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나랑은 왜 안 해? 남준이 웃었다. 호석이 기분나쁘다는 투로 고개를 돌리며 꺼지라고 했지만 방 문에 기대어 선 저 낯짝이 어찌나 두꺼운지 주먹이라도 갈겨버리고 싶었다. 김석진이랑은 되면서 난 양심에 찔리나? 한껏 비웃는 그 말투가 마치 겨우 몸팔던 놈이 사람가리느냐고 하는 것 같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건 거짓이 아니었지만 호석은 그렇다고 그 말에 웃으며 말장난 할 기분도 아니었다. 기어오르지 마. 호석이 기가 차다는 듯 희미한 목소리로 남준에게 경고하자 그는 오히려 웃으며 코웃음을 쳤다. 민윤기도 만났던데. 그의 말에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그를 올려다본 호석의 얼굴이 꽤 당황스러웠다.

"내가 모르는게 있을 것 같아?"
"..."
"니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는 알 바가 아니지만, 뒤통수 치는 일은 없어야지."

그래서 고작 그 경고를 하러 밤 중에 오셨다? 호석이 코웃음을 치며 침대에서 발을 내딛었다. 내가 얼마나 흔드는지 궁금해서 잠 안오던건 아니고? 그의 말에 남준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호석에게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었다. 이복형이라고 했을 때 그자리에서 찢어죽이려고 했었어. 그것도 그 여자의 아들이라니. 내가 얼마나 참고 있었는지 알아? 김남준은 착각한다. 정호석의 몸을 가지는게 그의 우위를 가지는 것이라고. 하지만 언젠가는 정호석을 그자리에서 죽여버리지 못한 걸 후회하게 될거라는 사실을 그는 알까? 구원자인 척 가장 날 죽이고 싶어한다는 걸 잘 아는데 넌 왜 날 죽이지 못해? 호석이 웃었다. 이런 아이러니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말려올라가는 옷이 거추장스러워서 찢어버릴 것 처럼 벗긴 남준이 정복자처럼 호석을 내려다봤다. 김석진이 그렇게 정신을 못차린다고 하길래 궁금했잖아. 그가 목덜미로 깊게 들어오자 호석이 한껏 허리를 들며 중심을 비볐다. 겨우 그 동작에도 김남준이 목울대를 진하게 울리며 기분좋은 소리를 냈다. 어짜피 이복동생은 명목상의 족쇄라는 것을 서로가 잘 알고 있으니 죄책감 같은 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할 때 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에게 어떤 인간인지 흥미가 생긴다면 모를까.

"잠,잠깐. 윽!"

호석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남준을 밀어냈다. 당황한 표정의 남준이 이내 피식 웃었다. 왜? 남준이 만든 그림자 아래서 숨을 내쉬던 호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파. 다시 다리를 조이며 그를 받아들였다. 스텐드의 불빛이 아슬아슬하게 호석의 몸을 비추고 있었다. 마주보고 있기가 싫어 고개를 돌려 벽만 쳐다보자 그는 못마땅했는지 호석의 고개를 돌리고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숨을 헐떡거리다가 손을 잡아 그의 어깨를 잡았더니 크게 반동하며 더 깊숙히 들어오는 것에 헉, 하고 숨이 막혔다. 무언의 요구였다. 날 잊지마. 민윤기와 손잡으면 죽여버리겠다는 무언의 강요이기도 했다. 그럴수록 더 기대를 져버리고싶은거 알아? 호석이 그의 목덜미에 팔을 감으며 입을 크게 벌렸다. 더 들어오라는 신호였다.

호석은 늘 그런식이었다. 그게 누구든 넌 내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태도가 상대를 더 안달나게 했다. 누구는 호석이 상대를 기만하고 있다 생각하지만 남준은 그 반대였다. 내가 무서운거지, 네 안에 들어가 모든걸 끄집어내고 헤짚어놓는 게 무섭잖아. 호석은 발악해도 그녀를 닮아있었고 언젠가 제 발에 넘어져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이 모든걸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남준은 처음으로 호석에게 동정했다. 원하지 않아도 그녀를 닮아있는 그라니. 얼마나 기구한가?

누군가와 자리를 가질때면 내가 앉은 이 곳이 비로소 내자리라는 걸 인식해. 미진이 담배를 물며 멍청한 표정으로 흔들리고 있는 호석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난간에서 떨어질 것 처럼 허공에 뜬 다리를 흔들거렸다. 그곳은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자리가 하나 비었다며 좋아할 년들이 태반이지. 호인의 장례식장에 입고 왔던 빨간 원피스처럼 붉은 색 속옷을 입은 모양새가 꽤 이쁘기도 했는데 그 가는 허리에 찍힌 손자국이 이질적인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자기도 똑같이 될거면서 쓸데없는 생각 한다고 관둬버리긴 했지만 그렇게 엄마라는 사람을 미워했던 것 같다. 호인이가 미진의 아들이라는 것도 전부 다. 미진이 호석에게 말했다. 내가 절대로 여기 있지 말랬잖아. 네가 선택해놓고선 왜 불쌍한 척이야?

아냐 난 그런 적 없어. 호석이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리자 남준이 그 입에 혀를 집어넣으며 깊게 탐닉했다. 모든 걸 다 끄집어낼 것 같은 침입행위가 계속되었지만 호석은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변명하려고 안달 난 사람처럼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너라고 나같은 선택 안했을 것 같아? 난 나쁜거 없어. 난!

"으,읏..."
"하..."

결국 그녀는 끝까지 나에게 아무 말도 없이 혼자 슬퍼하다 자기도 호인을 따라가버렸다. 아무도 그녀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처지가 비슷한 년들도 그녀를 불쌍한 사람 취급했으니까. 분노에 떠는 호석의 팔뚝을 잡아챈 남준이 허리를 크게 움직였다. 제각각 흔적이 남은 처참한 아래를 쳐다보고는 그는 마치 호석을 사랑하기라도 한다는 듯 머리를 한 번 쓸어넘겨주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물을 가져다주고 아래를 정리해주는 손길이 다정해서 피식 웃은 호석이 남준을 올려다봤다. 감히 내가 환상이라도 깨트렸는지 모르겠네. 비웃는 목소리와는 반대로 굳은 표정의 김남준이 입을 열었다.

"니가 환상을 본거겠지."




32.

"저, 저 개년...!"

회장이 그녀의 옆에 있는 호석을 쳐다보더니 부들부들 떨었다. 형의 자리에 앉은 지가 몇 해 되지도 않았는데 제 아들만한 남자애를 데려와 뿌리까지 쥐고 흔드려고 했다. 네 년이 이럴 줄 알았다. 회장이 꺼져버리라는 듯 비서에게 말했다. 돌려보내. 철옹성같은 피의 장벽을 뚫고 꼭대기에 오르려는 천한 것들은 뿌리부터 잘랐어야 했는데. 하지만 주식의 상당수를 가지고 있는 그녀를 정작 본인조차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이미 죽어서 썩어가고있는 형님을 원망했다. 여성 편력을 운운하고 싶진 않았지만 살쾡이를 어디서 주워와 애완고양이로 키웠어. 그러니까 주인 목을 물고도 죄책감이 없지.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와 호석에게 말했다.

"인사드리러 온 것 뿐인데 크게 노하실 줄 알았다면 미리 언질을 하고 올걸 그랬어요."

사실 예상치도 못한 복병을 만나 쥐새끼마냥 구석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벌벌떠는 꼴을 보고 싶어 안달이면서 말은 잘 했다. 호석이 같은 눈매를 하고 회장을 내려다보고 짧게 목례하자 그녀는 다음에 봽자며 먼저 자리를 옮겼다. 호석이 마지막으로 본 건 테이블을 내려치며 분노하고 있는 회장이었다. 비서들이 잔뜩 움츠리며 회장의 상태를 살피러 들어가는 것을 뒤돌아 지켜보던 호석이 마른몸의 그녀의 정수리를 흘겨봤다. 당신이 원하는 건 뭘까. 그들과 똑같이 되고 싶은건가?

호석이 로비로 들어서는 남자를 지나쳤다. 지민과 함께 차에 탔던 남자였다. 그는 호석을 보지 못했는지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었는데 짧게 지나치면서 향수 냄새가 호석의 코에 머물렀다. 현 회장의 첫째아들 전정국. 호석보다 적어도 두어살은 어려 보였다. 하지만 회장의 아들치고는 강단있게 생긴 얼굴이 아마 회장보다 더 어려운 상대처럼 보였다.

"니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따르겠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이 곳에 자주 드나들테니 잘 익혀두거라."
"..."
"김비서와 함께 갈 때는 선물을 준비하도록 지시해."

그래야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니까. 그녀의 말에 호석이 피식 웃었다. 이런 말 하기 구차하지만 옛날이랑은 많이 달라졌네요. 적어도 상대방이 어떤얼굴을 하는지는 신경 안쓰셨었잖아요? 호석의 말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를 지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구질구질한 변명이 될거라는 것을 아는 태도였다. 그녀는 호석이 전날 밤에 김남준과 섹스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정신차리고 보니 방 문은 열려있었고 반라의 상태로 정신없이 문 밖으로 나가보니 소파에 앉은 그녀가 호석을 올려다보다 그대로 방으로 향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다. 그녀도 허울뿐인 관계에서는 얼마든지 몸을 섞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까? 언제나 그녀는 호석의 행동에 답이 없다.

차에서 내린 호석이 그녀가 아직 타고있는 차가 차고 안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키의 배는 되는 담장에 기대어 선 민윤기가 호석을 보더니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들고 지그시 응시했다. 얼굴은 잔뜩 오기싫다는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 먼저 다가와 호석을 응시했다. 거봐, 반드시 내 손을 잡을거라 했잖아. 호석은 게임에서 크게 이긴 것 처럼 민윤기를 바라봤다. 미동이 없는 그는 손가락을 튕겨 담배를 떨어트렸다. 철저한 계약관계로 이루어질 사이는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김남준도 아마 정호석이 안전장치로 민윤기를 허수아비마냥 세워놓을 것을 알고 있었으니 숨길것도 없었다.

"내일부터 나오세요."
"..."
"그리고 절대 나 말고 누구와도 대화하지 마세요."

호석의 손을 잡는 순간 아마 김태형은 저를 죽여버릴 기세로 달려들 게 분명했지만 이제와서 되돌릴 수는 없었다. 호석을 등 뒤에 세우는 대신 그는 아주 작은 안전장치 하나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김회장이 친아들인 김태형만 싸고 도는게 아니라는 것 쯤은 공공연하게 알고있는 사실이라 윤기가 위험하다면 직접 움직일 성격이었다.

"그년이 당신 되게 좋아했는데."
"날 동정하는거겠지."
"..."

김태형이 다녀간 뒤로 그녀들은 민윤기와 김태형과의 관계를 얼핏 짐작하고 있을 게 뻔했다. 다리를 저는 앞잡이년은 유달리 정에 약했다. 버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빌려달라는 돈은 죄다 퍼줘놓고 맞고 살던 년 치고는 말년이 행복한거라고들 하는데 호석은 그녀에게서 많은 걸 볼 수 있었다. 미진이 호석에게 자기방어와 합리화를 가르쳐줬다면 그녀는 그것에서부터 자유롭게 해줬으니까.




33.

여유롭게 저택으로 들어선 지민이 콧노래를 부르다 생소한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 했다. 저건 또 뭐야. 그러고서는 무표정으로 앉아있는 그 앞에 앉아 물끄러미 쳐다봤다. 세상 만사 귀찮게 생긴 남자는 지민을 없는 사람인 듯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전혀 기분나쁘지 않은 듯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맞다. 당신이 정호석이 데려온 남자구나? 김사장의 새아들이라고 해도 친아들인 김태형이 버티고 있는 이상 뭣도 아닌 놈이 정호석과 함께 있는 꼴을 보니 여간 위태로운게 아니었다. 차라리 지옥으로 뛰어들고 말지. 지민이 웃으면서 윤기를 지나쳤다.

"사모님은? 보고싶어서 왔는데."
"방에 계십니다."
"내가 나올 때 까지 너도 들어오지 마."

지민이 석진에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마치 경건한 일을 한다는 그의 표정에 덩달아 굳은 석진이 자리를 비켜줬다. 그렇다고 해서 지민이 죽이려들것도 아니지만 항상 지민의 뒷모습을 의심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석진이 고개를 돌렸다. 이미 그녀의 판단이기 때문에 절대 거역할 수 없었다. 박지민이라는 양날의 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그녀가 조금 무서워졌다. 이제 그녀의 손을 필요로하지 않은 박지민이 계속해서 자길 찾는다는건 아마 윈하는 걸 아직 얻지 못했다는 뜻 아닌가? 아니면 새로운 먹잇감이 생겼다는 것일지도. 석진은 고개를 돌려 호석이 잠들어있을 침실을 응시했다.

가정부가 청소를 마치고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던 석진이 새벽부터 찾아와 호석을 기다리는 윤기를 쳐다봤다. 김남준과 김석진으로 모자라서 민윤기까지. 대단하군. 어디까지 갈 지 궁금했지만 김남준이 그렇게 참을 성이 많은 인간은 아니기 때문에 조만간 저 남자는 시야에서 사라질 게 분명했 다. 차를 내와 테이블에 놓아주니 남자는 힐끔 석진을 올려다보고는 찻잔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정호석이 철저하게 교육을 시켰는지 남자는 석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쪽에서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잠들어있는 호석에게 향했다. 그는 죽은 것 처럼 잠들어 있었는데 제 옷을 힘 있게 쥐고 있었다. 너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구나. 석진이 무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다 그의 손에 잡힌 천을 빼내었다.

"왜?"

석진이 고개를 돌렸다. 언제 잠들어있었냐는 듯 호석이 눈을 뜨고 석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콧날에 시선을 두던 석진이 호석의 얼굴에 손을 내렸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는 안다는 듯 작게 웃음지었다. 그건 나도 알아. 당신은 지금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 없잖아. 맞지? 그와 동시에 석진이 어디에 홀린 듯 호석의 입을 찾았다. 단 한번의 섹스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던 키스는 새로운 형태가 되었다. 김석진의 처음 의사표현이 나쁘지 않은지 호석이 웃으며 석진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원하지 않는다면서.

"기다리십니다."
"상관 없다고 했잖아."

호석이 아쉽다는 듯 석진의 목덜미를 눈으로 훑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피곤하다는 듯 어깨관절을 돌리며 기지개를 피자 석진이 작게 목례를 하고 방 밖으로 빠져나가는 게 마치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한 사람같아서 호석은 그를 비웃었다. 김남준이랑 타협이라도 한 건가. 나른하게 기대어선 호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버둥칠 수록 더 잠길 관계들은 누구 하나 죽어나갈 때 까지 풀리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들 전부 깨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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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Zipd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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