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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람을 좋아했다가 웃음거리가 되었다. 감정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수많은 고민과 두려움들 그리고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의 관심들. 그 과정들은 다른사람들에겐 의미없는 남얘기에 불과해서 혼자 상처받기에도 애매한 상황이라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치부 같은 이야기를 들킨 것도 아니었다. 고작 친구들이 하는 심심풀이 얘기에서 넌 어떻게 생각하냐는 물음에 한 마디도 못하고 겨우 고개만 주억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게. 나도 이해가 잘 안되네.

누가 그러라고 한 적도 없는데 혼자 빠져나와서 집 거실에 퍼질러앉아 혼자 2차를 씹는 느낌은 세상에 혼자 남아 마지막 날을 보내는 느낌이었다. 뭘 바란적도 없는데 거절당하고 먼저 화내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욕을 얻어먹은 적은 많았는데 화도 안나고 허탈한 적은 처음이네. 그냥 눈물도 안나오길래 웃었다. 세상에 여러가지 사람이 있다고 그렇게 강조하면서, 사실 그런 건 없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들을 미리 무서워하며 더 숨길 건 없나 항상 주시했고, 오히려 더 그들 사이에 숨어야 비겁해도 안심은 할 수 있었다.

사회적 평판이란 건 그만큼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에겐 양날의 검과 같아서 한 순간에 천국과 지옥을 오갈 수 있단 소리가 그냥 나오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것에 목숨까지 걸 때도 있다고 한다. 석진은 한 번 그 지옥의 문턱앞에서 벌벌 떨고 돌아섰다. 솔직해졌다가 지옥으로 떨어져 끝을 보는 사람들을 지켜보던 경우가 많은 석진은 영원히 열어보지 않을 상자에 꽁꽁 숨겨놓고 잠근 열쇠도 그냥 저 멀리 기억 반대편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석진은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을 미워했다. 누굴 좋아하는 건 약자가 되는 방법중에 하나라고. 그 동안 스쳐지나간 사람들은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하다 시간이 지나며 안쓰러워했다.

'태어나서 누굴 좋아해본 적은 있을거 아니야?'
'...'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랬네. 갈게, 좋은 사람 만나.'
'애초부터 자유도 안 줘놓고 선택하라는게 싫으니까.'

남자는 옷을 꿰어입다가 얼굴을 이상하게 찌푸리며 웃었다. 석진이 설명을 안 해도 알것같은 느낌이었다. 우리같은 사람들이 꼬이면 더 비참해지는 법이야. 멘탈도 좀 강화해두는 게 나중에도 좋을거라고.

'좋은 사람 만날거라는 말은 그냥 하는 인사거든? 사실 널 좋아하는 사람은 좀 불행할 것 같아서. '
'...'
'행복해지길 바랄게.'

어색한 발걸음으로 모텔방을 나서는 그는 이제 더이상 볼 사이가 아니었지만 남겨진 사람은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석진은 그를 찾아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남자는 그 날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지독히도 불행한 우연이었다.






[진지] 겁쟁이 6년






/ 선생님 일어나셔써여?(웃음)
/ 오늘 저희 반 1교시 맞죠?
/ 저 오늘
/ 숙제 해왔는데...
/ (부끄)
오전 05:45

5시 45분은 심하잖아. 석진이 잔기침을 하며 어플을 종료했다. 항상 1교시가 있는 날마다 설렌다며 일찍 일어나 어김없이 자길 깨우는 놈의 친절함에 적어도 15분은 더 잘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대에서 발을 내려 슬리퍼를 찾아신었다. 너희 담임한테 그렇게 해봐라. 궁댕이 토닥이며 노래라도 불러줄걸. 텁텁한 목구멍에 생수를 들이부으며 가슴팍으로 흐르는 물에 몸서리쳤다. 시험문제 내느라 새벽 한시에 잠들었던 것 같은데 태평하다 못해 나사빠진 놈은 언제 담임도 아닌 사람 번호를 저장 해놨는지 매일 아침, 쉬는시간, 점심, 저녁, 하교 후, 주말까지 수시로 톡을 보냈다. 아직 친구로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라는 톡방 상단 경고창을 없애지 않았다. 그게 뭐라고 꿋꿋하게 아직까지도 자리하고 있었다. 항상 말하는 쪽은 그쪽이었고 대답하지 않은 쪽은 이쪽이었다. 그 톡과 한결같은 관심이 1년이 넘었다는 사실에 그저 주위 사람들만 혀를 내두르는게 흠이지만.

석진이 조금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기분은 안좋아도 여유는 생겨서 몸을 뒤로 젖혀 이른 아침부터 안경에 눌릴 미간을 마사지하고 있는데 별안간 놈의 담임인 호석이 석진의 책상을 두드렸다. 김선생님. 오늘 또 박지민이에요? 그 물음도 이제는 완전히 질린다는 어투였다. 그 놈 입학하자마자 김선생님 쫓아다닌건 알았는데 하는짓이 밉지 않아서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그 때 호석은 다른학년 담당이라 그 무성한 소문들의 근원인 신입생 박지민에 대해서 실물을 본 적이 없어서 처음에는 그냥 몇 번 그러고 말겠지 하며 넘긴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 년도 지민의 담임이 된 이후에 하루가 멀다하고 교무실에 찾아와 이상한 문제를 석진에게 들이밀며 논리정연하게 설명해줘도 못알아듣겠다는 투로 네에? 흠? 를 연발하는 통에 옆에 있던 호석이 요 쥐방울 만한 것! 을 연발하며 주먹돌리기를 하곤 했다. 박지민은 '쥐방울'에 특히 반응하며 호석과 신경전을 벌이는게 일상이었다.

밥을 먹을 때도 굳이 선생님들 자리쪽을 차지해서 석진을 힐끔거리는건 둘째치고 지민의 그런 행동에 석진은 조금의 반응도 없다는 게 더 이상하긴 했다. 요즘 유행하는 온미남 냉미남 할때 그 온미남 축에 속하면서 하는 행동은 냉미남이 따로 없으니 지민의 말과 관심에도 반응이 없는 건 당연했다. 오르지도 못할 나무에는 관심도 주지 말라거늘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해서 석진과의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또 계속해서 실패하는 것이었다. 겨우 알아낸건 홈페이지에서 찾아낸 전화번호가 전부였으니 어쩌면 톡에 연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철옹성을 떠나 방공호 수준인 석진의 무시 수준은 누가 봐도 끈질긴 박지민쪽이 지쳐 떨어져나갈 수준이다.

"김선생님이 말씀하시면 제가 진심으로 혼낼게요. 짜식이 장난도 정도껏 해야지."
"..."
"아셨죠? 꼭 저한테 말씀해주세요."
"네."

비장한 표정의 뒤로 출근하던 윤기가 흠칫 놀라 호석의 뒷통수를 쳐다봤다. 또 어디에 열이 올랐구만.

"좋은아침."

석진이 윤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침마다 하는 소리지만 고개를 가로젓는 걸 보니 오늘도 박지민이 앞에 대기타고 있다는 소릴 하려는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분명 그쪽은 항상 좋은 마음인건 알겠는데 누가 9살 차이가 나는 애 감정을 그대로 받아줄까. 당사자 빼고 대부분은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장난으로 하는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석진은 그런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알고싶지 않아도 자길 그 이상으로 보면서 언젠가는 자기가 준 만큼 돌아오겠지, 하고 기대하고 있는거다. 그래도 석진은 박지민에게 그만하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럴 수록 더 엮이는 느낌이 들어 이젠 항상 있는 일이라고 치부해 버릴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박지민은 항상 계산을 요리조리 피해서 툭 튀어나올 놈이었으니까.

1교시 시간표가 바뀌었다. 최선생님이 오는 길에 사고가 나서 시간표를 조정하다 석진이 수업을 하지 않게 되었는데 새벽부터 설레어하던 박지민이 어떻게 된들 석진은 관심을 껐다. 오히려 오늘 여유가생겨 나머지 일들을 처리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새벽까지 고심하다 시험문제를 어느정도 마무리지어놓고 내일 수업 준비를 하고 있는데 1교시의 불발이 상심이 컸는지 오전에는 교무실 앞도 지나가지 않던 녀석이 점심시간이 지나고 앞통수를 빼꼼 내미는 것이었다. 석진이 멀리서 보이는 익숙한 머리통을 실눈뜨며 응시하고 있자 박지민이 이제서 얼굴을 내밀고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선생님. 오늘 1교시 바껴서 아침에 기분 안좋았어요. 으으, 아침부터 담임이라니."

정호석이 들으면 주먹돌리기를 할테지만 호석은 요즘 바쁜 시기라 자리에 붙어있는 시간이 없었다. 지민이 땀이 나는지 교복셔츠 두어개를 풀러놓고 손부채질을 했다. 교복 셔츠 안에 노란색 반팔티를 입었는지 그 끝이 조금 땀에 젖어있었다. 석진이 대꾸도 없이 자리를 당겨앉아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으니까 지민이 눈을 굴려 석진의 왼쪽 얼굴을 응시했다. 요즘 전력난이라고 교무실도 선풍기로 대체하거나 온도를 높인 탓인지 그의 얼굴도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우리 선생님 더우시면 안되는데. 히. 밉지 않은 말을 중얼거리며 손에 든 음료수를 내려놓았다. 냉장고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거 꺼내왔어요. 매점누나한테 좀 혼났는데 가장 시원할까봐요. 그리고는 칭찬을 바라는지 석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데 툭, 뒤에서 누가 박지민의 등을 쳤다.

"야 박지민이. 너 교복안에 흰티안입으면 벌점이다. 어?"
"으아, 아침에 빨리 나오느라 그랬어요 쌤."
"오늘 하루 내눈에 띄지마라. 벌점 받기 싫으면. 앙?"
"으씨..."
"으씨??"

유선생이 나무막대를 휘두르며 엉덩이를 차려는 시늉을 하자 지민이 기겁을 하면서 교무실을 달려나갔다. 신경도 안쓰던 분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러십니까? 윤기가 피식 웃으며 묻자 트레이닝복 차림의 그가 께름직한 표정을 지으며 지민이 사라진 교무실 문을 보며 대답했다.

"사내새끼가 여자애도 아니고. 김선생님 남자 아닙니까. 저번에 애들끼리 박지민이 저거 게이 아니냐고 수근대는걸 들었는데 이건 좀 아니다 싶어서요."
"..."
"뭐 애들 장난 여러가지지만 좀 그렇잖습니까."

때맞춰 수업종이 치자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밖으로 나가는 유선생에게 한마디 하지 않았던 석진이 눈을 굴려 지민이 놓고 간 망고 주스를 쳐다보았다. 물기가 송글송글 맺히다 못해 흐르는 표면에 작은 포스트잇에는 선생님 톡 답장좀 해주세요! 하고 사람 이모티콘과 함께 개발새발 써 있었다. 박지민에게 더 할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그칠 행동들이 모조리 자길 좋아한다고밖에 느껴지질 않는데.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박지민은 내가 표현하겠다는데 왜그러냐는 늬앙스를 풍기며 석진에게 다가왔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석진은 두려웠다. 박지민은 자길 향한 수 많은 의문들과 시선들을 알고 있겠지. 알면서도 매일 찾아오는 것이고. 얼마 전에는 호석에게 지민이 작은 트러블로 반 아이와 싸웠다는 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넌 희생을 하고서도 항상 행복한 얼굴로 날 향해 다가올 수 있는거지. 도대체 어떻게.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돌린 석진의 스마트폰이 반짝 액정이 켜졌다.

/ 선생님!
/ 내일은 흰티 입구 올게요ㅜㅜ
/ 꼭 다 드세요(수줍)
/ (이모티콘)
오후 1:57











"그냥 차라리 단호하게 거절하는게 나을 것 같은데. 계속 두면 김선생님만 고달프잖아."

퇴근하는 길에 주차장에서 만난 윤기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항상 퇴근하기 전 차 앞에서 한대 피는 걸 좋아하는 윤기는 라이터가 없다며 미간을 찌푸렸다. 석진이 보다못해 복도에서 라이터로 장난치던 놈한테 뺏었던 것을 꺼내 불을 붙여주자 윤기가 의외라는 듯이 석진을 한번 흘겼다. 애들이 피같은 돈으로 담배도 사고 불도 샀을 텐데 우린 그거 뺏으면서 주차장에서 맘대로 담배피우네. 어른이 뭐라고, 참. 피식 웃으면서 희미하게 입술 사이로 담배연기가 피어올랐다. 석진의 코끝으로 윤기가 피우는 특유의 쾌쾌한 요거트향이 올라왔다.

윤기는 남들과는 다르게 박지민을 본다는 걸 안다. 석진이 지민에게 무심코 거절하지 못하듯 윤기는 지민을 대놓고 떨어트려놓지 못했다. 딱 봐도 상처 잘 받게 생겼다는게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 이유는 박지민이 웃고 있어도 진짜 웃는 게 아니라 한 번만 봐달라는 몸부림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박지민이 돌아오지 않을 대답에 지치지 않는 건 표정이 그렇게 다양하지 못해서기도 했다. 대부분을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그 방어적인 성향을 본다면 아마 이미 속에서는 많이 힘들어했을 걸 아니까. 그래서 선뜻 끼어든적도 없고 무조건대고 욕할 것도 아니었다.

"내일봐요."
"네."

윤기가 담배를 다 태울동안 한마디도 없던 석진이 먼저 빠져나가는 윤기의 차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시동을 걸었다. 마음에도 없는사람한테 대답도 안 하고 계속 받아주기만 하면 그것도 이기적인거야. 언젠가 윤기가 제게 술자리에서 해준 것이었다. 이 번으로 두번째였지만 석진은 쉽게 그러리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1년이 지난 지금 이 잘못된 일방 통행은 석진의 대답에도 쉽게 끊겨버릴 수 없다는 걸 잘 아니까.

석진의 차가 하교하는 놈들 사이로 천천히 빠져나갔다. 혼잡한 하교길을 지나면 큰 도로가 나올테지만 무리지어다니는 녀석들은 차가 오는지 마는지 상관없는지 죄다 앞을 막고 있었다. 늘 그러겠거니 하며 거북이 기어가듯 천천히 간다.

"드러운새끼야. 오늘 어디가냐? 빠구리뜨러가냐?"
"..."
"뭘봐 시발아."

차 앞에서 익숙한 뒷통수가 앞으로 숙여졌다. 뒷통수를 갈긴 놈이 낄낄 웃으며 박지민의 어깨를 밀치고 지들끼리 어깨를 툭툭 친다. 아무런 반응없이 천천히 걸어가던 놈이 이번에는 꽤 아픈지 손으로 맞은 곳을 덮었다. 야 아프냐? 아프냐고. 괜히 더 툭툭 때리면서 웃는다. 하복 사이로 보이는 팔뚝을 응시하던 석진이 클락션을 울렸다. 놈들은 뒤를 쳐다보더니 자리를 비켜주었고 석진이 빠르게 그들 사이로 지나쳐갔다. 자기도 모르게 돌아간 눈이 사이드미러로 향했다. 박지민이 처음보는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물며 석진의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지민은 차의 넘버와 종류를 안다. 그래서 김석진이 지나간다는 것도 알겠지. 석진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거절을 했다고 생각했다. 벌써부터 많은 것을 잃게 될 박지민에게 할 수 있는 신호였다. 솔직해지지 마라. 웃음거리가 될테니까.

그 이후로 박지민은 톡을 보내는 일도, 이유없이 교무실로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 석진도 지민을 찾을 이유도 없었다. 모두들 박지민이 장난을 쳤던거라고 확신했고 호석도 김선생님 다행이네요! 하며 해맑게 웃었다. 다만 윤기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박지민은 학교를 졸업했다. 호석은 좋은 학교를 갔다며 만족스러워했고 또 다른 아이들을 맞이했다.

- 사실 널 좋아하는 사람은 좀 불행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던 남자의 말대로 된 것 같아 석진은 이유없이 주먹을 쥐었다. 어쩌면 박지민에게서 어렸을 적 김석진을 보는 것 같아 쉽게 거절할 수 없었던 미안함과 여전히 사람들이 가진 시선들이 사람을 얼마나 망가트리는지 여실하게 보여주던 그 날의 광경들이 석진을 한동안 괴롭혔다. 상처받지 않았으면 했었잖아 사실은. 스스로 되물었다. 나와 같지 않은 사람이 됐으면 했다. 그게 잘못된 방법이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렇게까지 생각하며 합리화하려는 자신을 발견하고 괴로워했다. 병신. 이기적인 새끼. 똑같으면서 뭘 변명해. 위하는 척 했지만 지민에게는 누구보다 더 나쁠 사람일테다. 아마 평생을 미워한다고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석진은 비겁한 사람이 되었다.










[진지] 겁쟁이 6년










오늘은 치마입자 지민아. 성난 거시기를 세우며 침대 아래에서 기어오르는 돼지새끼를 바라보던 지민이 발바닥으로 그의 어깨를 쭉 밀었다. 오빠 나 여자 아니야. 오빠라고 부르면서 성별은 확실히 하자는 말에 장난으로만 치부한 놈이 실실 웃으며 말꼬리를 늘렸다. 앙탈부리면 못써요 우리 지민이이- 그 말에 토가 쏠리는 것을 웃음으로 무마한 지민이 그 치마를 받아들였다. 그래, 한달 생활비만 생각하자. 저새끼 돈 많잖아. 그치 지민아? 그냥 고기덩어리라고 생각하자. 자기최면을 걸며 어기적어기적 치마를 입었더니 치마 앞이 거시기 때문에 잔뜩 들춰졌다. 좆이 천조각에 쓸리는 느낌이 개같아서 인상을 찌푸리자 그 장면에 흥분한 놈이 지민을 뒤집었다. 이럴거면 여자를 사귀지 개새끼가. 나오는 욕을 눌러참고 한 번에 뚫고 들어오는 놈을 받아들였다. 이새끼는 그 동안 돈보고 스폰뜨러오는 새끼들이 많아서 상대방이 알아서 뒤를 풀고 오느라 풀어주는 것도 애무도 모르고 있는 게 뻔했다. 지민도 그들중의 한명이었지만 꽤 오래 진득하게 붙어있는 편이었다. 이전 남자는 거의 일주일도 안갔다고 들었는데. 꽤 오래 자기를 질려하지 않는다는 느낌에 이상한 쾌감이 들었다. 그래 어디서 날 이렇게 원하는 사람이 있겠냐.

관계 후에 찾아오는 기분은 썩 좋은 게 아니라 지민이 아무 말 없이 씻고 나오자 방금전까지 기분좋게 침대에 엎어져 지민에게 다음엔 어떤걸 할까 물어보던 놈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테이블에 수표 여러장과 일회용이었을게 뻔한 치마가 있었다. 병신이 가격표도 안떼고 입으라고 했네, 하며 가격을 무의식적으로 보는데 천쪼가리 하나 주제에 56만원이나 했다. 시발 그냥 천쪼가리가 아니라 치마님이시네. 금새 호칭을 바꾼 자신이 웃겨서 그냥 웃어버렸다. 되팔아야지.

"야 왜 계속 톡질이야 짜증나게."
[니새끼가 안보니까 그러지 시발. 어디 한 번 답장 제대로 해본 적 있냐?]
"톡 싫으니까 전화로 하라고 새끼야."
[섹스하면서 받잖아 시발!]

김태형의 우렁찬 고함에 전화에서 귀를 멀리한 지민이 기차화통을 삶아 처먹었냐는 말을 하며 체크아웃했다. 저번에는 받고싶어서 받은 게 아니라 그새끼가 시킨건데, 쯧. 딱봐도 할짓없어서 게임하다 또 처발리고 전화때렸겠지. 그럴 시간에 과제나 하라고 하면 더 안할 새끼인걸 알기에 무슨 용건이냐고 물으며 호텔을 나가는 지민의 손에는 치마님이 들려 있었다.

[나 이번에 개털됐다.]
"왜. 사모님이 또 너 싫대?"
[아니.]
"아님 뭐."
[나 남편한테 쥐어터졌다. 그새끼가 경호원까지 불러와서 우리집까지 조졌어.]

뭐? 병신새끼. 내 물건은? 지민이 다급하게 묻자 태형이 실실 쪼개면서 대답했다. 여기서 니 물건 내 물건 써있냐. 그 말에 안봐도 집안 꼬라지가 상상이 가서 한숨을 쉬며 눈을 가렸다. 컴퓨터는 제발 살아있길 바란다 친구야. 나 집가서 과제할거였단 말이야.

[친구여. 피씨방에서 하길 바라네.]

지민은 아예 집에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얼마나 집을 조져놨길래 김태형 목소리가 기어가냐. 한정판 리미티드 뭐시깽이 운동화를 샀다며 신주단지 모시던 김태형이 개털이 되었으니 조만간 그 운동화도 빠이빠이하겠다는 생각에 애도를 표했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괜히 죄없는 나도 피해입어서 과제도 피씨방에 처박혀서 해야된다니. 지민이 고급 호텔에서 순식간에 게임사운드가 즐비한 피씨방으로 변모한 풍경에 이질감을 느끼며 자리에 착석했다. 자리에 살짝 일어서서 본체를 켠 다음에 고급 의자에 몸을 눕히며 앓는 소리를 냈다. 존나 무거웠다. 어찌나 제 몸을 짓이기는지 장기가 다 터지는 줄 알았는데. 놈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이상한 자세란 자세는 다 시도했다. 꼴에 유연한건가 지민을 이상한 자세로 꺾어가며 박아대는데 한 탕 끝나면 온 몸이 땀범벅이었다. 관절이 좀 쑤시는 것 같기도 하고.

뻐근한 눈을 비비며 과제를 했다. 미리 해놔야 나중에 계획에 없는 일이 생겼을 때 낭패보지 않으니까. 계획에 없는 일이란 건 그 돈많은 새끼가 아버지한테 처맞아서 이유없이 자길 불러대는 날이다. 오래 붙어있으면 최대한 성미대로 끌려다녀야 질리지 않는 타입이었다. 빨리 끝내고 김태형의 줘터진 얼굴을 감상하러 가야하는데. 그러니까 상대를 좀 봐가면서 만나라는 조언도 해주고 잔뜩 놀려댈 생각에 피식 웃었다. 철저하게 비지니스 친구라고 서로 우겨대도 이럴때는 어디 안 빠지고 존나 친한척을 했는데, 나름 같은 분야에서 노는 새끼라 동질감이라고 해야하나. 지민도 적어도 몇 번은 얻어맞거나 죽을뻔한 고비를 넘겼기 때문이었다. 10시가 훌쩍 넘어 성인들만 가득한 공간이었지만 시끄러운 건 매한가지라 헤드셋을 끼고 노래를 틀었다. 귀가 심심하진 않았다.

/ 야.
/ 내일 수업 오후에 있음?
오후 11:02

/ 그럼 오늘
/ 밖에서 자고오셈
/ 치워놓음
오후 11:03

미안한줄은 아는지 평소에 안하던짓을 하고 앉아있다. 밖에서 자고오는 게 별 무리는 없겠지만 오늘은 좀 집에서 편하게 쉬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새벽 한 시 쯤에 과제를 마무리하고 피씨방에서 나왔을 땐 번화가라 술취한 놈들이 꽤 많았다.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걸어가는데 한손에 든 치마가 걸리적거려서 편의점에 들려 먹을거리를 사들고 오며 봉지에 처넣었다. 오랜만에 혼자 잠들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가끔 혼자있고 싶을 땐 있었지만 항상 만나는 사람과 함께거나 김태형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드물었으니까.

지민이 횡단보도에 섰다. 번화가는 밤에도 시끄러울 게 분명하니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려고 했다. 그리고 무심코 건너편을 봤다. 엄청 익숙한 얼굴이었다. 눈을 찌푸리고 실눈을 떠서 앞을 응시하는데 틀림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고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도 자신을 알아본 듯 했다. 순간 여러가지 생각들이 지민을 스쳐지나갔지만 자리를 피하지도 않았다. 이미 시간이 지나 다 잊어버렸을 법한 이야기들이 다시 머리를 비집고 나와있었다. 인생 최악의 날들을 함께 한 사람이 갑자기 등장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가 오히려 웃겼다. 내가 그렇게 원할때는 한 번 나오는 일이 없었는데 이제와서 왜 나한테 이래. 새벽이라 신호등도 켜져있지 않았지만 누구하나 건너오는 이가 없었다. 만약 다시 만난다면 까무러치며 자리를 피할것같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네. 지민이 성큼성큼 걸어가 8차선을 전부 건넜을 땐 그가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지민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선생님."
"..."
"저 기억 안나세요?"

지민이 웃으면서 석진의 얼굴을 쳐다봤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다고 벌써 지민은 이제 졸업을 준비하고 있다. 서로다른 시간을 살아오면서 김석진이 생가나지 않는다고하면 말이 안됐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좋아했던 사람인데 추억이라도 곱씹어야지 안그러면 고독사라도 할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돈많은 새끼 잡은거고. 계속 스폰 뛴거고. 지민이 석진의 대답을 기다리다 애써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너무 반가워서 그랬어요. 그냥 인사하려던거였는데.

거절당하는 기분은 누구보다 더 잘안다. 박지민은 그냥 싫으면 싫다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자신에게 더 나은 방법이라고 얼핏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석진은 모든 예상을 깨고 지민이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만든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기억에 오래 남았다. 괴롭히던 새끼들이 흥미를 잃어 알아서 떨어져나갈때도 석진이 그 날 지나쳤던 자신에게 해줄 수 있던 모든 대답을 대신한 것 같아 밤새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이제는 웃음거리로 치부해야 했다. 그런 적이 있었죠 선생님.

"낮이었으면 밥사달라고 조르는 거였는데. 아쉽네요. 전 이만가볼게요!"
"...지민아."
"와, 졸업하니까 이름 불러주시네."

좀 많이 지났죠 졸업한지? 지민이 실실 웃으며 석진을 지나쳤다. 추억은 추억으로 끝내야 깔끔한 거라고 생각하며 석진을 돌아보지 않았다. 끅끅, 울음을 참으며 눈을 감았다.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다. 안 본지가 몇년인데 아직까지도 좋아하는 건 아무도 모를 비밀이었다. 그렇게 두고 온 마음이었는데.

- 삼촌. 이 사진 누구야?
- 썸.
- 이렇게 몰래 찍어놓고 간직해둬? 개변태네 진짜.
- 야, 나름 좋아했다 새꺄.
- 했다고?
- 지금은 아냐.

와, 삼촌도 누굴 좋아할줄은 아는구나. 신기하게 쳐다보니까 애새끼는 빠지라며 휙 가져가버린 사진엔 김석진이 있었다. 삼촌은 죽었고, 난 그 한번 본 사진을 잊을 수가 없어서 학교에서 만났을 땐 놀라 뒤로 나자빠질 뻔 했다. 그리고 김석진을 좋아했다. 조금이라도 확률이 있다는 생각에 마냥 신나서 그렇게도 따라다녔는데. 병신. 왜 혼자 상처받을 짓만 골라서 해.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계속해서 걸었다. 어디로가는지도 모르고 계속. 아마 아침이 될 때까지 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질 짠 얼굴로 모텔방 들어가기도 쪽팔리고 이 날이 나한테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날인것도 짜증나고. 신경질스럽게 56만원짜리 치마를 패대기쳤다.











지갑이 생겼습니다 친구님. 돈이 더 많이 들었어요. 제 손목에 찬 비싼 시계를 흔들며 만족해하는 놈의 마빡에 주먹감자를 꽂아 넣었다. 너 그거 언제까지 갈 것 같냐? 지민이 한숨을 쉬며 물을 마시는데 김태형이 콧방귀를 뀌며 어이없어했다. 왜 갑자기 스폰 관둬놓고 청순한척이세요.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어이가없어서 째려봐주니까 이번에는 기고만장해서는 새로바꾼 최신형 폰을 딸랑거리며 자랑했다. 박지민이 얼마 전에 스폰을 전부 관둬버리고 평범한 대학생이 되었다. 모든 걸 청산할 목적은 아니었지만 할 맘이 생기지를 않았다. 그 돼지새끼는 멱따는 소리를 내며 매달리긴 했지만 병걸렸다고 구라치니까 문을 박차고 나가며 피검사를 하러 갔다. 지금쯤 구라인거 알고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겠지만 할 맘이 사라진걸 어떡해. 빌고 애원해도 안되는 건 안되는거였다.

수중에 있는 돈으로 두어달은 놀고 먹을 만 했지만 그렇게 미래에 대책이 없는 빡대가리는 아니었기에 알바자리를 구했다. 김태형은 평범코스프레한다고 지민을 기피했지만 밀당은 박지민에게 배우러왔다. 병신새끼. 한참 비웃어주며 자리에 누웠다. 이제 곧 있으면 대학도 졸업일텐데 존나 뭐하고 먹고살지. 이제야 또래에 맞는 생각을 하고 사는 것 같아 갑작스럽게 현타가 왔다. 에이 시팔. 우울해졌다면서 옷을 꿰어입은 지민이 현관문을 박차고 나왔다. 문 부셔진다면서 김태형이 고래고래 소리치는 소리가 복도까지 울렸다. 우렁찬 새끼. 보이지않을 가운데 손가락을 날려주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폰을 두고 와서 다시 다녀와야 했다. 날도 더운데 두 번 일하게 됐다.

/ 올 때 포카칩이랑 월드콘사와.
오후 2:24

니가 알아서 처먹지 꼭 내가 나갈때만 시켜먹어. 지민이 읽씹을 하며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시킨다고 사갈리가 없는데 왜 항상 지랄인지 몰라. 중얼거리면서 걸어가는데 요란한 복장인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정쌤? 지민이 소리내어 부르자 호석이 뒤를 돌았다. 박지민? 적어도 스승의날에 문자라도 날리던 사이였지만 한번도 만난적은 없었다. 교복입던 애새끼티를 벗은 지민을 한 번 스캔하더니 뿌듯하게 웃은 호석이 엄지를 치켜올렸다. 쫌 컸다고 어른인척 하는거 봐. 담배도 피냐? 크으, 물들었어 물들었어. 호들갑을 떨며 웃자 지민도 따라서 웃었다.

"어디가는길?"
"그냥, 뭐. 산책중이었어요."
"더운데 뭔 산책이야. 야 잠깐 기다려봐. 보고싶은 사람은 보고 가라."

윤기는 다른학교로 발령받아서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오랜만에 모인 사람들끼리 노는 중이었다. 회식이라도 했는지 얼굴이 어렴풋 기억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왔다. 지민이 막연하게 피어오르는 불안함에 눈을 굴렸다. 잠깐만. 그러면 이거.

"김선생님. 박지민 오랜만이지? 이 앞 지나가길래."
"아. 오랜만이네."

석진이 하나도 반갑지 않은 얼굴을 하며 지민을 응시했다. 선생님들이 하나둘 웃으며 짜식 김선생 그렇게 쫓아다니더니 이젠 서먹서먹해졌냐며 놀려대기 시작했다. 시발. 지민이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웃었다.

"옛날얘기죠 다."

보기도싫은 얼굴을 두 번째 마주보는 소감은 참 이상했다.

"전 이만 가볼게요. 일이 생겨서."

지민이 활짝 웃으면서 대답하자 다들 손을 흔들어주며 인사했다. 열아홉의 박지민이 이제 스물 다섯의 박지민이 되어 돌아오자 생각이 많아진 표정이었다. 많이 지났긴 했지. 여전히 과거가 남아있긴 하지만 현실에 비할 게 못됐다. 지민이 망쳐버린 기분을 끌고 어딜 갈 양반은 아니라 한숨을 쉬며 잘 보내지도 않던 톡을 날렸다. 김태형. 우리 이사할까?

/ 개같은소리하고있네.
/ 학교 앞이
/ 개꿀
/ (이모티콘)
오후 3:12

하. 알긴아는데 왜 요즘 자주 만나게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약올리는듯한 김태형의 이모티콘에 머리를 헝클이며 괴로워하고 있는데 클락션이 울렸다. 깜짝 놀라서 자리를 비켜섰는데 검게 썬팅된 차가 지나갈 기색도 없이 서 있었다. 지민이 얼굴을 갸우뚱거리자 보조석의 창이 내려갔다.

"타."
"..."
"할 말 있어."

되게 의외네요. 저한테 제의할 줄도 아시고.

"지민아."

에어컨 바람에 인상을 찌푸린 지민이 방향을 틀어놨다. 바깥만 계속 바라보며 그 할말이 뭔지 기다리고 있는데 석진은 말없이 운전만 했다. 두 번째 만났던 음식점 앞을 지나고 지민이 걸어왔던 길을 지나고 집을 지나서 큰 도로까지. 참다 못한 지민이 석진을 쳐다보자 그는 길가에 차를 세웠다. 마지못해 탄 것도 제 자신이 빡쳐 죽겠는데 그렇다고 말도 안하는 석진이 짜증나서 그냥 집에 가겠다고 말하려던 찰나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 날은..."
"뭐가요."
"생각이 짧았어."
"신경쓰지마세요. 뭐 제가 그때 잠시 미쳐서 그랬는데. 선생님도 남자잖아요. 제가 이상한거였는데."
"..."
"신경쓰지않으셔도 돼요. 이젠 정신차리고 여자친구도 있고..."

시발 왜 구라를 쳐야 하는거야. 거지같은 기분에 말끝을 흐렸다. 지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석진이 가만히 손을 들어올렸다. 흠칫 하고 놀라서 고개를 뒤로 빼도 끈질기게 손은 눈을 쓸었다. 고여있던 눈물이 손에 묻어나왔다. 아니 왜 이제와서 질질 짜는거야. 어? 제대로 신파극을 찍고 있는 지민이 입술에서 끅,끅 울음참는 소리를 냈다.

"그럼 그때. 나 잘 때."
"..."
"왜 키스했어요."
"..."
"시발, 내가 모르는 척이라도 해주길, 바랬던거야?"

꿈일까봐 일어나지도 않고 계속 있다가 눈을 떴을 땐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게 꿈이 아니란 걸 알게되고 혼자가 아닐거란 생각에 매일을 행복해했다. 드디어 대답을 해줬어. 분명 그건 받아주신거야. 틀림없어. 그렇게 계속 합리화하면서 포기도 모르고 매달렸다. 자길 불쌍하게 여기는 줄도 모르고! 지민이 시야를 가린 눈물을 다시 쏟아냈다. 덕분에 많은 걸 깨달았어요. 사람을 가지고 놀 수도 있겠구나. 이렇게 만들 수도 있구나. 지민이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래서 이제와서 뭘 어쩌시게요. 미안하다고 하고 혼자 그거면 됐다고 만족하시게요?

"그런거 아니야. 난 너를..."

겨우 인정하고 받아들인 감정들을 다른 사람들은 역겨워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걸 보고 스스로 받았을 상처에 덤덤해진 박지민이 무서웠다. 자기는 이렇게 모든 감정들을 숨기게 됐는데 정 반대인 박지민이 이젠 자기까지 이상하게 만들거라고 생각했다. 그걸 인정하게 됐을 땐 이미 그는 곁에 없었다. 이미 상처준 사람에게 다시 다가가서 용서를 빌어봤자 그게 면죄부가 될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석진은 지민을 다시 본 순간부터 그에게 빌고 다신 놓아주지 않을거란 생각을 했다. 그렇게 후회하고 아프게 할거였으면 처음부터 돌아가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을텐데. 이미 잔뜩 상처받은 표정으로 석진을 보고 있던 지민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난 선생님 이제 미워해요. 그리고 이미 존나 구를 대로 다 굴렀거든. 얼마전에 그만뒀으나 조금의 거짓말을 보탰다.

"선생님 있잖아요."
"..."
"기회는 두 번 다시 안 와요."

그러니까 이제 죄책감 가지지 마세요. 지민이 차를 빠져나갔다. 이제 완전히 끝이다. 깔끔하게 끝.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돌아섰다. 안녕히가세요. 어디에서 마주쳐도 모르는척 지나갈거라 다짐하면서 걸어가는데 자꾸 발이 엉켜서 자리에 우뚝 섰다가 가길 반복했다. 아무렇지 않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일만 남았는데 맘대로 끝내놓고서는 잔뜩 망가진 얼굴로 억울하다는 티를 냈다. 전화기에는 생각나면 연락하라는 새로운 새끼의 문자가 떠 있었다. 한 번 굴리면 멈출 수 없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다시 담글 줄은 몰랐네 태형아.

"오게 해."
"..."
"그렇게 만들거야."

치켜든 손에서는 전화를 걸었으면 말을 하라는 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결국 6년의 시간을 돌아서 온 김석진은 제가 가진 모든 법칙들을 깨고 들어왔다. 겁쟁이가 자기를 가둔 상자를 깨버렸다. 박지민이 그런 그를 받아줄까? 아마 6년을 더 거친다고 해도 불가항력이었다. 맞닿은 입술에 더운 숨이 불어들어왔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겁내서 미안해. 밀어내서 미안해. 지민이 울음소리를 내며 석진의 셔츠를 말아쥐었다. 용서 안해.

"안해도 돼."
"안해."
"응."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지민의 손에서 아직도 웅걸거리는 전화를 종료했다. 학생이었던 박지민은 이제 성숙한 차림으로 서 있었다.

"씨, 56만원 존나 아깝네."

그때 패대기친 치마는 어디서 걸레짝마냥 뒹굴테지. 앳된 얼굴로 욕을 중얼거리는 지민을 살짝 내려다 보던 석진이 엄지로 입술을 꾸욱 눌렀다. 물들었네. 물들었어. 호석과 똑같은 말을 했다.

"담배도 펴요. 자."
"응."
"...노력은 할게."
"응."

뒷주머니에 담배를 집어넣은 지민이 미묘하게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몸을 흐느적거렸다. 그러지마요. 내가 막 굴린건 맞는데 잘한 일 아니잖아. 칭얼거리니까 석진이 피식 웃었다.

"웃어요 지금? 이게 웃겨요?"
"이뻐서."
"그런거 안통해요. 내나이가 몇갠데."
"통하네."

지민이 붉어진 볼을 감췄다. 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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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Zipd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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