 하면 자신을 받아들일까 고민했다. 난 네가 사는 다른 세계의 애인이고 앞으로 넌 김석진을 만나 사랑에 빠질거라고. 그리고 그런 널 막기위해 내가 여기로 왔다고. 이쪽 세계의 애인 멘탈을 케어해주는 자신의 노고를 누가 아리. 지민이 멍청하게 앉아 유자차를 홀짝이는 것을 보던 석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지민씨 너무 사랑해요. 성급했나 싶어 지민을 쳐다보자 그는 하관으로 유자차를 질질 흘려대고 있었다. 그렇게 혐오할 필요는 없잖아요. 우리 인연은 천문학적인 확률로 만나 사랑을 나눈 정말 소중한 추억이란 말이에요! 사랑스럽다는듯 쳐다보며 휴지로 톡톡 닦아주는 걸 마지못해 받아내던 지민이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이유나 좀 물읍시다. 어제 너무 정신이 없어서 대답을 못받았는데 도대체 여긴 왜 온겁니까?

석진이 씨익 웃었다. 그것은 가히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여 지민을 동요시키고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다. 석진은 단 한번 있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지민이 앞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른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김석진B의 세계에 사는 박지민은 생각보다 더 귀엽고 날카로웠다.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면서 항상 뒤질래요?를 입에 달고 살았다. 자신의 삶에 침투한 박지민 때문에 지금까지 목이 날아갈 뻔 한 적이 무수히 많았으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미 이쪽 세계의 박지민은 알고 있었으니 두 번이다) 자신은 스릴있는 연애 취향이다. 왜? 몰래하면 더 흥분되잖아. 지민은 이 대목에서 뒤로 넘어갈 것 처럼 쇼킹해했다. 뒤졌다 깨어나도 당신 안좋아할 것 같은데요. 하는 박지민을 보고 얘기했다. 그럼 왜 내가 여기에 왔을까요. 지민은 이해력이 아주 빠르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므로 아무말 하지 못했다. 석진은 그제서야 말이 잘 통하게 되었다며 잔뜩 신나 있었다. 그의 어깨에 내려앉은 마리오가 또 지민아!를 외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같이 신나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당신이 할 일은 김석진을 피하는 거에요."
"이미 만난 걸 어떻게 합니까."
"아직 안 사겼으니까 됐어요."

지민은 미래의 자신이 어떻게 정신이 나갔길래 눈 앞에 있는 사람과 연애를 하는지 믿을 수가 없어했다. 석진은 태연하게 고개를 돌려 마리오를 새장으로 보냈다. 이 과정은 아주 힘들걸 잘 알지만 우리는 할 수 있을거라 믿습니다.

"전혀 힘들지 않을것 같은데..."
"이렇게 매력적인 사람에게 그런 심한 말을!"
"만나지 말라면서요!"

석진은 모든 김석진들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을 좋아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지민은 무엇보다 그 제복입은 김석진이 자기 눈 앞에 있는 김석진으로 변했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민은 오늘 아침에 최의원에게 문자를 받았다. 식사나 한 번 하자는 말에 큰 함정임을 깨닫고 석진에게 물었다. 최의원 끼고 밥먹은 적 있죠? 석진이 옳타꾸나 고개를 끄덕였다. 석진을 그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세계들이 굉음을 내며 사라졌다. 그러나 눈 앞에 있는 석진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지민은 이런 식으로 경우를 없애면 되냐 물었다. 석진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들은 수 없이 많은 인연과 선택들이 얽혀서 만들어낸 평행세계들로 발디딜 틈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 석진은 그 경우의 수를 아예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석진은 지민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끌릴 것이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다. 행복하고 슬픈 운명이었다.

"형아가 밥 줄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지민을 쳐다보던 마리오가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흥분했다. 아악아악 소리를 지르던 마리오가 좌우로 머리를 흔들고 그걸 지민도 따라했다. 얜 뭐가 그렇게 신나는 거에요? 지민이 뒤를 돌아보며 웃자 석진도 따라서 웃었다. 마리오는 지민을 좋아했다. 당연히 자기 주인이니까. 죽은 애인의 동물을 이어서 키우는 것은 영원히 잊지 못할 슬픔을 떠안는 것이었지만 계속 떠올릴 걸 알면서도 지민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했다. 그리고 항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자신을 원망하는 이유로 사용했다. 죽은 주인을 뒤로하고 과거의 다른 차원에 살고 있는 주인을 만나 재롱을 부리는 앵무새로는 마리오가 유일무이할거다. 석진이 자연스럽게 둘에게로 다가갔다. 잠시 아무일도 없던 것 같은 환상에 빠졌다. 박지민은 죽지 않았고, 다시 집에서 만나는 그런 환상. 

머리를 이리저리 함께 흔들다가 목이 아프다고 잠시 멈춘 지민이 가까이 다가온 석진을 알아채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게 다가간 석진이 지민의 뒷 머리를 천천히 쓸었다. 잠시 멈칫하던 지민이 입을 열었다. 김태형도 내 뒷통수만 보면 쓰다듬어주고 싶다던데. 짱구머리 뭐가 좋다고 다들 그러는지 모르겠네. 석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지민이 아무렇지 않은 척 해도 알고 있었다. 김석진은 자신의 말과는 반대로 괴로워하고 있다는걸. 그의 의지가 너무 완고해서 지민은 그를 도와주기로 했지만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꼭 미래를 바꿔야만 행복해지는 게 아닌데 석진은 이 세계에서의 모든 시간들을 괴로워했다.

"잠깐만 돌아보지마요."

석진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눈물을 흘렸다.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가. 우리가 만난 게 너무 큰 죄라서 그걸 자신이 직접 과거를 지우는 걸로 벌을 대신하는 걸까. 단지 박지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아예 포기하라고 내몰려진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지민의 머리에 닿는 석진의 손 끝이 떨렸다. 지민의 등이 천천히 굳으며 긴장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바로 눈앞에 있는 박지민을 다시 한 번 사랑하게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눈이 멀어도 이 순간을, 이 촉감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지민은 계속해서 자리를 만드려하는 최의원에게 당분간 일을 쉬어야겠다며 해외여행을 좀 다녀올테니 다시 연락할 때 까지 대기하고 있으라 했다. 최의원은 지민의 싸가지에 잠시 기분이 상한 듯 대답이 없었지만 이내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제 최의원을 만나는 세계들이 또 사라졌다. 그러나 계속해서 아직 멀었다며 불안해했다. 지민은 석진이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어서 덩달아 사람이 조급해졌다. 아니 둘이 만나면 지구멸망이라도 한다는거야 뭐야. 불만은 한가득이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제 됐죠? 난 이제 더 할게 없어요."
"아직 멀었어요."
"뭘 더 해야된다는 거에요?"

지민이 말을 멈췄다. 지민은 아주 머리가 좋고 이해력이 높았다. 
멍청하게 자기가 사라지겠다는데 좋다고 동조한 꼴이 된 지민은 석진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갈 수록 불안해했던 이유는 자신이 이 세계에서 사라지지 않아서였다. 석진은 도플갱어를 만나 심장마비로 죽는 것도 아니고 아예 존재 자체가 없어지는 것을 원했다. 석진은 그제서야 지민에게 생긴 죄책감을 지우려 이쪽 세계든 다른 쪽 세계든 김석진은 하나의 김석진이라 했다. 그러나 지민은 눈 앞에 있는 현상을 보기로 했으므로 석진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석진은 이쪽의 자신과 사랑에 빠지지 말라고 했지만 지민을 마주하고 있는 자신도 김석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지민은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김석진에게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서서히 인식했다. 그래도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했다. 자신조차도 김석진이라는 것을 알아서 이제 더이상 박지민의 눈 앞에 나타나지 않을까봐. 자신이 청개구리라는 사실을 인증한 꼴이 된 지민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 말대로 영원히 이쪽 김석진 안 보게 다 관둘게요. 어짜피 영원히 이 짓거리 하고 살 것도 아니었으니까. 김태형이 회사 차린다고 했으니까 난 비서 시켜주겠지. 지민이 석진의 집을 빠져나갔다. 김석진은 생각보다 더 이기적인 사람이구나. 석진은 우는 지민을 달래주지 않았다.

그쪽 세계의 김석진과 박지민은 만나서 행복하게 연애했고 스릴있는 판타지를 이루며 살았다. 그리고 석진을 위해서 최의원과의 끈도 놓지 못한 박지민이 그 죽여버려도 시원찮을 영감탱이 때문에 감히 어린 놈 주제에 자길 농락했다는 이유로 찬 바닥에서 혼자 남겨져 서서히 죽어갔다. 그대로 즉사했던게 아니었다고, 찬 바닥에서 몇 시간동안 혼자 외롭게 누워있었다고 했다. 석진은 아무것도 못 해보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석진은 이쪽 세계로 온 순간 최의원을 찾아가 목을 졸라버리려고 했지만 그 때마다 이쪽 세계의 자신이 훼방을 놓아버려서 약 200번의 시도 끝에 "좆같은 김석진 개새끼야!"를 자신에게 외치며 포기했다. 석진이 이쪽 세계의 석진과 마주치게 된다면 세상은 혼돈에 휩싸여 모든 세계가 서서히 일그러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이론상은 그러했다. 자신의 기억에도 이상이 올 게 뻔했다. 서서히 자신이 모든 원흉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원흉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박지민을 찾고 또 찾았다. 용의주도하게 이사를 반복하는 통에 지민에게 욕을 좀 했지만 이대로 가다간 박지민과 김석진이 만나 사랑스러운 애인이 죽는 것을 또 지켜볼 수가 없었다. 지민아! 지민아! 아악아악. 자신을 따라하는 마리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
지민은 적어도 지금 자신이 제정신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어쩌다가 김석진B를 만나 김석진을 피하려다 김석진B를 사랑하게 되었는가. 당장 정신병동에 갇힌다고 해도 납득할 수 있을 이유였다. 운명이란 건 꽤 무서워서 알아차리지 못한 순간 이미 인식되어 있었다.

왜 이사를 안가냐며 평생 깜빵에서 썩고 싶어 환장했냐고 흥분하는 김태형에게 쌍둥이가 맞다고 구라친 이후로 그 발작성 지랄은 없어졌지만 은근 자신이 옆집 남자와 계속해서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게 못미더운 것 같았다. 그래서 둘이 만날 일 없다고 이해를 시켰다. 둘이 연 깠어? 그 말에 대답을 하진 못했다. 

무너져내리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김석진B는 박지민C를 위해 사라짐을 택한다. 지민은 대체 뭐 때문에 우리 둘이 영원히 만나지 말아야 하냐고 물어봤지만 석진은 그냥 내 말 들어요. 하며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지민은 직감적으로 석진이 안 좋은 일을 막으려 하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되나 싶었다. 평소에도 운명에 순응하는 삶을 살았다. 좆같은 인생이면 그 인생을 탓했고 그대로 삐뚤어져버렸으면 버렸지 이겨내려 노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석진은 애인의 운명을 바꾸려 박지민을 찾아왔다.

"그럼 날 사랑해요?"
"당신도 박지민이니까."

난 아냐. 지민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나한테 키스할 수 있겠네요. 아무렇지 않은 듯 얘기했지만 석진이 진짜 다가오려하자 기겁을 하며 거실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석진이 잠깐 이쪽 세계의 김석진에게 이입했음을 깨닫고 거실 한 가운데 우뚝 멈췄다. 장난이에요. 그리고 저릿한 손을 폈다가 쥐며 감정을 짓눌렀다. 김석진B는 아직 지민을 놓아줄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최의원과의 연결고리를 아예 끊어버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의논했다. 해외 도피, 신분세탁, 위장취업 등등 많은 방법이 나왔지만 다 꽤 시간이 걸리는 일들 뿐이었다.

지민에 의해 수 없이 많은 경우의 세계가 사라졌다. 석진은 더 이상 새장에 존재하지 않는 마리오를 보며 하루 종일 눈물을 흘렸다. 인연들이 천천히 사라지고 이제 자신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지민이 갑자기 손뼉을 짝! 하고 쳤다. 그리고 서재의 데스크탑을 켰다. 최의원과 관련된 데이터와 지금까지의 모든 데이터 수집 목록들을 전부 영구삭제했다. 잔여 데이터가 저장된 메모리와 컴퓨터도 완전히 폐기해버릴것이다. 지민은 박수칠 때 떠나려면 그 때가 지금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 살고 있는 동안 돈은 어디서 난 거에요?"
"그건 시크릿."

입술에 석진의 손가락이 닿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를 내질렀다. 아 진짜 뭘 믿고 저러는지 모르겠어! 그러자 석진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얼굴이죠. 제 자신감의 원천은 얼굴입니다. 지민은 말을 말았다. 진짜 얼굴로 모든 걸 설명할 기세의 석진을 무시하고 지나쳐가자 석진이 쪼르르 뒤쫓아왔다. 우리가 힘을 합치려면 한 시라도 떨어지면 안 된다는 이상한 이유를 대며 김태형과는 접촉하지 않으려 했다. 다른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건, 당신 하나로 족하다고 이제 집 밖에도 나오지 않았다. 항상 집에서 지민을 기다리고 있겠다 했으니 이제 말하지 않아도 집으로 찾아오는 지민을 위해 항상 그를 기다렸다. 지민도 어느순간 석진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까봐 눈으로 그의 등을 쫓았다. 그것은 지민도 인식하지 못할만큼 아주 익숙했다.

석진은 이 곳의 자신이 이미 너무 지민을 사랑하고 있어서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의미없이 지민의 손을 잡는다던가 물끄러미 쳐다보다 저녁 차려줄까요? 하고 사라졌다. 지민은 그쪽 세계에서 겪은 그와 자신의 일을 알고 싶어 했으나 이미 사라질 확률에 미련을 가지지 말라고 거절했다. 이건 나만 간직할거에요. 지민씨는 궁금해하지도 말고 우리의 목표만 생각하면 됩니다. 사실 지민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원하는 목표를 알 수 없었다.

태형은 지민이 자신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모든 데이터를 지워버렸다는 사실에 한동안 심퉁하다가도 지민이 요즘 기운이 통 없어보여 걱정했다. 너 빨리 말해. 최의원이 막 너한테 와서 막 사귀자고 그랬어? 아니면 막 이케이케 해가지고 막 니가 지금 우울한거냐? 아니 도대체 막이라는 말을 왜 문장 사이에 집어넣고 있는건지. 자신도 인지하고 쓰는 걸까? 태형은 부끄럽다거나 흥분했을때 소통능력이 80퍼센트 감소하는 능력과 더불어 같은 말을 반복하는 버릇도 있었다. 지민은 웃으면서 아니. 우리 언제까지 이러고 살까 싶어서. 너 사업하고 싶다고 했잖아. 그거 하자. 그 말에 태형의 눈이 약 2배 동그래졌다.

"와 진짜지? 진짜? 나 막 사장님 명패에 김태형 딱 써놓고 막 책상에 다리 올려서 막 어이 박비서 이번에 실적이 어떻게 되나? 막 이케 물어보고 싶었어!"
"그래."
"와 씨, 지민아 너 뭐먹고 싶냐! 다 말해!"

태형이 활짝 웃었다.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지지리 궁상떨던 군바리 두 명이 휴가를 맞춰 나와서 놀 친구가 한 명도 없어 모텔방에 눌러앉아 월급으로 산 젠가를 장장 8시간을 했던 건 다시는 떠올리고싶지 않았던 개같은 기억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때가 없었으면 지금 태형과 지민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젠가가 아니라 원카드를 했으면 지금쯤 강원랜드에 가서 팬티까지 꼴아박고 알몸으로 쫓겨나 새벽 공기에 발발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민은 웃음이 터졌다. 넌 왜 뒤늦게 웃냐고 버퍼링 걸렸냐? 하며 물어오는 태형의 엉덩이를 걷어차줬다.





*
태형은 사업계획을 열심히 짠다면서 회사 조직도를 자기 식으로 바꾸고 싶다고 열중이었다. 뭘 할건지 먼저 생각해야지 태형아. 환장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지민이 뭐 알아서 잘 하겠지 하며 손을 놨다. 태형은 포기도 빠르니 금방 다른 걸 찾아낼거라고 믿었다.

지민은 석진이 항상 차려주던 저녁을 먹다가 너무 달고 매워서 얼마 먹지 못하고 접시를 내려놨다. 석진이 왜요? 맛이 없어요? 걱정 했다. 지민이 자극적인 음식은 별로 안 좋아해서요. 하고  물을 마셨다. 석진이 멍해졌다. 지민이가 좋아했던 음식이 뭐였지? 지민이 이쪽세계에서 무언가를 바꿀때면 석진의 기억은 어느날 뒤죽박죽이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것을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놀라 말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자신도 음식을 다 치워버렸다. 당연히 배가 다 차지 않아 새벽에 뭔가를 잔뜩 주워먹을게 뻔했지만 지금은 먹고 싶지가 않았다. 

"자자. 우리 정리해봅시다."
"뭘요?"
"나는 박지민이 김석진을 만난 후의 세계에서 온 김석진이고 당신은 아직 김석진을 만나지 않은 박지민이죠. 우리는 많은 노력을 했지만 아직까지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그냥 이대로 있으면 안 돼요?"

석진이 고개를 저었다. 눈이 날카로워졌다.

"언젠가는 당신이 반드시 김석진을 만난다는 거니까 절대로."
"..."
"안돼."

니가 찬 바닥에서 나를 떠올리며 죽어갈 동안 좆같은 행사에 참여해서 의미 없이 앉아있던 나 같은 사람은 절대 만나지 마. 하지만 지민은 영원히 몰라야 했다. 석진이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생각이 났어요. 김석진에게 지민씨와의 만남 대신 다른 연결고리를 만들어줍시다.

지민은 찝찝하게 자세한 걸 기억하지 못하는 석진의 신상을 털었다. 지민이 운명을 바꿀 때 마다 석진의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그걸 옆에서 김석진이 지켜보고 있는 기분은 심히 좋지 않아서 괜히 실수할까 두려워 어디로 좀 가 있으라고 부탁할 지경이었다. 김석진의 퇴근길 루트를 먼저 알아낸 지민이 서재에서 나오자 석진이 기다렸다는듯이 다가와 번화가에서 봤던 첫 만남을 기억해냈다. 이것은 역시 지민이 석진과 함께 만들어낸 수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였다. 백화점 앞에서 누군가와 함께 서 있던 지민을 기억해내고 처음 말을 걸었다. 그게 최의원과의 자리 이후 두 번째 만남이었다.

김석진이 승용차 요일제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날은 일주일 중 딱 하루였다. 백화점 앞을 지나가는 석진이 자신에게 말을 걸려고 했을 때 함께 있던 김태형을 김석진에게 떨구고 도망갈 생각이었다. 그때까지만해도 신상 시계를 사준다는 말에 팔짝 뛰고 있던 태형이 김석진과 부딪힐거고 지민은 그대로 도주하면 됐다. 이걸로 될까요? 그 말에 석진은 고개를 으쓱했다. 뭐 안하는 것 보다는 낫죠. 석진의 기억이 또 바뀌기 시작했다. 자신이 검사인 것을 알아챈 김태형이 자신을 슬금슬금 피해 도망갔었다. 석진은 이대로 가다간 진전 없이 마지막을 맞이할 자신들을 걱정했다. 

"만약에 이것도 꽝이면 그냥 찾아가서 숨겨진 쌍둥이라고 구라치고 같이 손잡고 알콩달콩하게 사세요."
"욕심쟁이시네. 내가 둘일텐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합니다!"
"뭘요?"

음흉하게 쳐다보는 석진을 무시하고 달력에 크게 표시했다. 이 날이 우리 계획을 모두 실행하는 중요한 날입니다. 우렁차게 선언한 것과는 달리 지민과 석진은 착잡한 표정으로 빨간 동그라미를 응시했다.






*
"야... 너 왜그러냐? 저번부터 나한테 왜이렇게 잘해주는 건데, 엉? 존나행복하네 진짜."
"알면 알아서 모셔. 자꾸 그러면 가버린다."
"에잉, 형님."

결국 안사줄거지롱. 속으로 끅끅 웃은 지민이 백화점 앞에서 뜸을 들였다. 여기까지 와서 갑자기 생각이 바뀐거냐며 안달난 강아지 표정인 태형이 지민에게 징징댔다. 미래 사장님한테 투자한다며! 진짜 여기서 다시 집에 가면 두고두고 삐져서 너랑 말 안할거다! 지민은 한 대 줘박고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지민은 여러 번 석진이 그냥 이 세계에서 자신과 함께 지내는 걸 상상했다. 하지만 김석진B가 이 곳에 있을 수록 여기 김석진이 자신을 만나지 않는다면 김석진B의 존재가 모순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혼란이 생겼다. 도대체 나더러 무슨 결정을 내리란거야. 생각해보면, 김석진B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저기,"

등 뒤로 기척이 들렸다. 석진의 목소리였다. 난데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태형에게 말했다. 미안, 시계 두개 사줄게. 태형이 뭐냐? 하고 있는데 태형을 있는 힘껏 밀어서 석진과 함께 넘어가게 했다. 그런데 이게 왠걸, 엄청난 반사신경의 석진이 태형을 휙 피했고 태형은 아 씨바 박지민! 하고 바닥에 굴렀다. 운명은 생각보다 강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지민을 집어삼키는 느낌이었다. 당연히 김석진B는 작전이 성공하기를 빌면서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텐데 대단한 변수에 지민이 에라 모르겠다 줄행랑을 쳤다. 김석진이 두명이면 뭐 어때 시발!

"아악!"

어떤 덩치 큰 사람을 피하려다 턱을 밟고 넘어져 지민도 태형과 같은 모양으로 바닥을 굴렀다. 석진이 서서히 지민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만난다. 만난다. 만난다! 이러다가 진짜 만나겠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던 지민을 누가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지민을 일으켰다.

"그대로 앞으로 달려."

그 속삭임에 지민이 울면서 앞으로 튀어나갔다. 석진은 김석진이 지민을 보지 못하게 등으로 가리고 서 있다가 지민과 함께 거리를 빠져나갔다. 둘은 눈물이 범벅인 채로 한참을 엎치락 뒤치락 달리다가 집 근처 담벼락 앞에 엎어졌다. 지민은 숨이 차서 죽을 것 같았다. 성공인가? 김석진은 박지민을 만나지 못했는가? 지민이 숨을 고르며 벌떡 일어나서 아직도 엎어져있는 석진을 내려다보았다. 석진은 지민을 보자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은근히 자주 넘어지니까 불안하더라구요. 지민이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지금까지 불안해서 덜덜 떨며 몰래 보고있었을 석진이 상상이 가서 그랬다.

준비할 시간도 없이 김석진B의 세계가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민과의 얼마 남지 않은 추억들이 서서히 떠오르지 않았다. 확률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완전하게 사라지기 전 까지 석진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을까 불안했다. 우리는 성공했어요! 이쪽 세계의 박지민도 꽤 매력적이었어요. 잠깐만요, 이렇게 갑자기 사라지는게 어디있어요! 석진이 웃자 지민이 당황한듯 석진의 팔을 잡았다. 반대로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귀여워서 석진은 소리내어 웃었다.

"우리 둘이 만나면 진짜 지구멸망이라도 되는거였어요?"
"맞아요. 세상이 멸망하고 아무것도 남지가 않아서 지구를 지키려고 온 용사랍니다."
"구라치네! 솔직하게 말해요 제발."
"우리를 위해서였어요. 그게 내가 존재했던 이유에요."

우리를 위해서라면 만나는 게 더 좋은 거 아니에요? 지구가 멸망을 하던 말던 서로 사랑했으면 된거잖아요. 우리 잘못 아니잖아. 지민이 또 물었다. 석진이 지민의 다급한 눈에서 이미 사랑에 빠진 그를 알아챘다. 그런 경우는 없을거라고 말했다. 아주 다른 경우의 김석진B-07a와 박지민B-07a라면 모를까. 지민이 석진의 앞에서 기어코 울고 말았다. 앞이 죄다 눈물이라서 김석진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미 보이지 않을지도 몰랐다.

"우리들의 세계에서는 만나지 않는 게 최선입니다. 이제 가야할 시간이 왔네요. 사랑했어요. 안녕."










<C의 의지>


아, 존나 피곤하다. 회사 앞에 산다고 해서 존나 시도 때도 없이 불려나가는 회사원 인생이 얼마나 고달프냐 하면 지금 당장 사장 마빡에 다트를 한 다음 사무실 책상 위에서 레이디 가가의 applause에 맞춰 바지를 내리고 춤을 추면 평생 일을 하지 않아도 마음대로 먹고살게 해줄 수 있다고 했을때 주저않고 먼저 바지를 내릴 수 있는 기분이었다. 회사 근처에서 회식 후에 술에 취해 데려다 주냐는 말에 아녀 괜찮아영. 저 회사 앞에 살거든용 헤헤. 했던 과거의 박지민을 죽여야 한다. 나쁜새끼다 그 새끼는.

태형은 지민도 자본을 투자했던 사업을 크게 말아먹고 이번에는 귀농을 한다며 저 강원도 기슭에 헐값에 나온 땅을 1000평이나 샀다가 그린밸트에 묶여서 시세가 뛰어오른 다른 시계들도 죄다 팔아버려 샀던 돈을 다 날렸다. 지민이 헐값에 나온건 의심을 해봐야 된다고 누누히 말했지만 태형은 일단 자기가 좋은 건 해야하는 성미의 소유자였다. 놈의 사업이 그럭저럭 잘 되면 높은 자리 하나 꿰찰 줄 알았던 지민은 회사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싹 망해버리자 거리에 나앉았다가 그것도 경력이라고 우기며 어느 모사이트의 시스템 관리 부서에 취직했다. 둘의 화려한 일상 복귀였다. 

그리고 김태형은 이제 티비에 나온다. 존나 사람일은 어떻게 될 지 모른다는 말의 표본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캐스팅됐다고 어안이 벙벙해하던 놈이 갑자기 연기를 배우더니 어제는 주말드라마에 카메오로 나왔다. 30초 가량 지나가던 행인1로 나왔으나 3시간은 웃어대는 지민에게 족발당수를 날리며 이제 시작이라고 나름 열정을 보이는 태형에게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도 이제야 잘 되는구나. 우리는 잘못된 게 아니라 한참을 돌아가고 있었구나. 다행히도 태형과 지민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그 둘 뿐이었다. 

지민은 가끔 지민아! 하고 부르는 마리오의 환청에 놀라곤 했다. 앵무새는 한 달여간의 충분한 반복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이 김석진B가 항상 그쪽 세계에서 박지민을 생각했던 흔적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 김석진B. 당장이라도 그를 찾아가려 했지만 B의 의지가 너무 확고해 더이상 이쪽 세계의 석진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민은 버릇이 생겼다. 선택을 할 때마다 김석진을 떠올렸다. 그것은 절망적인 기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B와 지민은 세계를 구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번에는 1분 이상 나왔으니까 다음에는 5분, 그 다음에는 10분 나올거야. 내 자서전에 딱 쓰면 간지나는 말 아니냐? 어때, 탑스타 김태형의 무명시절 일대기를 옆자리 1번에서 듣는 소감이?"
"그리고 그는 대학생때 해킹으로 한탕 하고 다녔답니다. 부디 단벌을 내려주시길."

아아 이 개새끼가. 어디가서 함부로 주둥이 놀리고 다니면 진짜 뒤지는 줄 알아. 태형은 벌써부터 알아보는 사람도 없는데 이미지 관리한답시고 지민에게 과거이야기 금지령을 내렸다. 지민은 태형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둘은 남들과는 다른 과거를 보냈다고 해서 그때를 후회하지 않았다. 들키는 한이 있더라도 시치미를 존나 잘 뗐다. 자기들 말로 나쁜 놈들이었으니까. 태형이 엉덩이를 긁으며 테이블 위에 울리는 지민의 전화를 발로 툭툭 밀었다. 전화왔다. 잘 나갔다와. 이제는 지민이 받지 않아도 용건을 아는 태형은 자신이 나온 부분을 26번째 돌려보며 웃고 있었다. 딱 내 나이만큼만보고 다시는 안 돌려볼거야.

"지금은 좀 힘든데요. 아... 알겠습니다."

시발 내가 진짜 애인을 만들던가 해야지. 앞으로의 애인에게 미안하지만 그 핑계라도 대면서 주말 호출을 조건 반사로 튕겨낼 수 있었을텐데 팀장은 지민이 얼마나 할 일 없는 솔로 회사원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왠만한 구라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근무 외 수당이라도 주냐? 그것도 아니면서! 대충 어제 입었던 다 구겨진 티셔츠를 다시 입으며 언젠가 내가 진짜로 바지를 내리리, 하며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혼자 밥 먹어."
"귀찮으니까 시켜먹어야겠다."
"니가 돈이 어디있냐."
"헤헤, 오만원만."

지민은 입을 네모로 만들며 웃는 태형에게 차마 욕을 해줄 시간도 없어서 미래에 대한 투자라 생각하며 지갑에서 3만원을 꺼내 던졌다. 돈으로 딜치기 싫어서 미리 높게 부르는 걸 알기 때문에 늘 그것 보다 적게 주곤 했다. 굽이 낮은 구두를 구겨신으며 산발인 머리를 털고 안경을 고쳐썼다. 다녀올게. 태형은 답이 없었다.

거리에 수 많은 세계가 있었다. 지민은 그들 중에 누군가는 다른 세계에서 찾아와 지구를 구하려는 사람이 있을거라고 믿었다. 지민은 빨간 불에 멈춰 서서 쩌억 하품을 했다. 옆에 키 큰 남자가 서서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짜증나게. 길 건너편에는 애완동물가게가 있었다. 초록불이 켜졌다. 남자가 긴 다리로 지민을 아주 가볍게 추월해 앞서나갔다. 그리고 가게 앞에서 멈춰섰다. 그는 허리를 굽혀 작은 새장에 있는 앵무새를 쳐다봤다.

지민아!

지민이 환청이 들려 남자가 보고 있는 작은 앵무새를 바라봤다. 남자는 앵무새에게 손을 흔들었다. 저 멀리 떠나가는 남자를 한참이고 바라보던 지민이 입술을 꽉 물었다. 그의 B는 이럴 때 어떻게 하는지 전혀 가르쳐 주지 않았다. C는 천천히 남자가 간 방향을 걸었다. 두어 걸음 나아가다 조금 더 보폭을 크게 하고 희미해진 남자의 등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가 코너를 돌아 눈앞에서 사라지자 그제서야 박차고 뛰어나갔다. 너무 늦었나. 지민의 얼굴이 땀으로 망가졌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미용 시기를 놓친 머리가 엉켰다. 힘이 자꾸 빠지는 다리를 질질 끌어당기며 천천히 가까워지는 남자의 등에 손을 뻗었다. 박지민 a도 b도 전부 박지민이라면 B도 C도 전부 김석진일까.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우리는 결국 세계를 지키지 못했다.





월간진지 '진지한 달' 5월호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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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Zipd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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