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언제까지 누워있을건데."

이불을 훅 걷어버린 남자는 호석의 말라서 얇은 손목을 보고 한숨 쉬더니 그대로 다시 이불을 덮어버렸다. 그냥 질릴 때까지 있어라. 단칼에 내치려다 포기해버린다. 호석은 눈을 굴려 남자의 작은 오피스텔을 둘러봤다. 구역 하나 맡고 있는 주제에 꽤 사람답게는 살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김태형은 자기 치장하는데에 목숨걸었다고 할 정도로 제가 다른 사람과 같은 걸 입거나 거는 걸 싫어했으니까. 남자는 시도때도 없이 귀찮다, 하는 버릇은 있어도 집안은 꽤 깔끔하게 해 두고 사는 것 처럼 보였다. 호석은 아직도 쓰라린 목을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사실 제 심술 때문에 목이 졸리기까지 했지만 딱히 그 자리에서 도움받고 싶지도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잠들어버릴 수 있다는 무지의 두려움으로 호석의 전신을 옭아매는 그 느낌 때문에 잠시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게 호석에게는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남자는 벽에 기대어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미 벽지에 찌든 담배냄새 때문인지 이미 후각이 익숙해져 담배향이 역겹지 않았다. 한 번도 맡지 못한 담배향이 조금 생소했다.

그는 호석이 숨을 크게 들이쉬며 창 밖으로 시선을 옮기는것을 그윽하게 내려다봤다. 그 시선을 의식한 호석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니 두 눈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왜 살려줬어요. 호석이 묻자 남자가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대답했다. 거기서 얼마 전에 여자 하나 죽었다고 벌써 소문 자자한데 너까지 죽어서 더 난리를 치자고? 최근에 제 방에서 목을 매고 죽었던 빨간 드레스년의 이야기였다. 그래, 죽어서 그냥 소문만 무성하게 남기고 사라질 만큼 고작 그런 존재였다는 것을 호석은 외면하고 있었다.

"이름이 뭐에요?"
"너도 가명으로 활동하는 주제에 말이 많네."

거기까지만 해라, 라는 늬앙스였지만 그런 거 신경쓴적 없다. 호석이 찬 대리석 바닥에 발을 내렸다. 그의 발짓에 따라 남자의 눈도 쫓아왔다. 김태형이 어디갔냐고 물었지?다시 돌아가려고 일어서는 호석의 정수리로 남자의 음성이 내려왔다. 그걸 알던 모르던 남자는 호석에게 알려줄 의무따위는 없었다. 그래도 불쌍하게는 여겼는지 남자는 명함 하나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 이제 많이 놀았으니까 꺼져. 돈 벌고싶어하잖아 많이. 쫓겨내듯 남자는 천천히 호석에게 다가왔다.

많이 벌고싶어했으면 이렇게 여유로워하지도 않았겠지. 호석이 웃으면서 그가 준 명함 하나를 내려다봤다. 민윤기. 그쪽 이름이에요? 하며 묻자 남자는 그 뒤를 살펴보라는 듯 눈짓했다. 김태형, 그리고 주소가 무심하게 갈겨진 메모였다. 딱 봐도 이름있는 오피스텔이라 호석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살아는 있다는 말이네. 그러고는 명함이 소중한 뭐라도 된다는 듯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찾아가보던지."
"됐어요. 뒤졌다길래 정말 그런건가 궁금했으니까."

그 말을 못 믿는 눈치다. 남자는 호석에게 선심쓰듯 제 이름과 태형의 생사를 함께 알려주었다. 호석은 창촌으로 돌아가며 남모르게 성취감이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느릿하게 언덕을 올라가면서 어제 그 소동의 장본인이 정호석이라는 것을 여실하게 느끼게해주는 그들의 뜨거운 눈총을 받으며 호석은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잡고 앉아 나른하게 하품했다. 그걸 보며 앞잡이 년이 기함을 했지만 뭐 어쩌라고. 뒤질뻔 한 건 뒤질 뻔 한거고 살아돌아왔으면 됐잖아. 그의 말에 멍이 다 가신 년이 조용하게 지나가며 호석에게 단단히 미친년이라고 넌더리를 쳤다.





17

"나 좀 쉬면 안될까? 도통 사모님 얼굴보기도 힘들고 심심하단말이야, 응?"
"...한 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건강 또 안좋아지신거야? 걱정되네."

걱정되네. 하며 슬며시 웃는 낯짝이 정말 역겹다고 생각하며 아랫입술을 보이지 않게 깨문다. 새로운 먹잇감인 정호석을 타깃으로 잡은 박지민은 한 치의 거리낌도 없었다. 쉰다는 뜻은 아예 호석의 옆에서 흠뻑 즐기겠다는 말이다. 석진은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 지민의 발 끝을 보다가 참기 힘들다는 듯 시선을 돌려 허공을 바라봤다. 그녀가 주치의를 보는 시간에는 석진조차도 그녀의 침실로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지민도 당연히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와서 시비를 거는 것이겠지.

그녀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병약한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 저택에서 가장 가까운 석진까지도 그녀는 말 없이 눈빛으로 그를 밀어낸다. 당연히 박지민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최근 주치의가 들리는 빈도가 늘었으니 그녀의 상태도 얼추 짐작이 되는 듯 지민이 나른한 표정으로 석진의 앞에 서서 비킬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아 맞아, 저번에 도련님이랑 김태형이 왔다던데 김태형은 벌써 알고있던 거야? 용의주도한 새끼인건 알았는데 나보다 먼저 앞서 있을 줄은 몰랐네. 석진이 방을 빠져나오는 주치의에게 짧게 목례하며 지민을 응시했다. 계속 여기에 있으실겁니까? 하며 묻자 지민이 해맑게 웃었다. 아니, 그냥 잠깐 들린것 뿐이야. 사모님 얼굴도 못보고 그냥 간다고 전해줘. 빤히 보이는 거짓말에 석진은 그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박지민씨가 왔다가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
"오후에는 일정이 없습니다."

그녀는 보기에도 힘들다는듯 축 쳐진 얼굴빛을 한 채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못한다는듯 앉아있는 그녀가 안쓰러워서라도 석진은 자리를 비켜줘야 겠다는 생각으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석진이 뒤를 돌아 침실을 나가려 하자 그녀는 작게 석진을 불렀다. 김비서. 그녀의 목소리가 안들릴리가 없다.

"하루라도 빨리, 내게로 데려와."

석진은 그녀가 무슨 생각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석진이 입사 4년만에 본사 제 2비서팀에서 좆같은 상사를 만나 좌천되어 그나마 선처해 준답시고 그녀의 전속 비서가 되던 날이었다. 쇼윈도우에 진열된 마네킹처럼 입가에 내려앉은 작은 주름까지 전부 고고한 빛을 띄며 앉아있던 그녀였다. 그녀의 남편 김회장이 병으로 죽을 지도 모른다는 소식과 본 처를 두고 그녀에게 자신의 전부를 준다는 소식에 얼마나 슬프게 웃던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석진이 울컥할 지경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호석과 호인에게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돌아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어졌는지 전부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싶었다.

그녀가 소유한 것을 탐내고 꼬여든 박지민같은 영악한 날파리도 내치지 못하고 약해져간 그녀를 아무도 동정해주지 않으니 날이 갈 수록 외롭게 꺼져가는 불빛처럼 제 아들을 부르짖는다. 호석이 사는 그 곳, 그 자리에서 그녀도 호석처럼 태어나 자랐다. 어디에서 천운이 따라 대기업 회장의 정부보다 더한 사랑을 받던 첩자리까지 하게 되었는지 석진은 모른다. 하지만 호석이 분명 그녀를 따라 이 집에서 썩은 마네킹이 될 것이다. 심장이 약해 죽은 동생 보다 더 한 고통으로 정상적으로 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죽지도 못타는 안타까운 삶. 그를 구원하는 방법이 있을까.

석진은 눈썹을 찌푸리며 저택을 나섰다. 법무팀에 가서 김남준을 만나야 할 일이 생겼다. 그를 살릴 수 있는 일, 그것은 주위에 같은 생각뿐인 사람들을 아군으로 돌리는 일 밖에는 없었다.





18.


"모시러 왔습니다."
"..."

호석이 멍청하게 서서 그를 올려다봤다. 그를 보니 뒤에 주차되어있는 차에는 김남준이 운전대를 붙잡으며 호석을 응시하고 있었다. 둘이 눈이라도 맞은거야? 호석이 묻자 석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거 아닙니다. 그럼 동업자라는건가? 호석이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제 등뒤에 있는 창촌 초입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제 말로 하기도 귀찮다는 듯 꽤 성가신 얼굴이었다. 석진이 무슨 뜻이냐고 되묻자 호석이 얼굴을 찌푸렸다.

"사람말을 여러 번 했으면 알아들어야지."
"..."
"돌아가."
"사모님은 찾아내실겁니다."

그녀는 반드시 호석을 찾아내서 손 발이 성하던 아니던 온전하게 제 자리에 앉기만 한다면 상관이 없었다. 호석이 눈을 찌푸리자 석진은 그를 기다렸다. 언제라도 상관없지만 그녀가 눈치채기 전에 호석을 빼돌려야 했다. 회사의 지분 상당수와 함께 그가 다른 하이에나들에게 찢겨나가게 둘 수 없었다. 특히 박지민에게만큼은.

"들어가."

석진이 눈썹을 찌푸리며 호석의 뒤를 응시했다. 익숙한 목소리더라니 김태형의 빈자리를 채운 남자였다. 그는 꽤 기분이 더럽다는 듯 두어 걸음 다가와 어서 호석에게 자리로 돌아가라는 듯 해보였다. 외부 사람과 접촉이 잦으면 의심받기 마련이라 호석은 꽤 성가시다는 듯 자리에서 물러섰다. 저희한테 이 정도 규모는 한순간에 없애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만 들릴만큼의 목소리라 호석만 놀라 석진을 바라봤다. 미련따위는 애초부터 없었지만 자신의 인생 전부가 이 곳에서 시작되고 끝을 맺었기 때문일까. 괜히 미련이 그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선택해야 했다. 호석은 건조하게 서 있는 윤기의 흰 얼굴을 한 번 돌아봤다. 일방적인 소유로만 보는 눈이 호석을 훑어봤다. 들어가란 소리 한 것 같은데. 그가 한 번 더 제이를 불러세웠다. 어쩌라는거야. 그의 말에 호석이 석진을 다시 돌아봤다.

"김남준이 여기있는 이유는 뭐야."
"그런 건 모르셔도 됩니다."
"...나중에 내가 연락할테니까,"
"내일."
"..."
"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꽤나 신사적이라는 듯 돌아선 석진이 남준과 함께 찬 먼지만 남기고 돌아갔다. 남준의 성미 같았으면 운전석에서 뛰쳐나와 한껏 쏘아붙였을 게 뻔한 상황에서 그는 잠자코 하는 짓을 지켜볼 뿐 병신처럼 자리만 지켰다. 그런건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언제라도 강제로 끌어올 수 있는 그를 설득 하는 것 처럼 조롱하는 꼴을 이제 더 이상 볼 수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김석진은 정호석을 몸 뿐만이 아니라 창촌에서의 미련을 전부 버리고 제 발로 걸어들어오길 바라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 보다 계산적이고 영악한 남자라는 생각과 함께 호석의 손목이 끌어당겨졌다.

"내 말 못들었어?"

윤기가 호석의 팔목을 으스러트리겠다는 듯 힘있게 쥐어왔다. 아파요. 호석이 눈을 찌푸리자 그제서야 손목을 놓았다. 그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창촌 초입을 뒤따라가면서 계속해서 떠오르는 물음에 입술을 깨물고 제 자리를 찾아갔다.

네 말이 맞아. 돈이면 못할 거 없어. 김태형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비웃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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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Zipd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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