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난 또. 박지민 엉덩이에 붙은 얼간이 나부랭이 인 줄 알았지. 호석은 제 앞에 앉은 정국의 얼굴을 응시했다. 먹잇감을 단 한번도 뺏겨본 적 없는 맹수의 얼굴을 하고선 순한 양처럼 앉아있는 꼴이 꽤 웃기긴 했다. 여자는 입이 짧은지 두어 번 수저질을 하다 채 절반도 입에 넣지 못하고 내려놓긴 했지만 식사는 만족스러운듯 얼굴에 잠시 생기가 돌았다. 고급스러운 한식집의 처마끝이 아슬아슬하게 해를 가리고 있던 것만 쳐다보고 있던 호석을 제외하고 정국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정국의 아버지인 전회장과 함께했을 자리지만 앙숙과 마주보고 목구멍에 뭔갈 밀어넣고 싶진 않은지 자리에 나온 건 정국 뿐이었다. 제게 친척동생쯤 되려나. 가만 생각하고 있는데 별안간 그녀가 입을 열었다.

"거북해할 줄 알았는데 다행이구나."
"..."
"몇 번 같이 식사했었는데, 큰삼촌 돌아가시고 처음이잖니."
"..."
"그리고 호석이도 처음이고."
"네."

언제 그렇게 다정하게 호석의 이름을 부르면서 거짓말을 연습했을까. 이제부터 네 라이벌은 정호석이라고 일깨워주기 위함인걸 병신이 아니고서야 모를 리가 없었다. 다행히 전정국은 속 다 보이는 그 말에도 표정을 유지하고 앉아있었다. 순진한 척을 하고 있는 얼굴이 백미러에 비쳤던 눈빛과는 많이 달랐다. 그래, 네 약점은 박지민이구나.

저같았으면 자리를 박차고서라도 나갔을 텐데. 제 아버지가 가르쳤을 게 뻔했다. 아무리 찢어 죽여버리고 싶어도 상대가 가지고 있는 게 탐이나면 일단 숙이고 들어가거라. 정작 본인은 자리를 가려가면서 아들을 앞세우는 꼴이 딱 이빨빠진 맹수나 다름 없었다. 호석이 창촌에 있으면서 사리분별보다 더 일찍 배웠던 것이었다. 손에 든 게 돈이면 살갑게 대하고 술이면 문전박대를 해서라도 내쫓아라. 호석은 그것을 아주 뼈저리게 느꼈다. 술든 손에 길들여진 앞잡이년의 절뚝이는 발을 볼 때면 항상 떠올렸던 말인걸. 호석이 애써 표정을 숨기며 제 앞에 있는 반찬의 양념 따위를 휘적거렸다. 어김없이 못마땅하다는 그녀의 눈빛이 따라왔다. 못배운 티 내긴. 낮게 호통치는 그녀의 눈빛이 천천히 호석의 손끝을 향했다.

콩가루 집안. 정호석과 김남준. 형제인 둘은 한 집에서 몸을 섞고 다음을 기약할 것 처럼 멀어졌다. 호석은 제가 미꾸라지마냥 흙탕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흙탕물 속에서 뛰어다니는 것들에 흥미를 가진 자신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박지민이 우리집에 들어와 버릇처럼 여자의 방으로 향하는 것도 알까? 이 둘이 평범한 얼굴을 하고 서로를 마주보고 있을 수 있는 게 신기했다. 거북하지 않아? 양쪽에서 저울질하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속아넘어가 줄만큼 그에게 빠져있는건가. 호석이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형이랑 잘 지낼게요. 예전에 유환이때도 그랬잖아요. 안타깝게 일찍 죽었지만."
"..."
"호석이형은 제가 지킬게요."

잘도 순진한 얼굴의 정국이 웃었다. 유들한 말과는 반대로 목덜미를 물어뜯긴 것 같은 표정을 한 여자가 굳어졌다. 호석이 얼굴로 정국의 얼굴을 쳐다보자 그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듯이 잘 지내보자며 웃었다. 내밀어진 손을 맞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제스처였다. 내가 친척동생이랑 악수를 다 해보네. 호석이 웃으며 말하자 정국이 싱긋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친척 형이랑 악수한 적은 처음인데 좋은것같아요. 우리 이런 자리 자주 만들어도 돼? 호석은 대답할 수도 없었다. 잘도 박지민 옆에서 붙어다니더니 눈에 밟히면 가차없이 죽여버릴수도 있다는 느낌을 풍기며 제 앞에 앉은 꼴이 아이러니할 수 밖에. 호석은 정국의 남다른 취미를 곱씹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자주 만들자. 정국의 눈동자에 비친 제 얼굴이 잔뜩 두려워하는 얼굴같아 보여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무능한 애비 아래서 악착같이 자랐으니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는 것도 이상할 것은 아니지. 식당 밖을 나가기 전까지 한 마디 없던 그녀는 입구를 나서자마자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옛날에는 그렇게 불쌍하게만 느껴지더니 역시 짐승새끼는 뭘 해도 짐승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구나. 그녀의 말을 계속해서 듣고 있던 호석이 허공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남들보다 두 배는 긴 점심시간을 끝마치고 나온 도심은 한산했다.

"날 계속 이런 쓸데없는 자리에 데리고 다니면서 그정도는 각오했어야죠. 우리가 먼저 칼을 뽑았으면 그쪽에서는 손톱이라도 세워야지."
"그래."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 한 번 나서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던 석진이 백미러로 살짝 호석 쪽을 바라봤다. 저택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상하게 그의 말 끝이 떨리는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35.

윤기는 어디 맹수에게서만 보이는 서열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서열이 높을 수록 더 지킬 것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사람은 시간이 갈 수록더 외롭지. 제가 기억이란 걸 하기 시작했을 때 부터 어머니는 늘 혼자라는 사실이 익숙해져 있었다. 가끔 아버지란 사람이 찾아와 제게 안부를 물었다. 학교는 잘 다니고 있느냐? 누가 괴롭히진 않느냐? 그것이 으레 묻는 질문인줄 알았던 적은 없었다. 흔히 하는 행사에도 얼굴을 비추지 못했던 사람은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전에 먼저 답답한 감정이 울컥 피어올랐다. 어린 마음에 흙냄새나는 잎사귀같은 손에 만 원짜리 몇 장 쥐어주는 그 순간이 잠깐 행복했던 것 같은데. 아버지는 배다른 동생에게 친동생처럼 여겨줄 것을 부탁했을 때 윤기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 부터가 아버지가 소유한 집이었으니까. 애초부터 어머니는 아버지가 없으면 끝장이다. 출생의 비밀같은 시덥잖은 이야기는 이제 전부 부질없는 허구에 가까운 것이다. 김태형도 지금껏 그런 걸로 유치하게 굴지 않는다.

윤기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제 앞에 앉은 호석의 뒷덜미를 바라보았다. 잘 빠진 목선하며 떨어지는 어깨선이 꼴에 남자의 냄새를 풍기고 있는 게 웃기긴 했다. 그는 나른하게 앉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곤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관여하고 싶지 않았는데 정호석은 볼 때마다 괜히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김석진은 그 여자의 비서일로 바쁠테고 김남준은 회사일 때문에 저녁에서야 얼굴을 비칠테니 윤기가 그의 하루를 전부 책임져야 할 때도 있었다. 호석이 고개를 뒤로 뺐다. 배고프지 않아? 며칠 사이에 존대는 익숙하지 않다며 말이 짧아져서 그런지 그 얼굴이 밝다. 그날 만나고 몸을 섞고 헤어지는 일이 허다한 그의 생활에서 존대말이 필요있었겠냐 싶다만. 윤기는 고개를 가로젓지도 끄덕이지도 않았다. 알아서 하겠다는 눈치에 호석이 다시 소파에 몸을 기댔다.

"비위도 참 강해. 그치?"

호석은 즐거워보였다. 테이블 위에 두어 개의 펜이 굴러다니는 걸 보며 윤기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김남준과 물고빨며 여자와 김석진의 시선을 즐겼다지. 오히려 김남준이 정호석에게 아침부터 왜이러냐는 물음을 던졌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남준의 넥타이를 놓아주지 않으며 아랫입술을 빨았다. 그는 호석을 밀어낼듯 하다가도 낮은 신음을 흘리며 호석의 뒷목을 쓸어올렸다. 소름이 돋았지만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진 남준의 탱탱한 입술을 보며 히죽 웃은 호석이 아무렇지 않게 다시 식탁에 앉아 아침밥을 먹었다. 제대로된 사람 하나 없다지만 제일 이상한건 정호석이지.

"그렇게 약한 모습 보여주면."
"..."
"물어뜯겨."
"..."
"알아서 잘 해. 난 거기까진 관여안해."

한참을 말이 없던 호석이 펜을 장식장유리로 집어던졌다. 맞다. 정호석이 그렇게 나올수록 약해져간다는 신호인 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아무런 말 없이 그런 추접한 짓을 하는 걸 쳐다만 보고 있었겠지. 유리가 깨지며 바닥이 엉망이 됐다. 유리파편이 윤기의 발치까지 날아올 지경이었다. 넌 알겠어? 내 좆같은 감정이 뭔지. 답답해서 전부 다 죽여버리고 싶어. 날 손바닥안에 놓질 못해서 안달인 사람들밖에 없잖아. 윤기는 그의 말을 들으며 호석이 참 딱하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그렇게 안식처가 되었던 창촌에서도 김태형이 그를 손바닥에 놓고 그러지 않은 척 속여먹었으니까.

"김유환이라고 3년 전에 죽은 아들이 있어. 교통사고라고는 했지만 그때 알만한 사람들은 전부 치정싸움의 산물이라고 하더라."
"..."
"정부인 김남준의 어머니가 김유환을 죽였을거라고."

근데 그게 아닌것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호랑이새끼가 멋대로 짓거리면서 일부러  몇개 흘려주더라고. 그 개자식이 나를 지켜준다라... 호석은 어이가 없어서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며 웃었다. 입은 영락없이 웃는 모습이었지만 눈은 그렇지가 않았다. 정작 박지민하나 통제를 못해서 성난 망아지새끼처럼 날뛰고 있으면서 나를? 호석의 앞에 장식장 유리가 깨진 소리를 듣고 나온 고용인들이 유리조각들을 쓸어담고 있었다. 조각난 그들의 신뢰와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인간성이라는게 죄다 박살나 바닥을 나뒹굴고 있다. 그의 옆에서 호석의 붉은 귀 끝을 바라보고 있던 윤기가 눈을 가늘게 뜨며 돌렸다. 결국 너도 그 싸움에 끼어들겠다는거잖아.

다들 내가 정점에 서길 원해. 김남준이나 김비서, 그리고 심지어 박지민까지. 그렇게 원한다는데 어울려줘야하지 않겠어? 날 여기까지 끌고 들어왔으면 대가도 있겠지. 호석은 흐느끼듯 중얼거렸다. 뒷목이 당기며 깊은 두통이 몰려오는지 몸을 뒤로 젖혀 낮게 웃었다. 앞머리가 소파머리에 흩날리는것을 보며 윤기는 알 수 없는 숨막힘에 마른 침을 삼켰다.



36.

굿모닝! 경쾌한 목소리에 아침을 먹고 있던 호석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역겨운 목소리. 아침부터 찾아온 지민이 여자의 옆자리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줄곧 스케줄때문에 얼굴을 자주 비추지 못했던 지민이 얼마전 고정 쇼 프로그램이 종영한 이후 휴식기를 가지며 저택으로 다시 돌아왔다. 원래는 쉬지 않고 끝없이 활동을 가지는 것이 보통의 경우이지만 지민은 그녀에게 얼마 전 휴식기를 가져야한다는 의견을 피력했었다. 김남준은 그것을 보고 뭔가 꾸미고 있다며 박지민의 행동을 주의줬지만 호석은 일단 박지민이 목줄을 당기고있는 전정국부터가 문제였다. 호랑이 새끼가 박지민만 감싸고돌면 관심이라도 끄려 했는데 가만히 놔두면 목덜미를 물어 뜯을 것 같잖아.

부산스럽게 밥을 먹으며 호석에게 아무렇지 않게 안부를 묻는 걸 계속 지켜보다간 먹었던걸 전부 체할것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올라가볼게. 그들 중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대꾸가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딱히 신경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다만 거실에 앉아있던 윤기가 호석을 따라 계단으로 올라서자 오히려 호석쪽에서 올라가다 말고 고개를 돌려 제 눈에 영락없이 개판인 식탁을 쳐다봤다. 민윤기를 죽일것처럼 노려보고 있는 김남준과 이미 호석이 내려오기도 전에 식사를 마치고 여자의 뒤에 표정없이 서 있는 김석진, 그리고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재잘대고 있는 박지민까지. 호석이 다시 계단을 올랐다. 아무리 낯짝이 두꺼워도 아침부터 얼굴을 마주볼만큼 비위가 강하지 않았다. 차라리 안먹는 게 낫지.

끼니를 거르는 게 익숙해 침대에 걸터앉은 호석이 따라들어오는 윤기를 향해 손짓했다. 사실 그럴수록 약해보인다는 민윤기의 말에 자리를 아예 피해버려야 겠다 생각했지만 이런 걸로 끝낼 성미는 아니란 말이지.

"우리가 여기서 붙어먹는다고 하면 김남준이 어떻게 나올까?"
"..."
"농담인데."

그렇게 쳐다보지마, 무안하게. 호석이 고개를 돌렸다. 별안간 그가 성큼 거리를 좁히며 호석이 앉은 침대로 다가와 뒷덜미를 잡아올렸다. 힘없이 그대로 딸려올라가 입술을 내어주게 된 호석이 놀라 입을 꽉 감춰물자 윤기의 눈이 가늘어지며 엄지로 호석의 입을 잡아벌렸다. 농담이 아니잖아.

정호석은 제 존재를 이런식으로 알리고 싶어한다는 것을 안다. 가진거라곤 몸뚱아리 뿐이었던 그가 유일하게 누군가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방법이자 약함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 목구멍이 간질거릴 때 까지 빨아들이듯 키스하던 윤기가 호석의 목을 조일 것 처럼 감았다. 혀를 섞어 질척이는 소리 중간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던것 같더라니 키스가 끝나고 닫혀있던 방문이 열린 채 그대로 있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호석이 바람빠지는 소리를 냈다. 되게 억울하네. 문가에 서 있던 윤기가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를 듣고 다가와 보란듯이 키스한 게 분명한테 얼굴은 마치 평온 그 자체였다.

"내가 손을 잡은 이유는 네가 가진 재력과 위치. 그것 뿐이야."
"알아."
"약해지면 쓸모 없어."

누구보다 잘 알면서 정작 본인이 약해지는 것에 대해 무딜까. 윤기는 안쓰럽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안쓰럽다고 여기는 순간 모든 관계가 틀어져버릴까봐.

"김태형도 애초부터 네 엄마랑 아는 사이였어. 훨씬 전부터 널 여기로 불러들일거라는 것도 다 알고 있었겠지."
"..."
"여긴 사랑못받아서 허덕이는 새끼 받아줄 사람 없다는 거 잘 알잖아."

박지민만 봐도 간단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본인이다. 윤기는 미련없다는 얼굴로 호석에게서 돌아섰다. 나가려 두어걸음 멀어진 윤기의 손목을 끌어온 호석이 물었다.

"돌아올거지?"

슬쩍 돌아본 호석의 얼굴은 생각과는 다르게 잔뜩 굳어 있었다. 지금까지 들었던 모든 죄책감을 씻어내린 사람과도 같아서 오히려 두려울 지경이었다. 결국 김태형도 너도 내겐 다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왜 잊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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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Zipd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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