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감히 날 속여?"
"잘 할게요. 반항같은 거 관뒀어요. 자, 봐봐. 순순히 여기까지 찾아왔잖아."
"김태형!"

그래도 이렇게 데려오는 건 너무 무식하지 않아요? 살살 다뤄주지 얼굴 다 망가졌잖아. 어쨌든 다시 돌아왔으니까 그 버러지 같은 딴따라새끼는 버리라고. 응? 아버지. 태형이 다 터진 입을 하고 씨익 웃었다. 벌써 전정국이랑 놀아나고 있는 것 같으니까 조금 위해준답시고 충고한건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태형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짐승새끼를 키웠다는 표정이 아주 볼만했다. 그 짐승새끼를 키워 남자랑 놀아난걸 본 소감을 묻고 싶어서 입이 달싹였지만 최근 아버지가 혈압약을 끼고 산다는 소문을 어디에서 주워들은 게 있어 그냥 접었다. 익숙하게 사무실을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보고싶었어? 태형이 묻자 아버지가 부르르 떨며 태형을 죽일 기세로 쳐다봤다. 기어오르지마. 그 눈에 입꼬리를 올리며 히죽 웃었다.

당연히 그쪽 사모님이 아버지에게 고한 게 분명했지만 태형은 여유롭게 그들의 동태를 살필 뿐, 별다른 제스처를 하지 않았다. 그녀와 닮은구석이 많은 정호석이 그녀의 모든 것을 물려받고 이 자리에 앉는 그 순간을 기다린다. 꽤 경계심이 많은 녀석을 조금씩 무너져내리게 하는 쾌감이 태형의 발끝까지 차올랐다. 태형이 생각했던 것 만큼 정호석이 제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다. 정호석의 삶은 에이포용지 두어장이면 전부 알 수 있을만큼 단촐하고 쓸쓸하니까. 다만 원하는 건 김태형이 없으면 죽어버릴 것 같은 그 표정이 보고 싶었다.

고등학생일 뿐이었던 김태형은 아버지의 사업장을 제 집마냥 드나들며 벌써부터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느냐고 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그녀가 제이가 있는 그 골방에서 다리 벌린 돈으로 제 아들들에게 만원짜리 두어장을 던져주며 시켜먹으라면서 성내던 모습까지 전부 지켜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가 고등학교도 관둔 정호석과 얼마 뛰지못해서 병든 새마냥 픽 쓰러지는 정호인을 남겨두고 떠나버릴 때 까지, 전부. 정호석이 제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장사를 시작했을 때 부터, 희번득거리는 눈을 하고 그녀의 아들을 차지할 준비를 한다. 돈? 그딴 건 그 나중의 일이지. 태형은 아버지를 두고 옷을 꿰어 입었다.

"김사장님?"
"오늘은 이만 돌아가. 딴 데로 세지 말고 곧장 가서 기다리고 있어."
"알겠어요."
"나쁜놈."

원래 아버지를 닮아 하고싶은 건 죽어도 하는 성미 때문인지 서로를 존중하지만 동시에 무서워했다. 특히 아버지는 삼백안을 희번득이며 먹이를 찾는 것 같은 태형의 행동을 제일 소름끼쳐했다. 하지만 자신의 뒤를 이을 물건으로는 제격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어린 나이에 통찰력이 있어 지금 당장 구역하나를 통째로 김태형 손바닥 안에 떨어트려놔도 그것보다 배로 크게 만들 놈이었다. 그러나 제멋대로 구역하나에 눌러 앉더니 남창과 붙어먹는다는 소리를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게 할 줄은. 김사장은 태형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김태형이 제 치부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이유는 아마 그 남창에게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는 이유인가. 그는 천천히 생각하며 펜을 굴렸다. 아무래도 그놈을 봐야겠어.

- 무슨일이야?
"정호석 찾고 있는 거 알아."
- 그래서.
"지금 정호석 김남준 소유 별장에 있어. 사모님모르게 사들인거니까 어디있는 건지는 알아서 알아내고."
- ...
"괜히 민윤기 쑤시지말라고 친절하게 알려주잖아?"
- 누구편이야?
"당연히 내편이지."

그러니까 아버지한테 꼬리치면서 간보지 말란 말고 너 좋다는 전정국한테 붙으란 말이야 암캐같은년아. 태형의 낮은 음성에 상대방이 대답을 못하다 낮게 웃었다. 이거 경고라고 해석해야되나? 예상과는 다른 대답에 태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년이다.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모두의 머리위에 있는 것 처럼 구는 박지민은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제 것 부터 챙기고 먼발치로 떨어져서 구경중인 게 많았다. 그러니까 그렇게 미련없이 구는거겠지.

- 잘 세겨들을게.
"세겨들었으면 내가 먼저 경고했을 때 들어쳐먹었겠지. 스폰 믿고 깝치는 년들은 꼭 너처럼 우위에 있는 척 하더라."
- 정말 위에 있을지도 모르지. 용건 끝났어?

태형이 일방적으로 통화를 끝냈다. 괜히 감정적이 될까봐 최대한 자제했지만 박지민에게 향한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첫만남때부터 좋지 않았던 박지민이 전정국이 아니라 아버지의 침실에서 나오는 광경만 보지 않았더라면 상관없는 인물이었다. 아예 인연에 없을 건 아니겠지만 태형은 시종일관 같은 표정으로 있다가도 지민의 이야기만 언급되어도 급격하게 입이 굳었다. 악몽같은 년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다.





23

"오늘은 김남준이 아니네."
"왜? 난 안돼?"
"..."

그닥 내키지 않은 상대가 호석의 앞에 섰다. 지민은 활짝 웃고 있었지만 호석의 눈에는 잔뜩 화가 난 것 처럼 보였다. 억지 웃음인 것 쯤은 여럿 보고 자랐으니까 본능적으로 알게 된 건 둘째 치고 박지민은 처음 보는 남자를 데리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반대로 호석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늘 옆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창촌이 아닌 지금은 그 옆자리의 존재가 느껴지기까지 했다. 김남준과 김석진이 교대로 가끔 호석의 무료함을 달래주러 왔던 것 같은데, 박지민이 올 줄이야. 호석이 피식 웃었다.

지난 밤, 김석진은 무표정으로 노트북을 두드리며 호석에게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건지 결정하셔야 합니다. 그러서야 맞게 대처를 하니까요. 아마 지금이 그 결정인 것 같은데, 결정보다는 강요가 더 앞선 것 같은 상황이다. 호석이 지민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 딴따라라서 너희들이랑 상관없다고? 그럴리가. 지민은 호석에게 전면적으로 개입을 선언한 것과 같았다. 지민의 옆에 있던 남자가 호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남자는 내 누구일까 잠시 생각하다가 접어버렸다. 그게 누구든 이제 제가 결정한 것에 아군과 적군이 갈린다. 벌써 정해진 것 같지만.

"도련님을 사모님이 많이 찾고계셔."
"...알아."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같이가자."

순간 지민의 얼굴이 굳는 게 보였다. 무슨 의도인지는 몰라도 지민에게 호석이 꽤 영양가 있는 존재가 맞다는 확신을 줬다. 호석은 순순히 지민과 함께 차를 타며 제가 지냈던 별장을 한 번 쳐다봤다. 저 멀리서 익숙한 차가 별장으로 진입하는 게 보였다. 김남준의 또다른 차였다. 조금만 빨랐으면 전면전을 볼 수 있는 거였는데. 호석이 멍청하게 웃으며 팔뚝으로 눈을 가렸다. 병신처럼 이런 결정을 내린 자신이 그들과 서서히 같아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시원하지는 않았다. 어짜피 다가올 날이 조금 일찍 온 것일 뿐, 김석진은 이미 제게 선택권을 준 이상 그 책임도 호석에게 있음을 상기시켜주고 떠났다.

그녀에게 보여준다. 자기가 저지른 일들과 그에 맞는 죗값을. 호석은 운전하는 남자의 곧고 굵은 뒷목을 한 번,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박지민의 동그란 뒷통수를 쳐다봤다. 뭘 그렇게 보고 있나 했더니 첫눈이었다. 그렇게 참고 있던 울분을 토해내듯 쌓일 것 처럼 펑펑 잘도 내렸다. 벌써 몇 십 번째의 겨울이 지나갔지만 남자들에게 다리를 벌리고 지쳐 쓰러져 잠들었다 일어나면 보였을 그 첫눈의 자취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던 것은 오랜만이었다. 입김을 불어 창에 뽀드득 검지를 가져다대자 앞에 있던 남자가 피식 웃는 소리를 냈다.

"도련님. 일어나."

호석이 눈을 떴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던 거리가 벌써 해가 진 지가 오래다. 지금 상황에 잠이 오냐는 듯한 눈이 차에서 내리는 사이드 미러에 비친 호석의 얼굴을 쫓았다. 지민이 호석과 저택으로 가다 말고 뒤를 돌아 정국의 뒷목을 잡아당겼다. 내일 봐. 짧은 키스였지만 남자는 타오를 듯한 눈으로 지민을 내려다보다 이내 차를 몰고 사라졌다. 몸이 무겁다.

"스폰이 많네."
"인사정도였는데 뭘. 알잖아?"
"..."

호석이 피식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제게는 생소했다. 손님을 받을 때도, 김태형에게도 잘 내어주지 않는 입술을 툭 치며 지나가는 지민의 뒷모습이 경쾌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 거구나. 입술을 마주대면 절망적일 것 같아서. 내 세계를 모조리 잊을까봐 불안한 그 느낌이 싫어서 거부했었던 자신이 제 처지에 가당치도 않았던 거였다.




24

의자에 앉은 그가 액자를 손에 쥐었다. 앳된 얼굴이 죽은 동생과 전혀 닮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의 얼굴을 보다 테이블 위에 조심히 내려놓는다. 정호석이 별장에서 사라지고 주인이 가져갔을 줄 알았던 짐들이 남준의 손으로 들어왔다. 무슨 의미일까. 꽤 의미있는 물건을 남기고 간 호석은 무슨 생각으로 남기고 갔을까. 이미 저택으로 돌아가길 선택한 남자였다. 앞으로 저택에서의 행동으로 적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었다.

"그 여자 아들이랑 무슨 사이야?"
"무슨 소리야 그건."
"형이랑 있었다고 했다던데."

남준이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그렇게 대놓고 말할 줄은 모르고 있었는데. 김석진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아래에 있는 남자다. 그를 믿지 않을 줄 알았는데 용케도 그를 지키고 남준을 내세웠다. 머리도 좋아. 그녀가 남준을 어찌 할 수가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녀는 남준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던 여자였다. 당당하게 여러 여자들을 거느리며 살았던 아버지가 죽으니까 제 세상인듯 떠들어대는게 역겨울 뿐. 어머니가 배신감에 한참을 괴로워해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아버지였다. 영원히 연결고리가 없는 둘 사이가 죽은 아버지로 인해 골치아프게 엮여있었고, 그걸 마무리 지을 사람은 자기도 아닌 정호석이었다.

정국이 나른하게 앉아있다 다리를 꼰 자세를 바로했다. 남준은 그가 적지않게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부러 얼굴을 더 굳혔다. 별장을 찾을 수 있는 건 전정국이거나 그 여자가 전부엿겠지만 다른 사람일거라는 생각이들었다. 겉보기와 다르게 꽤 정호석을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이 많아서.

"붙어다니지마. 또 뺏길라."
"박지민이랑 같이 다니더니 겁이 없어졌어?"
"벌써 그여자 비서랑도 했을지도 모르지. 그 사람. 남자손님만 받았다던데."
"걱정해주는거냐, 시비거는거냐."
"나름 걱정인데."

네 자리로 돌아가. 남준이 경고하듯 말했다. 애초부터 빼앗길 것도 없는데 자꾸 조바심을 내는 자신을 혹시라도 누가 눈치챌까봐. 손에 들려있는 이 액자를 내 손으로 박살낼 수도 있는데 맘 처럼 되지를 않는다. 가장 약한 자리에 앉아있으면서도 강한 사람. 그가 자신을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조만간 다시 봐."
"..."
"아버지가 형 보고싶어하셔."

이제 김회장이 아니라 전회장이라고 벌써 서열정리에 들어가는 걸 보아하니 제 자리에 여간 불안한게 아닌가보네. 남준은 정국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소파에 몸을 깊게 기댔다. 뽀드득 소리를 내며 주인을 맞이하는 가죽이 몸을 휘감는다. 잘 지키고 있어. 언제 빼앗겨도 이상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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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어아 오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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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Zipd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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