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거짓말



남자는 제규어 뿐만이 아니라 늑대같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옆에 앉아 그가 업무 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왜 자기를 여기에 앉혀놓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전화기에 대고 알 수 없는 말을 짓거리면서 지민이 조금이라도 눈길을 주면 남자는 조금 높아진 언성을 낯추며 통화를 했다. 별 취향 다 보겠네. 마치 지민을 소중한 인형이라도 다루듯 해줬으니 지민도 그에 부응해 아무말도 안할 참이었다. 할 일 없이 그의 비서가 준 이상한 향의 차를 한모금씩 들이켰다. 향은 태형이 러시아에서 사 온 이상한 장난감에서 나는 페인트 향 만큼 좆같았지만 맛은 꽤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남자는 지민에게 차가 맛있냐고 물어왔다. 얼굴에 선글라스 좀 벗으면 안돼? 실내에서 답답해보이잖아. 지민의 말에 남자는 웃었다. 내 외모에 네가 놀라면 안되니까 매너를 지켜야지. 참 같잖은 대답이었다.

바야르는 깨어난 여자아이를 브로커에게 데려다줄 생각으로 잠시 외출했다고 했다. 그냥 나가서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했지만 자기때문에 지민이 여기에 잡혀있는 줄 착각하는 것 같았다. 지민은 언제라도 이 곳을 빠져나갈 심산으로 출구를 익히는 중이었다. 계속 여기에서 인형처럼 있다가는 남자의 선글라스가 꿈에 나올 지경이었다. 남자는 장신의 몸을 이끌고 천천히 걸어가 지민의 차를 다시 내어왔다. 다 마셨으면 이야기를 해야지. 그의 나긋한 음성에 지민의 얼굴이 반대로 찌푸려졌다. 언제까지 일만 할 건데? 지민이 묻자 남자는 터무니 없이 툭 뱉어놓았다. 그러게. 나도 다 때려치우고 클럽이나 가서 빵빵한 엉덩이 만지면서 놀고 싶은데. 어이없는 그의 말에 눈하나 깜짝하지 않은 그의 비서를 보니 놈이 저러는 건 하루이틀이 아닌것 같았다.

"지루해?"
"..."
"딱 일주일만 내 옆에 있어주면 돼. 네 친구들이 너를 아주 간절하게 원하고 있더군."
"뭐라고?"
"네 뒤를 따라와서 잘 모셔놨지."
"빌어먹을! 털끝하나라도 건들면..."

지민은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김태형이 루크와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팔찌까지 주면서 작별인사 할 땐 언제고 여기까지 와서 무슨 일을 벌이려고 이러는지 그의 머리를 열어서 들여다볼 수 있다면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일이 이렇게 변해버린 건 할 말이 없지만 태형의 미행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남자는 지민을 빌렸다는 표현을 했다. 물건이 되는 기분은 썩 좋진 않았다. 일주일 동안 인형 행세나 해주면 풀어준다니 썩 내키지는 않지만 지민은 그렇다고 당장 나가겠다며 소란피우고싶지는 않았다. 카말과 싸워서 어깨의 실밥이 다 터지는 느낌도 다시는 느끼고싶지도 않았고 조금의 휴식이 필요했다.

그럼 내가 재미있는 이야길 해 줄게. 남자는 결제 서류를 탁, 닫더니 지민에게로 몸을 돌렸다. 마살루가 왜 마살루인지 알려준다더니 남자는 선글라스를 벗어 유리탁자위에 내려놓았다. 반쯤 감겨서 나른하게 뜬 눈은 날카로운 눈매를 가려주진 못했다. 높은 코에 유하게 올라간 입꼬리. 한쪽 눈 옆 자상이 지민의 눈썹을 움직였다. 한 번에 시원하게 그어버린 듯 크게도 그어놨군. 그를 관찰하며 차를 홀짝이자 남자가 웃었다. 어때, 눈부신 외모에 반해버리겠지? 그의 말에 지민이 다 마신 찻잔을 집어들어 던지려고 했다.

"조금만 비켜나갔으면 눈을 잃을 뻔 했다는군. 예전 마살루의 주인이 마살루가 무너지기 직전 나에게 마살루를 넘겨주면서 선물해줬어."
"평생선물이군."
"그래. 넌 눈하나 깜짝 안할 줄 알았지."

마살루는 이제 일개 갱 집단이 아니라 투자회사야. 스스로 모래바닥에 굴러다니길래 내가 주인을 물어서 그렇게 만들었지. 그런데 아무도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놈들한테 본보기로 애들을 풀어놨을 뿐이야. 그것도 모르고 벌벌 떨면서 기더군. 너와는 달리 놈들은 이해타산적이니까. 이국적인 외모를 내보이며 지민에게 다가선 남자는 지민과 처음 만났을 때 앉았던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어 섰다. 그렇다고 네가 다른 놈들보다 모자란 것도 아니야. 되게 이상하지. 본인이 불리한 상황에서 앙칼지게 반항도 할 줄 알고. 너 꽤 매력적이라는거 알아? 그의 물음에 지민이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피했다. 남자를 취향으로 두진 않으니 눈 치워. 그렇게 말하면서 지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갑자기 그의 생각이 나는지 잘 모르겠지만 정말 끈질기게 저를 괴롭힐 심산이었다. 옛날에는 감정을 인정하고도 남았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맞아도 아닌 척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그렇지 못하니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여기 놈들은 남자끼리 그러고 그러는거 싫어해서 나도 그러지 않을 생각이었어. 그런데 너를 보니 생각이 좀 바뀌려고 하는데."
"꺼져."
"그래, 넌 중개인한테 얼마를 받고 여기로 왔지?"

지민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아꼈다. 생각 외로 지민이 원래 이곳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바야르가 알려준 건가 싶었지만 다른 생각은 안하려고 했다. 남자는 그런 날카로운 말을 뱉어놨음에도 여유롭게 웃으며 지민에게 자신의 옆에 일하는 것을 권유했다. 돌아갈 곳이 있어. 지민의 말 끝이 떨리는 것을 알아챈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3개월 후에 우리는 본사를 뉴욕으로 옮길거야. 여기에서 뽑아먹을 건 다 뽑아먹었거든."
"그런 걸 왜 나한테 알려주는건지 모르겠네."
"필요하면 찾아와, 찾아와서 카림을 찾아."
"네 이름인가?"
"그래. 여기에 팔려왔을 때 내 이름."

지민은 그가 저에게 다가와 얼굴을 쓸어내리는데도 멍청하게 앉아 허공만 쳐다봤다. 바야르의 형제를 쏘는 순간 벌벌 떨던 그 여자아이와 같았던 그는 주인을 물어뜯고 최고의 자리에 올라와 있다. 지민은 현실에 치여 도망치는 신세가 되어버렸는데.  신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카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었다. 이 나라 언어만 10년이 걸렸는데 다시 떠나려니까 발길이 안떨어지네. 그는 말과는 달리 꽤 속시원한 얼굴이었다. 어찌보면 좀 신나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지민은 그의 손끝이 뺨끝을 지나 다시 제자리로 올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부탁이 있어."
"뭔데?"
"..."
"들어줄게."
"나와 같이 온 남자가 다시 돌아온다면, 나는 이미 돌아갔다고 해. 그리고 그를 돌려보내."

남자의 눈썹한쪽이 씰룩였다. 지민은 설명을 요하는 눈빛에도 그를 외면했다. 다시는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지만 마지막은 아무 상관없는 그를 제자리에 두고 싶었다. 남자는 지민을 한참이고 내려다봤다. 그 남자는 네가 자기 형제를 죽인 걸 알더군. 그의 말에 지민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도대체 날 왜 살려둔거지? 카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브로커 일을 언제까지 형제가 같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이야기지. 분명 네가 이 곳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예상했겠군. 지민의 눈동자가 정처없이 떠돌았다.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규칙들. 처음부터 아무렇지 않은 듯, 오히려 저를 챙기려들었던 바야르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갱에게 한 번 당하고도 정신을 못차렸나보네. 산전수전 다 겪고도 모르겠어? 여긴 네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인륜도 없고 자비도 없는 곳이란 걸 잊지마. 불구덩이 같은 사막 속에서 뭣도 없는 놈들이 부딪히고 살기 위해서는 그런건 사치일 뿐이야. 쌍둥이라도 예외는 아니지. 남자의 눈이 빛이 났다. 살기를 띄는 그 눈빛이 마치 지민을 잡아먹을 것 처럼 맹수의 기운을 띄었다. 여러명은 집어삼키고도 남을 눈빛이 지민을 채 못삼킬까, 조롱이라도 하듯 카림이 웃었다.

"아무리 봐도 흥미가 생긴단 말이야."







*






"파이!!!"
"..."
"제정신이야?! 분명 먼저 가 있으라고 했을 텐데?"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태형이 지민의 얼굴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방 한가운데에 서 있던 루크도 별다를 것 없이 지민을 다행이라는듯 반겼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에 비할 것이 못됐다. 그들은 자신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는 게 너무 크게 다가와서 무엇부터 따지고들어야할지 알 수도 없었다. 언제까지고 지민의 편의를 봐주는 건 이제 더이상 바라지 않았다.

"로이...내 말좀 들어봐..."
"필요없어! 분명히 넌 날 믿는다고 했는데, 뒤를 쫓는 건 무슨 짓이야? 처음부터 날 못믿었다는거 아니야?"

분에 못이긴 지민의 숨이 거칠어졌다. 태형은 지민이 이렇게 화낼 줄 알고 있었다고는 해도 평소에 잘 화내지 않는 지민이 이렇게까지 화내는 것을 보면 실망감이 얼마나 큰 지 손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그 것을 내려다보던 태형이 고개를 숙였다. 널 못믿었던 건 아니야. 우리는 니가 너무 위태로워보였어. 아직도 유스를 못잊고 있는 게 눈에 보여서.

"그런 이유로 합리화 하지 마."
"너 죽을 뻔 했어."
"..."
"니가 남자를 죽일 때 건너편에서 널 저격하고 있던 남자가 있었거든."

그 자리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지민이 중얼거리자 태형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런소리 하지마! 항상 미련없는 척 하면서 제일 끝까지 붙잡고 있는 건 너였잖아 안 그래? 나는 이제 남은 건 너랑 루크밖에 없는데 너는 항상 내가 별거 아닌것 처럼 굴더라. 그래, 니가 유스를 구하려다가 이지경이 된 건 다 내탓이야. 그래도 2년 동안 같이 지낸 동료로서 이 정도 걱정은 사치인가? 그래?

- 여긴 네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인륜도 없고 자비도 없는 곳이란 걸 잊지마.

눈을 번뜩이며 낮게 대답하는 카림이 떠올랐다. 모든 사람을 배척하는 사람들. 나도 그런 인간인 줄 착각하고 있던 자신. 파이에게는 겨우 유스를 잊지 못해 발버둥치고 있는 것으로만 보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유스가 절대 보지 못하도록 꾹꾹 눌러참은 그 감정을 자기자신에게도 암시를 건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질까. 좋은 추억이 될까.

"이럴거면, 유스에게 찾아가서 다 말할거야. 네 빌어먹을 희생 때문에 오히려 로이가 지옥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그만해."
"..."
"알겠어. 없던 일로 하자."

로이...제발 유스때문에 니가 힘드려고 하지 마. 태형의 애원에 지민은 고개를 돌렸다. 이 바보같은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주려다 그 마음에 스스로 잡아먹힐 거라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처럼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서로를 애절하게 그리워만 하다가 홀로 썩어 문드러질 사람들. 파이는 사이먼의 죽음에도 슬퍼하지 않으려 했다.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허허 웃으며 멀리서나마 축복을 해줬다는 걸 죽는 순간까지 엘레나는 몰랐고 앞으로도 모른 채로 죽어 있을거다. 결국 두 사람은 같은 사건으로 한 날 한 시에 죽어버렸고 남겨진 파이는 그들의 자취를 쫓으며 살고 있다. 옆에서 지겨봤던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이 어떤건지 죽을 때 까지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로이."
"..."
"파이 싫어하지 마. GPS, 내가 했어."

괴로운 표정으로 머리를 붙잡고 파이의 앞으로 나온  루크는 지민의 손목을 잡아올리더니 팔찌를 빼서 그 안의 내용물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다시는 안 그럴게 로이. 미안해. 영어가 서투른 루크는 지민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화려한 문양 속에 작은 칩 같은 것이 바닥에 조각이 난 채 나동그라져 있는 모습이 마치 자신의 모습 같아서 지민은 차오르는 숨을 내뱉지 못하고 꾹 눌러 참았다.

이 둘이 자신을 걱정하게 만든 장본인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다. 괜한 사람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공간을 피하고 싶은 지민이 파이를 지나쳐 방을 빠져나갔다. 둘에 대한 실망도 크지만 자신에게 실망이 더 커서 죽어버리고 싶다. 복도 한 가운데 벽에 기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카림은 지민을 한 번 훑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어? 눈치없게도 지민에게 묻는다. 그가 내용을 다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지민에게 확인사살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지민이 그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유스. 유스라고 했지?"
"닥쳐."
"로이, 내가 너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넌 나의 파트너가 되는거야."
"...일주일만 지나면 이 곳을 떠날거야."
"알아. 네가 떠나기 직전까지 내 파트너로 동행하라는 뜻이니까."

적어도 넌 내가 가진 것들을 욕심내지도 않고 그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카림은 지민을 응시했다. 그의 생각이 어떤 건지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의 생각대로 움직여줄 수는 없었다.

"거절한다면."
"네 친구들이 어떻게 될 지 모르지."

역시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지민이 카림을 노려봤다. 카림은 지민을 꽤 가치있는 사람인 척 굴고 있지만 역시 그 속에는 지민을 휘두르고 싶어서 난리인 사람처럼 지민의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지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역시 지민이 파이와 루크에 민감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방패막이로 쓰고 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그 둘 때문에 자신과 동행하게 된다는 것도 이미 그는 멀리 내다보고 있겠지.









"믿을 수 없는 상대라서 걱정됩니다."
"괜찮아. 로이는 날 죽이지 못 해."
"만나자마자 죽이려고 달려드는 남자 치고는 착한 사람은 없는 걸로 압니다만."
"난 착한 사람을 원한 게 아니야. 강인한 남자를 원한거지. 그리고 무엇보다."
"..."
"야망이 없잖아, 안 그래?"

야망이 있는 사람은 가장 위험한 사람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한 카림이 유하게 웃었다. 야망이 있는 사람은 뭘 내어줘도 그 이상을 꿈꾸는 법이거든. 나처럼 말이야. 걱정은 아직 사그라들지 않은 카말은 카림이 아무리 여유로워도 지민에 대한 경계는 풀지 않을 것 처럼 카림의 옆을 지켰다. 지민은 작은 체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훈련을 강하게 받은 사람 처럼, 부상당한 와중에도 근접전에서 힘이 엄청났다. 아무리 욕심 없는 사람이지만 그 야망이 언제 생겨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카림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가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일은 없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오전에는 앞으로 뉴욕으로 본사를 옮길 절차를 밟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지만 오후는 좀 여유로웠다. 대면적인 식사자리를 갖기 위해 카림은 넥타이를 바꿨다. 평소에는 제 멋대로 풀어헤치고 있다가 오랜만에 하는 거라 조금 불편했지만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감수해야했다. 한참 넥타이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편한 곳을 찾으려하는데 카림의 사무실을 연 지민이 뚜벅뚜벅 걸어들어왔다.

"좋아. 잘 어울려."
"..."
"식사자리에서는 좀 웃도록 해."

더이상 지민은 웃지 않을 작정인지 카림의 눈까지 피하고 있었다. 카림이 썬글라스를 낀 눈으로 지민을 지그시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나름 앙탈이라고 생각하지. 그의 도발적인 이야기에 지민이 그를 노려봤다. 마치 어린 사자같은 눈빛이었다.






카림이 처음 이 곳에 도착했을 땐, 한국에서 버려져 입양아로 미국으로 흘러들어왔다가 빼돌려진 아이였다. 그것을 숨기기 위해 얼굴을 칭칭 감은 채로 살아야 했지만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은 더이상 그를 한국인이라고 보는 사람이 드물었다. 워낙 오래 전이라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잘 모르고 태어난 적이 없는 사람처럼 인신매매라거나 약탈을 주도하는 몰이꾼부터 조직이 시키는 대로 하는 개처럼 살아오는 게 전부였으니 지금 카림이 시도 때도 없이 싫어하는 '야망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일찍이 자신의 처지와 앞으로의 일들을 방관하는 방관자로만 훈련받아왔고 그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고 한 지역을 이끌어나갈 때 까지 영원히 마살루의 일원이 될 것 처럼 굴었다.

그러나 자신과 함께 흘러들어온 카말과 친형제처럼 지내며 자리를 지켰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건 사랑했던 사람과 그녀의 가족까지 몰살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살른은 빈민촌에서 애 딸린 미혼모였다. 아주 오래 전 이 지역으로 이주할 때 사고를 당해 아이가 생겼지만 그녀는 홀로 아이를 키우며 작은 리어카 하나를 끌고 도시와 촌을 왕복하곤 했다. 카림이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막 지역에 자리잡아 세력의 입지를 다지려고 이곳저곳 안다니는 곳이 없었던 때였다. 본인들이 지나갈 때 마다 고개를 숙이고 최대한 엮이지 않으려는 모습들을 보던 카림은 그녀가 남자들을 막고 작은 사과 하나 때문에 실랑이를 벌이고있는게 보였다.

'물어내. 이걸 가져오려고 내가 얼마나 걸어다녔는지 너희들은 알아?!'
'닥치고 갈길이나 가. 죽여버리기 전에!'
'물어내!'

남자가 살른의 귀싸대기를 후리는 것 까지 확인한 카림은 그녀를 지나쳐갔다. 그냥 흔하지 않은 기가 쎈 여자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운이 나쁘면 그 자리에서 죽겠지. 그리고 지역을 통솔하면서 이것저것 나쁜 일은 전부 주도하고 다녔을 땐 시장 한켠에서 작은 리어카 앞에 앉아 아이를 등에 업고 먼지 내려앉은 채소들을 흐르는 물에 씻고 있는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었다.

'파는 건가?'
'아니요. 그건 땅에 떨어져서 못팔고 대신 토마토 있어요.'
'난 이걸 사고 싶은데.'

그녀는 카림을 이상한 사람 보듯 하더니 제 리어카 옆에 있는 가게를 가리켰다. 저기서 사면 되잖아요. 이건 바닥에 떨어졌다구요. 그녀의 말에 카림이 웃었다. 생각보다 더 자존심이 강하고 신념도 있던 여자였다. 항상 그녀를 찾아갈 때면 왜 또 왔냐는 듯 하는 그 눈빛이 카림은 서서히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살른의 딸은 얼마 못 가 걸음마를 시작하더니 살른은 곧 아이의 허리와 제 손목을 묶어둘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항상 아이에게 더 못해줘서 미안해했고 카림은 이도저도 못하고 있는 그녀에게 찾아가 대신 아이를 봐주곤 했다.

카림은 현실과 동떨어져있는 것 같은 살른을 신기루와도 같은 존재라고 여겼다. 그녀는 행동에 망설임이 없었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고 어디가서 흠씬 맞고 돌아오더라도 더 못때려서 분이 안풀린다는 듯 했다. 오히려 차도르를 두른 그녀의 얼굴이 당당하기까지 했다. 살른은 분명 말끔하게 차려입은 카림이 돈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카림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법이 없었다. 장난스럽게 도와줄까? 하고 물어봐도 그녀는 너보다 지나가는 개가 더 믿음직스럽겠다며 면박을 주곤 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마살루와 힌바의 세력싸움에서 희생되었다. 그녀의 딸을 마지막까지 지키려고 하다 총에 맞아 처잠하게 죽었다. 그녀의 몸은 생각했던 것 보다 총상 뿐 아니라 성적으로도 유린당한듯 한 모습이었다. 카림은 아무것도 모르고 빽빽 숨이 넘어가라 우는 그녀의 딸을 미국으로 보냈다. 원래 자신이 지내야 할 그곳에서 그녀가 못 누린 것 만큼, 더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 하루아침에 세력들이 그의 구역을 쳐들어왔고 인원을 모아 일대를 쓸어버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는 그녀의 죽음으로 한참을 방황했다. 카말이 본인을 뜯어말려도 이 알 수 없는 분노를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명예를 중요시하는 무법지와도 같은 사막에서의 세력싸움은 이골이 나기 시작했고 카림은 자신의 수장을 배신했다. 그리고 그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야망이라고는 했지만 정확하게 주체를 알 수 없는 분노에 대한 반항이었다. 그것을 늘 야망으로 포장하면서 본인에게 암시를 걸었다.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결국 자신과 같은 사람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되어 모순으로 똘똘 뭉친게 현재의 자신이라는 게 카림은 만족했다.

"로이. 넌 네가 너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개소리 짓거리지 말고 내리기나 해."

지민이 카림을 노려봤다. 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카림이 고급 식당으로 들어섰다. 뉴욕 행을 도와준 회사의 오너가 친히 이 곳까지 방문한 자리였다. 카림의 옆에 무표정으로 앉은 지민이 카림과 대화하는 남자를 한 번 쳐다보다가 시선을 바닥으로 향했다. 이렇게 따라다니기만 한다면 일주일은 금방 지나겠지, 하고 생각하려니까 좀 참을 만은 했다. 아직 태형과의 사이도 좋아지지 않았는데 이런 자리에 끌려다닐 시간은 없다고 몇번이나 어필해도 카림은 지민의 요구만 쏙 빼놓고 제 멋대로 지민을 대동하고 다닌다.

한참 사업에 대한 이야기만 나누다가 화제가 지민에게 쏠렸다. 현지인은 아닌 듯 한 지민의 외모가 한 몫 한듯 싶었다. 그러나 지민은 영어를 못알아듣는 척 하며 카림을 계속 쳐다보기만 했다. 카림은 그런 그를 알아챈 듯 웃으면서 영어로 지민을 소개했다. 제 애인입니다. 같이 뉴욕으로 갈 파트너죠. 지민이 테이블 아래로 그의 구두를 꾸욱 짓밟았다. 엄청난 힘에도 불구하고 카림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민에 대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참다 못한 지민이 일어서려 하지 카림은 그의 손을 잡아챘다.

- 커프스.

지민이 제 손등에 손가락으로 쓰여진 단어를 알아차리고 앞에 앚은 오너의 커프스를 응시했다.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의 커프스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러나 동시에 그 속에 무언가가 같이 비춰지는 것을 확인한 지민이 카림을 올려다본다. 그가 자신을 불신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웃는 얼굴로 일관하는 그의 얼굴을 보니 그도 순탄한 생은 아니었다. 아마 저 쪽의 커프스는 카림과 자신의 말을 녹음하는 녹음장치이거나 카메라겠지.

"원하신다면 가이드를 붙여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호텔에서 푹 쉬다가 다시 뉴욕으로 갈 것 같으니까요."

눈으로 남자의 뒷모습을 쫓던 지민이 카림에 옆에서서 그를 올려다봤다. 카림의 알 수 없는 표정이 계속해서 오너를 보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또 변태같은 성격이 발동해서 어떻게 엿을 먹일건지 가늠하고 있는 중인 듯 했다. 평소에도 이렇게 의심받고 그런가? 지민이 묻자 카림이 웃었다. 순진하게 굴지 마. 나도 그런 것 쯤은 없을 것 같아? 그가 썬글라스를 벗어 다리쪽에 있던 칩을 카말에게 전했다. 그럼 서로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거야? 알면 알 수록 더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결국 지민의 관심을 돌리려고 부러 흥미로운 미끼를 던진것이 되니까 지민이 카림을 노려봤다. 뻔뻔하기 짝이 없군.

"오후는 일정이 비어있어. 뭘 하고 싶어?"
"돌아가서 당장이라도 당신이랑 떨어져 있고 싶은데."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지민을 보던 카림이 웃었다. 지리를 잘 몰라서 어린아이처럼 카림의 옆에 딱 붙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게 아기 맹수 같아서 귀여웠다. 하지만 지민은 카림이 그냥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아서 반 쯤 포기한 상태지만 말은 계속해서 카림을 밀어냈다. 카림은 지민의 앞을 걸어가며 물었다. 네가 지금 원한다는 사람. 유스. 찾아줄 수 있어. 그의 말에 지민이 얼굴을 굳히다 이내 피식 웃었다. 나에 대해 다 아는 것 처럼 굴지 마. 그는 자신에게 왔지만 본인 스스로 그를 밀어내고 이 곳으로 도망치듯 왔다. 유스와 함께 있길 원했으면 벌써 함께 있었겠지. 카림이 눈썹을 씰룩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어?"
"...아니야."
"네 눈이 그렇지 않아."

이번에는 지민이 카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눈에서 뭘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림에게 휩쓸리면 안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지민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르자 카림은 조용히 웃으며 지민의 말대로 집으로 향하려 차에 올라탔다. 내일은 바깥 일정이 없으니 장식품처럼 그의 옆에서 지내는 게 전부였다. 말 없이 달리는 차 창밖을 구경하다 카림이 꺼낸 말에 고개를 휙 돌린 지민이 또 인상을 구겼다.

"뉴욕에 와서 꼭 날 찾아."
"그럴 일은 죽어도 없다는 소리 못들었어?"
"아니, 날 찾아올거야. 반드시."

제발 그럴 일이 안 왔으면 좋겠군. 지민이 고개를 젖히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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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Zipd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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