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빨간 드레스년은 항상 형제를 쫓았다. 호석이 호인의 손을 잡고 학교에 다녀오면 그녀는 버선발로 나와 둘을 맞이했다. 그 때가 유일하게 제가 세상에 있는 이유가 되었다. 그녀를 사랑했던 적도 있었다. 이성적으로가 아닌 그녀의 존재를. 하지만 호석은 그녀가 손님을 받을 때면 세상이 하나하나 깨지는 것 같았다. 단칸방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라도 뭘 하든 소리가 다 들렸으니까. 나도 저렇게 될거라는 불안감이었을까, 아니면 살아있음을 반겨주는 유일한 존재가 고작 돈 몇 푼에 웃음과 몸을 팔았기 때문이었나. 엄마라고 부르던 여자가 형제를 떠나갔을 때도, 엉엉 울다 숨을 헐떡이는 호인과 분노에 떠는 호석을 옆에서 끝까지 지켰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호석이 같은 공간에서 나란히 손님을 받기 시작했을 때 부터 그녀는 동생과는 달리 호석을 전처럼 대해주지 않았다. 그냥 남창 그 뿐이었다. 그가 번 돈 몇 푼으로 호인의 약 값과 병실 비용을 겨우 내서 하루 세끼 챙겨먹지 못해 물만 마시고 있을 때면 조금 불쌍하게도 봐주는 것 같았지만 그가 부러 이 곳에서 나가서 살았으면 싶어서 자꾸 밀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석은 한번이라도 그녀가 입을 열었으면 싶었다. 정호인과 정호석이 닮지 않은 이유를. 그녀는 이미 말하지 못하게 되어버렸지만 죽기 전이라도 직접 듣고싶었다.

호석이 방문을 열었다. 지옥같은 저택이 호석을 씹어버릴 듯 통로를 보였다. 중간에는 넓은 거실이 하나 있고, 반대편 복도 끝에는 그녀의 방이 있다. 느릿하게 거닐며 조용한 그 기분을 느꼈다. 밤낮으로 귓가를 울리는 신음소리와 웃는 소리는 언제 있었냐는 듯이 호석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가 됐든 호석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여지가 있는 남자일테니까.

"일어나셨습니까."
"어."

얼떨결에 대답한 호석이 터벅터벅 그에게로 걸어갔다.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지만 호석의 눈에는 그가 전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처음 생각했다. 어떤 행동, 무슨 생각을 하든 뭐든 받아줄 것 처럼 하면서 뒤에서는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지 모르지. 호석이 소리없이 걸어와 석진의 앞에 앉았다. 그는 거실에 있는 책장을 정리하다 호석의 앞에 서류더미에 시선을 던졌다. 아마 그녀가 잠들고 있을 때 전부 정리해두려는 의도였지만 딱 봐도 오늘 안에 끝내기에는 힘겨워보인다. 석진이 서류를 대충 모아 다른 곳으로 가져가려 허리를 굽혔다. 아마 2층 끝자락에 그의 방이 있다고 했던 것도 같았다. 괜히 방해했나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석진이 그것을 막았다. 그러니까 더 방해하고 싶잖아.

"그립지 않아?"
"..."
"내 몸."

석진은 말이 없었다.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지 아닌지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손이 점점 느려졌다. 한쪽 방에서는 죽어있는 것 처럼 잠든 그녀를 두고 할 말은 아니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자기는 아무도 몰래 뒤에서 김남준이랑 손잡았으면서 이런 대화는 양심에 찔려? 호석이 상체를 뒤로 젖히며 웃었다. 그런거 아닙니다. 석진이 다시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하자 호석이 눈을 치켜올리며 그를 응시했다. 파트너정도는 되어줄 수 있는데. 밤마다 그쪽 방으로 넘어가면 되는거지?

"그러지말고 내 집으로 넘어오지 그래?"
"..."

언제부터 뒤에 있었는지 남준이 호석에게 물었다. 무슨 조합이야? 호석이 묻자 그가 질문을 듣지 않아도 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호석은 법무팀 팀장인 이상 회사 소속이라는 남준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얼굴에 철판을 깔았군. 그렇게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이복동생과 몸을 섞는다는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희번득거리는 눈을 볼 때면 없던 공포심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두려움에 망설이는 순간 입안에서 씹어먹힌다. 호석이 이 곳에서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지만 피하지 않은 이상 그 중심에서 그를 도와줄 사람은 없다. 조용히 눈을 내리 깐 석진의 속눈썹을 보다 삐딱하게 선 김남준의 목덜미를 한 번 눈으로 쓸었다.

"내가 버티면 너흰 날 위해 뭘 해줄 수 있는데?"

석진과 남준의 반응은 달랐다. 눈쌀을 찌푸리며 호석을 응시하는 남자 하나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호석에게 다가오는 남자 하나는 비서와 이복동생이 아닌 김석진과 김남준 그 자체로의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26

"오랜만이야."

부러 고개를 돌리고 있던 윤기의 앞에 나선 태형이 목소리를 냈다. 껄끄러운 게 얼굴에 티가 난다. 다만 다 죽어가는 새끼 살려준 사람한테 고작 그런 눈빛을 해온다는 게 가당치도 않지. 태형이 웃으면서 윤기가 앉은 테이블에 굴러다니는 플라스틱 의자를 하나 직직 끌고 와서 똑같은 폼으로 앉았다. 윤기의 뒤로 여러 년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쪼그려 앉아 태형을 올려다보고 있다는 게 딱히 좋은 기분은 아니라 큰 숨을 내쉬며 눈을 돌렸다. 아버지 때문에 개패듯 맞고 끌려나간 지 며칠이나 됐다고 말끔한 표정으로 더 당당하게 들어오다니. 어디가서 뒤져버린게 아니냐고 수근댈게 뻔한 년들은 안봐도 비디오였다.

"다 죽어가는 거 살려줬더니 내가 모르는 사이에 좆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었네?"
"..."
"니가 그러니까 아직 여길 못벗어나는거야."

윤기가 맹수의 눈을 하고 태형을 응시했다. 눈하나 깜짝 하지 않은 태형이 눈을 날카롭게 뜨며 입은 반대로 미소짓는다. 수금한 돈 들고 튄 년을 보고하지 않은 이유가 나름 존재할 텐데 그런 건 알고싶지도 않았다. 태형에게 두들겨맞은 것도 하루이틀이 아닐 텐데 또 도망치려다가 잡혀 다른 곳으로 끌려갔다. 이 정도면 버릇이라고 생각하니까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곳으로 아예 보내버렸으니 앞으로 눈앞에서 알짱대는 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몇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 마냥 조소하며 나른하게 찌뿌둥한 어깨를 돌렸다.

윤기는 그런 건 하나 상관이 없다는 듯이 태형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고싶지 않아도 좆같은 인연으로 엮인 사이라서 그런지 의사표현이 확실했다. 김태형이 정호석에게 고아라고 거짓말 한 것 처럼 민윤기도 결국 거짓으로 여기 있을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여기서 나 대신 이 년들 돈 가져오라고 시켰나봐?"
"..."
"이야, 내 자리도 위태롭게 됐네 이제."
"...그래."

민윤기가 가던 길을 멈춰 태형을 돌아봤다. 우리엄마가 너희아빠한테 했던 것 처럼 나도 가만히 있으면 뭐라도 떨어지겠지. 생각과는 다르게 태형의 앞에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작 조금의 자존심 때문에 눈 앞의 어린 호랑이새끼한테 지기 싫어서 말을 아꼈다.

태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으로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을 텐데 눈 앞의 민윤기가 거슬려서 흠뻑 즐길 수가 없었다. 누구든 내 것에 발이라도 담그면 죽여버릴거야. 태형의 눈이 그렇게 말했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아도 민윤기는 알고 있었다. 김태형이 유일하게 싸고 돌았던 남창의 대한 존재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가 민윤기의 유일한 탈출도구 정도의 사내라는 것도.

"사람이 매력이 너무 강하면 골치아파 그치?"






27

그녀가 건내준 옷은 사람의 기분을 절로 좆같이 만들어줬다. 사람을 괜히 긴장하게 만들고 초라해지게 했으며, 무엇보다 갑갑해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넥타이를 벗어서 집어던지려다가 뒤에서 도련님. 하고 부르는 석진의 목소리에 멈춰선 호석이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한 목소리와 얼굴에서 분노가 일었다. 그렇게 싫다고 목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말 한 게 누군데 결국 그들의 방식에 억지로 끼워맞추고 있었다. 그들은 날 그렇게 부르겠지. 창촌 출신의 행운의 남자.

그녀가 차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저택에서 나가 만나고싶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의미했다. 지금 누구한테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자각도 못하고 있을 그녀에게 욕이라도 하고 따져물고 싶었지만 석진이 건네주는 시계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 하는 짓이 딱 어린애 같아서 김남준이라도 이 모습을 본다면 비웃을 게 뻔해서. 아니, 지금 눈앞의 김석진이 속으로 비웃고 있을지도.

"가시죠."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줄 수 있다고 했지?"

과연 나도 모르는 걸 당신이 줄 수 있을까. 호석이 대답이 없는 석진을 지나쳐 방을 나섰다. 다른 수행원의 뒤를 쫓아가며 저택을 나서자 입구앞에 대기하고 있던 차가 열렸다. 안 쪽에는 그녀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고 호석을 반겨주는 이는 없었다. 평생을 이렇게 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득해졌지만 그녀를 향해 빌었다. 불행해주세요, 제발.

호석이 차에 올라타자 석진이 보조석에 올랐다. 그것을 보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호석의 옷을 찬찬히 훑다 텅 비어있는 손목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뭐든 원하는 대로 해줄 것 처럼 굴면서 간혹 이런 식으로 표출하는 분노는 그녀가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들 중 하나였다. 앞으로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겪을 일들이 그에게 어떻게 다가올 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를 죽이려고들어도 이상하지 않겠지. 기억도 가물한 호석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를 닮아 날렵한 콧대를 눈으로 쓸어본다. 유일하게 사랑하던 사람을 닮아있는 호석은 마치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최미진도 죽었어요."
"...알고있어."
"앞으로 누가 죽을것 같아요?"

아무렇지 않게 묻는 호석의 눈이 절망을 담았다. 정호인에서부터 빨간 드레스년까지. 끝이라고 생각한 적 단 한번도 하고 산적 없다. 앞좌석의 김석진이 미동없이 뒷목을 보이고 앉아있는 것을 계속 응시하던 호석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답을 바라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이미 꼬인 관계를 되돌리고 싶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을 아낀다. 불필요한 감정소모의 시작을 알렸다.

"아무도 죽지 않아."

죽는 것 보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있겠지.











댓글 잘읽고 있어요ㅜㅜ 댓글을 너무늦게봤어요 답글을 늦은시간에 달아서 혹시 잠에 깨실까봐 못달고있는 소심한 잡덕은 물러가겠습니당ㅜㅠ 소심해터졌지만 댓글달아주시는 모든분들 싸랑해요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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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Zipd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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