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Poison





"어디로 가는거야."
"..."

포박당한 손과 발을 내려다보던 지민이 물었다. 부하 네다섯은 달려들어 발버둥치는 지민을 묶어놓고 번쩍 들어올려 차에 태운 무자히드가 꽤 난폭한 운전을 하며 시내한복판을 달렸다. 시간이 지나 주변 소음이 적어진 한적한 길을 달리기 시작했지만 아직 카림이 뒤쫓아온다는 사실 때문인지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뒷자석에 아무렇게나 누워있던 지민이 몸을 돌리려고 해도 꽤나 질긴 로프가 산악용 차 차체와 함께 묶여있어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뒷자석에 문이 없어 짐짝처럼 실려가는 꼴이 되어버린 탓인지 차체와 머리가 부딪혀 인상을 찡그렸다.

"그냥 떠나갈 사람 치고는 카림이 진득하게 따라붙는군."

한 시간은 족히 넘었을 것 같은 시간이 지났다. 무자히드가 차 문을 열고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비명소리인지 뭔지 이상한 괴성이 가득한 건물이 하늘위로 우뚝 서 있는 돔(Doom) 형식의 광장이 지민을 집어삼킬 듯 했다. 예전에 봤던 고전영화에 본 버려진 성 같기도 했다. 한 가운데에 멈춰선 차에 널부러져있는 꼴이라. 별구경이라도 하는 것 같네. 언제 이렇게 낭만적이었을까, 지민이 눈을 감았다.

"반항하면 팔 하나정돈 없앨 수 있으니까 알아서 따라와."
"..."

이런 인적드문 벌판에 도망쳐 숨을 장소도 없다. 지민의 발을 풀어준 무자히드가 트렁크의 총을 들어 지민의 뒷목에 겨냥하며 섰다. 제 발로 걸어들어가라는 의미였다. 지민이 이상한 건물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가자 그가 뒤에 거리를 두고 서서 걷기 시작했다.안으로 들어설수록 이상한 비명소리와 웃는소리, 화내는 소리가 뒤엉켜 있었고 계단을 올라 복도에 진입하는 순간 멈춰섰다. 지민은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나란히 수족관마냥 정렬되어있는 철창속에 갖혀있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요란한 소음에 비해 비교적 조용한 수십개의 눈이 지민을 이리저리 훑어내려갔다. 발가벗고 있는 여인들과 남자들이 뒤엉켜서는 지민을 바라보고 있으니 자신도 발가벗겨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지옥이란 말이 이 곳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할 만큼 악취와 함께 바닥에는 온갖 오물들이 함께였다. 전염병이 돌 것만 같은 환경에 무자히드를 돌아보자 그는 그들을 외면한다는 듯 지민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잘도 이런 주인을 섬기는군. 지민이 웃자 무자히드의 차가은 총구가 뒷목에 닿았다.

얼굴을 굳히고 천천히 걸어들어가자 그 눈들이 함께 따라왔다. 그들 중 몇몇은 도저히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형상을 하고 있어 간담이 서늘하기도 했다. 몸 한쪽이 녹아내리듯 없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한참을 비슷한 복도가 계속 됐다. 후각은 이미 익숙해진 탓에 별다른 자극이 없었지만 가면 갈 수록 처참한 모습에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 전신이 바들바들 떨릴 지경이었다. 멀리서 보이는 복도가 휘어져있는 것을 보니 돔형식의 건물을 돌아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끝자락에는 큰 문이 있었는데 지민이 그것을 보고 무자히드를 뒤돌아보자 그는 턱짓으로 열고 들어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전부터 계속 이상한 소음들은 죄다 이 방에서 부터 울려나오는 것 같다는 느낌이 맞다는 듯 온갖 소음들이 문 앞에 있는 지민의 귀를 무자비하게 때렸다. 양쪽 문을 밀자 크기에 비해 비교적 쉽게 문이 열렸다.

"누구?"

지민이 걸어들어가자 소란스럽던 소음이 한 남자의 목소리로 인해 뚝 끊겼다. 그것은 마치 지옥의 지배자같은 느낌이었다. 지민이 인상을 찌푸리며 여러 여인들과 발가벗고 뒹굴고 있는 한 나이든 중년의 남자를 쳐다봤다. 그는 온갖 장신구를 귀와 목, 얼굴, 손목에 주렁주렁 매달고 성기를 잔뜩 세우고 있는 흉측한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아침에 마살루에서 먹었던 스프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그는 맨 몸으로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섰다. 여인들이 그의 움직임에 맞춰 일사분란하게 뒤로 물러서서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고 있었다. 그를 둘러싼 무자히드와도 비슷한 수십의 남자들이 그를 호위하듯 둘러싼 모습이 우습기도 한 모습이었다.

그래, 무자히드가 드디어 데리고 왔나보군. 그는 지민에게 다가와 그의 얼굴과 목선 그리고 허리 아래를 진득한 시선으로 훑었다. 잡아먹힐 것 같은 시선이었다. 불쾌한 기색을 숨기고 눈을 피하니 그가 지민을 한참 응시하더니 씨익 웃었다. 금니가 두어 개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 웃음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림의 연인이라고?"
"..."

대답해주고 싶진 않았다. 오기였을까 싶었지만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저들끼리 오해하고 생각할테니 판단할 여지를 주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소름끼치는 눈으로 쳐다보는 그 눈이 너무 짜증이 치밀어 오르다 못해 당장이라도 주먹으로 갈겨버리고 싶었다. 천천히 걸어오며 영어를 쓰는 걸 보니 차라리 그가 영어를 몰라서 제가 못알아듣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포에나리에 온 걸 환영해. 내 파라다이스."

포에나리? 레드 카펫을 밟고 선 그는 한쪽 구석에 채찍질에 죽었는지 모를 인간들이 겹겹이 쌓여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는 꼴을 보고 사람들을 시켜 치우게 했다. 그 빌어먹을 놈이 애인을 다 만들어놓다니 이상하군. 그가 중얼거리며 지민을 지나쳐 벽에 걸린 가운을 걸쳐입었다. 허리에 있는 끈을 매듭지으며 다시 지민에게로 다가온 그는 꼭 광대같이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은 그의 시녀들에게 저녁을 준비하라 명했다. 힌바가 서툰 영어로 물었다. 궁금한 건? 내가 무자히드에게 마살루의 귀하신 몸이 묻거든 친절하게 대답하라고 해뒀는데 더 묻고 싶은 게 있나?

없어. 짧은 대답에 푸하하 웃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짱이 있어서 카림이 옆에 두는 것 같다면서 호탕하게 웃으며 방 안에 있는 계단을 올랐다. 지민도 따라오라는 의미인듯 뒤를 돌아선 그가 손짓하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옮기며 공격할 타이밍을 찾았지만 계속해서 샷건을 겨누고있는 무자히드 때문인지 쉽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거지?"
"파티는 지금부터인데 즐겨야지."

지민이 눈을 찌푸리고 기분이 나쁘다는 듯 뒤에 선 무자히드와 힌바를 노려봤다. 무대 위에서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집단 성교를 하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행위들의 이유도 모른 채 방관자 노릇만 하고 있으니 거북함은 제 몫이었다. 힌바는 조직일에 아예 관심이 없는 든 포에나리 전체를 탐욕의 집합체로 만들어 놓았다. 설마 그 옆에 있는 식탁에 앉아있으라는 건지. 지민이 거의 끌려가듯 그 옆으로 다가서자 먼저 앉은 힌바가 지민을 보고 손짓했다. 마살루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내 성의야. 그가 깔깔대며 웃자 누군가가 음식을 내왔다. 호화스러운 빛깔의 장식과 두툼한 살코기가 기름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 먹을 수 있을리가. 힌바는 고고하게 앉아 움직이지도 않고 썰어서 접시에 담아주는 것을 족족 받아먹었다. 지민의 접시에도 그와 비슷한 고기 한 점이 올라왔지만 거북한 모습으로 내려다볼 뿐 식기조차 들지 않았다.

내가 약이라도 탔을까봐 그래? 힌바가 주스를 먹고는 웃음지었다. 약을 먹이려면 억지로라도 먹일 수 있지. 지민도 고작 이런곳에 약을 타지는 않을거라 예상했지만 집단성교가 한창인 곳에서의 식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거부감이 밀려왔다.

"남자만 취향인건가?"
"..."
"미안미안, 내가 몰라봤군."

그 흰 얼굴이 사내라고 생각치도 못하게 만들거든. 그의 말에 지민이 기분이 나쁜듯 인상을 찌푸렸다. 힌바는 웃으며 식사를 계속했다.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니 지민은 먹지 않는 대신 천장을 살피다 창문 하나 없는 내부를 살폈다. 오로지 천장 위 조명으로 유지하는 빛은 지민이 접시라도 날려 깨버렸을 경우 암전상태가 될 게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조명을 깨버리면 덩달아 자신도 시야에 불편함이 생기니 신중하게 생각해야 했다. 혹시라도 불가피한 일이 생겼을 때 최후 수단으로 써야 한다.지민은 목 뒤의 뻐근함을 느끼며 목을 이리저리 젖혔다. 여전히 집단성교의 질척한 소음들은 귓가를 간지럽히며 지민의 비위를 좋지 않게 했다. 아마 차에 구겨져있을 때 근육이 놀란 것 같은데 신경이 쓰여서 짜증이 올라왔다.

"아, 맞아."
"..."
"의자에 독이 뭍어있긴 해. 찔린 기분도 못느끼게 아주 작은 바늘로 준비했지. 듣자하니 움직임이 어디서 교육받은 것 같다길래."
"빌어먹을..."

지민이 놀라 의자에 올려있던 팔을 치웠다. 팔꿈치부분이 반짝이더니 작은 바늘이 자신의 팔꿈치를 찌르고 있었다는 듯 날카롭게 서 있었다. 자세히 보이지 않으면 모를 만한 아주 작은 바늘. 지민이 뒷목이 뻐근한 게 이것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고 생각했다.










- 총 내려놔 카림.
- 너희는 날 뉴욕으로 순순히 보내줬어야 했어.
- 빌어먹을 놈.

벌써 절반이 시체밭인 힌바의 본거지에 우뚝 선 카림이 무자히드를 찾았다. 마살루의 본 주인이 죽자 힌바로 발을 돌렸던 배신자. 아마 그가 데리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벌써 어디 뒤로 빼돌리지는 않았겠지. 카림이 발을 질질 끌며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직접 싸운 탓에 발에 문제가 생긴 듯 했다. 그 뒤를 불안한 눈빛으로 쫓는 카말의 저격수가 그에게 다가오는 놈들이 있으면 즉시 정수리에 총알을 박아버렸다. 저격총에 맞은 사람들의 비명소리에 넓은 공터가 가득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카림은 긴장감은 전혀 없는 표정이라 행동대장인 싸미가 카림과 카말보다 더 앞서 힌바의 본거지를 휘젓고 다녔는지 온 몸이 피투성이인채로 다가왔다. 그러나 카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그라면 잠자코 있다거나 제 힘으로 도망쳐나올 궁리를 할테니까. 그러나 시간이 한참 지나도 지민은 나올 생각을 안 했다.

무자히드!!!! 카말이 소리쳐도 그가 보이지 않았다. 벌써 도망쳤다는 확신이 들자 카림이 더이상 걷지 않고 되돌아가려는듯 발을 돌렸다. 당장 힌바의 모든 위치를 찾아내서 전부 쓸어버려. 마살루의 모든 인원이 나가도 좋다. 카림이 등을 돌려 사라지자 정면에서 이를 갈고 있던 놈들이 싸미의 칼에 하나 씩 천천히 바닥으로 처박혔다.

"일단 마살루로 돌아가서 치료받으세요."
"아니 그럴거 없어. 차에서 대기하다가 발견하면 즉시 출발하도록 하지."

카림이 차에 올라타자 다른 차로 힌바의 두번 째 본거지로 이동한 파이와 루크쪽에서 연락이 왔다. 그쪽에도 없다는데 도대체 어디로갔는지 답답할 노릇이었다. 카림의 발을 한참 진득하게 쳐다보던 카말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몰라 가져왔던 응급처치 도구를 떠올렸다.

"알겠습니다."
"힌바 본체를 찾는 데에 주력해."

차로 돌아가 초조하게 앉아 있으니 카말이 구급상자를 꺼내 큰 차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카림의 정장바지를 들어올렸다. 그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카말을 내려다보자 그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힌바가 아무리 세력이 약해도 저희보다 인원이 배는 많습니다. 앞으로 계속 싸우시려면 이 정도 상처도 살피는 게 맞죠. 카말의 말에 카림이 신경쓰지 말라 입을 열던 것을 닫았다.

"처음 만났던 날 기억 나십니까?"
"..."
"먼저 마살루로 끌려온 저는 그 날도 상관에게 두드려맞고 보초를 서고 있었죠."
"그래. 이제야 기억이 나는군."
"같은 한국에서 왔다고 해서 항상 쫓아다녔던거 기억 나십니까? 아마 제가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동양인의 외모에 신경만 썼지 같은 한국인이라는 건 지금껏 생각도 못한 카림이 눈썹을 씰룩이며 응시했다.

"말 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카림이 처음 마살루에 왔을 때 나이보다 더 어렸을 적에 먼저 마살루에 온 카말은 모국의 언어가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서툴게 몇 단어 정도 한국어를 하는 카림과 달리 생각하는 방식 전부 이 곳의 빛을 띄고 있어 아마 의식하고 있지 않았던 탓인게 분명했다. 그리고 카말이 언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던가. 아마 카림처럼 카말도 또한 제 모국에 대한 그리움이 있을 것이었다. 아마 지민에게 흥미를 가진 카림을 보고 그가 더이상 언급을 하지 않았던 건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리라.

붕대로 그의 발을 고정시켜주며 카말이 웃었다. 제 한국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마살루님이 처음 이 곳에 왔을 때 손목에 있던 이름을 기억합니다.

"남준. 김, 남준."
"김남준?"
"네."

이름은 그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카림은 자신의 이름을 잊었다. 마살루의 우두머리는 그에게 직접 '카림'이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그가 들고온 모든 것, 입고 있던 옷들까지도 전부 태워버렸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말했다. 넌 이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라고. 그 발음을 기억해두었다가 이 곳의 말을 익히고 나서야 이해했지만 마법처럼 카림은 한국에서의 모든 것을 잊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런데 카말은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준의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이름을 계속해서 입안에서 굴려대며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겨우 이름 세 글자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겨우 한국에서 버림받아 이곳으로 빼돌려진 주제에 그 이름에서 뒤늦은 향수를 느꼈다. 사막에 스며든 피가 낭자된 길을 걸으면서 가당치도 않은 감정이었다. 그래도 그 것을 알면서도 계속 찾게 된다.

카림이 물었다. 왜 네 이름이 아닌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 미련하다는 말투에 카말이 웃었다. 제 주인의 이름은 제 정체성이기도 하니까요. 카말은 한치 거짓도 없는 헌신을 보이며 카말에게 고개를 숙였다.

"피셰 살른."
"..."
"뉴욕에 도착하시면 그녀를 찾아가세요."

남준이 오랜만에 언급된 그녀의 이름에 주먹을 쥐었다. 그녀의 이름을 간직한 채 미국에 입양된 딸의 이름이었다.










-










"싫어!"

서서히 약이 퍼져 몸이 말이듣지 않는 지민이 발버둥 쳤다. 의자에 앉혀진 그대로 눈 앞에 사이코틱한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어야한다는 게 헛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신경들이 서서히 잠식되며 온 몸이 뻐근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옆에 앉아있는 힌바의 팔뚝을 쥐어잡았다. 그것도 겨우 쥘 정였다. 당장 그만해. 당장. 애원하듯 말하는 그를 보던 힌바는 한 번 호탕하게 웃더니 지민의 고개를 쥐었다. 특별취급도 이런 특별취급이 없지, 무자히드조차도 누려보지 않은 호사야. 그가 지민의 입을 쓸었다. 그 감촉이 너무 역겨워서 눈을 감고 고개를 간신히 돌렸다.

지민의 눈 앞에 창에 꽂힌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하며 발악했다. 그들 중에는 이미 정신을 잃었는지 죽었는지 모를 사람도 있었고 게거품을 물며 눈을 뒤집어 깐 사람들이 있었다. 지민이 눈을 감고 피할 수록 그 인원이 늘어났다. 철창안에 갖혀있는 사람들이 살려달라 빌었다. 그 모든 광경들이 슬로우 모션처럼 각인된다. 덜덜 떨리는 손이 힘이 풀려 쓰러졌다. 이제 머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곳이 마취가 된 듯한 감각이 밀려왔다. 의식적으로 눈을 깜빡이며 그들을 보지 않으려 했지만 그 비명소리와 괴성에 천천히 잠식되었다. 지옥의 불에 빠진 사람들을 눈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포에...나...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지만 그런건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무자히드는 아직도 지민의 머리통을 샷건으로 조준중이었고 힌바는 그 끔찍한 광경을 감상하며 웃는 중이었다.

"탄생과 죽음이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믿겨지나?"
"..."
"이건 세상 그 누구도 못할 일이야."

그들의 뒤에서는 계속해서 집단 성교가 진행중이었다. 이런 사이코적인 취향에 맞장구쳐줄 의향이 없어 지민이 퉷, 하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울며 빌던 사람들이 기겁을 하며 구석으로 도망쳐 벌벌 떨었다. 씨익 웃은 힌바가 제 뺨에 붙은 침을 가운 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무엇인가 힌바의 성미를 자극했다는 것이었지만 그는 천천히 지민을 살펴보다 다시 그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지민의 몸이 축 쳐졌다. 어디에 던져넣을까?

- 쾅!!

힌바의 눈썹이 꿈틀댔다. 벌써 들킨건가?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나가고 있는데 위태로운 절벽에 위치한 포에나리가 들킬 이유는 없었다. 무자히드가 지민의 감긴 눈을 확인하고는 총을 들고 문을 나섰다. 유일하게 반대편 복도에 하나 있는 창문으로 밖을 확인하니 마살루쪽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자히드는 눈썹을 찌푸리며 시녀에게 문을 열으라 지시했다. 꽤 골치아픈 사람임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단숨에 포에나리의 상단까지 올라왔다. 그의 가죽 바지는 모래투성이었고 자켓은 이리저리 찢겨 잘못보면 걸인이라고 할 만큼 이상한 차림이었다. 차를 살 돈으로 옷이나 사지 그래. 무자히드가 중얼거리자 남자는 욕을 뱉으면서 무자히드의 미간에 총을 쏘는 시늉을 했다. 내가 이 바닥 얼마 안됐지만 너보다는 더 높아. 말 조심 해. 어금니를 물어 짓이겨진 발음에는 경고가 뭍어나왔다.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서자 자켓을 바로잡은 그가 포에나리의 연회장 입구로 들어섰다.

"끝냈어. 마살루 녀석들은 갈수록 힘들어."
"문은 가만히 내버려두지 그래?"
"그럼 문지기 하나정돈 아래 내려와 있던가."

그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광경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자기가 신세지고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저 광경은 차마 인간이 할 짓이라고는 할 게 못됐다. 눈을 굴려 다른 흥미거리를 찾아보려다가 흰 얼굴의 어수룩한 소년이 금빛 의자에 축 쳐져있는 것이 보였다. 콧대나 눈꼬리는 날카롭지 않으나 분위기는 오래된 고생이 뭍어나왔다. 동그란 이마를 지나 작은 입술 끝까지. 동양인 특유의 인상이 그의 뇌리에 천천히 박혀들어갔다. 이번 전리품 치고는 오묘했다. 역시 마살루의 전리품은 다르군.

"한 놈은 살아 남았는데 뭐, 괜찮은 것 같아."
"..."
"혀와 사지의 힘줄을 잘랐거든."
"저런."

가죽바지를 짓이기며 돌아선 그는 벽에 붙어있는 의자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서도 소년을 향한 끝없는 눈길은 계속됐다. 오묘한게 향수를 느끼게 하는 마스크임은 틀림이 없는데 벌써 죽은 건지, 정신을 잃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계속해서 시선을 두는 것이 느껴졌는지 힌바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이 아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마살루의 연인이야."
"뭐?"
"마살루가 항상 데리고 다니던 연인을 무자히드가 데려왔지."

네 녀석은 죽여서 데려올 게 뻔하니까. 힌바가 웃자 기가 차다는듯 웃었다. 마살루의 연인이라고해서 내가 살려둘 것 같아? 남자가 묻자 힌바는 고개를 저었다. 흥분은 그만 해. 내가 지금 기분이 좋아서 너에게 좋은 걸 주려고 하니까. 힌바의 말에 남자의 눈썹이 꿈틀했다. 구미가 당긴다는 표정이었다. 역시 표정이 솔직하다며 폭소한 힌바가 시녀들을 불러와 소년을 일어서게 했다. 피는 고여있지 않지만 시녀들에 의해 들어올려진 몸이 축 쳐져 있었다.

가져도 좋아. 무슨 뜻이냐는 듯 힌바를 쳐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턱짓으로 소년을 가르켰다. 난 순종적인 게 좋거든. 내 발 아래에서 빌 때까지 천천히 길들이고 싶었는데 특별히 주는거야. 소년을 물건다루듯 하는 힌바가 가운을 벗었다. 그의 몸이 드러나며 성이 난 성기가 하늘로 우뚝 솟아있었다. 이상한 성적 패티시가 빛을 발했다. 집단성교가 이루어지는 그 속에서 입으로 봉사를 받으며 남자에게 손짓했다. 어서 그 소년을 데리고 꺼지라는 소리였다. 그래봤자 이 포에나리의 수많은 방들 중 하나였지만 남자는 무시하며 그의 방으로 향했다.

"왜 얘를 데려온거야? 어?"
"쏘,쏘리..."

겨우 영어로 미안하다는 말만 내뱉는 시녀에게 별 말 하지 못하고 그들이 데리고 온 소년을 놓고 사라지는 걸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가죽바지에 스며든 피들을 처리하고 쉬려고 했지만 소년이 축 쳐진 채로 침대 가운데에 죽은 듯 있었다. 설마 죽은 사람일까봐 그를 흔들어보기도 하고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대봤더니 간간히 숨을 쉬는 걸 확인하고는 안도했다. 이상한 짐짝이었다. 그냥 다시 나가버릴까 하다가도 소년의 특이한 외모와 분위기에 매료돼서 어느샌가 그의 옆에 앉아 멍하니 내려다보던 자신에 놀랐다. 그가 깨어나면 어떤 눈동자를 가졌으며 어떤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기대어 앉은 팔이 소년의 팔꿈치 아래에 있었는데, 축축해서 손을 확인해보니 피가 베어나오고 있었다.

팔꿈치에 작은 상처같은 게 나 있었다. 꽤 많은 피가 그의 옷을 적셔져 있길래 그의 옷을 찢어내고 상처를 살폈다. 남자의 익숙한 손이 방 안에서 치료키트를 찾아냈다.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으나 보기에 꽤나 피를 흘려서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그는 오래 소년의 팔에 머물러 있는 듯 하다가 갑자기 제 팔뚝을 잡아오는 힘에 의해 고개를 쳐들었다. 독에 면역이 있다기보다는 엄청난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 같았다.

"하지...마."
"내 침대가 더러워지잖아."
"..."
"독은 3일이면 서서히 빠져. 부작용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부작용으로 죽을 수도. 처음 제가 가져온 독을 안전하게 거처할 수 있는 댓가로 건냈더니 이런 데에 남발하는 걸 보면 한숨부터 나오지만 어찌됐건 철옹성같은 성에서 안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어찌나 다행인지, 남자는 몸을 쭉 빼며 물러섰다. 소년을 건들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지만 힘 없이 딸려오는 팔이 얼마나 괴로울지는 가늠할 수 있었다.

"바로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이유가 있겠지."

이리저리 지민을 살피며 그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던 남자는 이내 피식 웃었다. 힌바가 새로운 눈을 뜬 것 같기도 한 흥미로운 변화였다. 지민이 약에 취해 온 몸을 떨며 괴로워하자 남자는 그가 누워있기 편하게 자세를 바꿔주며 자리에서 물러섰다. 그렇게 움직이려 할 수록 근육에 무리가 와서 나중에 영영 못 쓰게 되는 수가 있다고 하니까 그제서야 얌전하게 눈만 뜨고 누워있다. 자기가 남 앞에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만 있는게 꽤 자존심이 상할 일인지 아직도 분노는 그대로였다.

"마살루가 아마 이 곳을 찾고 있겠지?"
"..."
"이제 여기도 안전하진 않겠군."

마살루는 생각보다 뿌리깊게 내려있으니까. 힌바에게 잡히지 않았다면 아마 마살루 쪽에 있어도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사업을 확장해 미국으로 이주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용해먹기 좋은 방패였을 것이다. 남자는 마살루의 중심축 격인 지민을 바라봤다. 멍한 눈동자가 완전하게 검정색을 띄고 있어 인형같기도 했다. 독의 부작용이 상당한 건 신경쓰지 않는다. 어짜피 마살루의 연인이라고 해도 그의 흥분을 돋궈줄 발판으로 죽을 운명이니 깊게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불편하다는 표정으로 가운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간부들을 잡아왔습니다."
"..."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여러명의 아랍인들이 분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남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뼛속까지 깊게 힌바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들의 표정에 그들 중 한사람의 정수리에 대고 있던 권총을 치운 남준이 씨익 웃으며 고개짓 하자 카말이 뒤이어 여러 명의 사람들을 데려왔다. 마살루를 얕보면 안 되지. 남준이 말하자 그들이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데려와."

남준이 어린 꼬마에게 권총을 들이밀자 그 옆에있던 노인이 악을 쓰며 남자아이를 감싸안았다. 태어나자마자 어디로 사라지고 없던 아버지를 대신해 죽을 운명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아마 죽는다는 것이 뭔지는 알까?  분위기가 주는 공포감에 자기가 저 총구에 아득해질 것을 본능적으로 예상할 뿐 죽는 이유를 모르는 아들은 기억에도 희미한 아버지를 찾아 그 큰 눈을 두리번 거릴 뿐이었다.

"마살루를 없애버리는 것이 너희의 명예니 이 땅에서 사라져주겠다는데 왜 자꾸 건드려."
"그냥 차라리 날 죽여...!"

탕! 큰 공터에 째질듯한 화약소리가 가득했다. 남자가 벌벌떨며 웅크렸던 고개를 들자 제 옆에 피를 흘리며 깔끔하게 숨이 끊겨있는 동료 간부를 쳐다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정신이 이 곳에 팔려 있더라도 이들 중 분명 제 목숨이 아깝다고 인식하는 사람하나는 있을 것이니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남준은 제가 나쁜사람이 되어버리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의 나쁜사람이라는 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건지 여기있는 사람들이 정상의 범주에서 한참이고 어긋나는 사람들인데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힌바는 그를 데려갔다. 아직 제대로 얘기도 나눠본 적도 없는 지민을 데려가서 마살루의 신분으로 죽여버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이성같은 건 멀리 나가떨어져버렸을지도. 그는 화약냄새가 가득한 권총을 카말에게 건냈다. 전부 죽여버려.

"우리는 몰라! 알고 싶으면 '알지말'에 가서 알아봐!"
"..."
"...내 이름을 대고 물어보면 알려줄거야."

남준의 사람들은 힌바를 오히려 그동안 필요악으로 여기고 건들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큼 그들을 없애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고, 그 속도도 뛰어났다. 다른 곳에서 있다 합류한 파이와 루크가 남준이 저질러놓은 광경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별 미친놈 다 보겠군.

"이름은?"
"...라마니 알 하싼"

카말이 간부의 이름을 대며 물은 곳은 포에나리성이라고 했다. 북동부에 있는 유일한 성이라 적어도 두어시간은 걸릴것이라 했다. 이제 이들은  어떻게 할까요? 카말이 묻자 남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마음대로, 하고는 차에 올라탔다.

"포에나리 성에는 무자히드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용병들이 얼마든지 많을거야. 힌바가 완전 머저리는 아니거든."
"...그 포에나리는 아니겠지?"
"맞아."

뭐라고? 태형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루크는 영문도 모른 채 눈만 도르륵 돌리고 있었다.

"힌바가 오래 전부터 난민을 잡아갔다더군. 예전 마살루도 그러했지. 마살루는 납치해서 본인들 머리수를 늘렸고, 힌바는..."
"..."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어."

그렇다고해도 로이는 반드시 내가 살려야 해. 그가 쉽게 죽을 리 없어.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길이라 차를 갈아탄 세 명이 다시 인적드문 국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카말과 카림은 관대함과 완전무결함의 의미가 있는 이름이었지만 카말은 완전하지 못했고 카림은 관대하지 못했다. 아마 서로에게 없는 것으로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마음대로 처리해버리라고 해도 마살루로 흡수시킬거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남준은 창 밖을 보며 로이에게 한 없이 관대해지는 자신을 생각한다. 그는 자기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전부 내려놓고싶다는 표정이 오히려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여기 모든 사람이 위태로운 로이에게 전부 홀리듯 자리하고 있는 것 처럼 대가없이 그를 지킨다. 불가항력이라고 생각했다.

루크가 먼저 절벽 위 포에나리성을 확인했다. 그도 잘 아는 드라큘라백작이 머물던 성 이름이 포에나리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지만 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름만 포에나리일지, 아니면 백작이 만든 지옥일지.

해가 지고 있었다. 열기를 머금던 사막이 언제그랬냐는 듯 차게 식기 시작했다. 큰 성벽을 사이에 두고 차에서 내린 마살루들이 성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들어갈 것 처럼 버티고 서 있으니 밖을 보고 있던 힌바의 조직원들이 총을 들고 버티고 있었다. 서로 총을 겨누는 대치상황에 남준이 조용히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싸미."

싸미의 칼부림에 성 위에있던 힌바의 조직원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마살루에 들어오기 직전 어디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살상무기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손목 시계를 바라보며 서 있자 힌바가 마살루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남준 바로 앞의 마살루의 조직원이 쓰러지자 그의 눈썹을 꿈틀댔다.

"공격해."

조직원들이 성벽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힌바도 갈데까지 갔다더군. 젠장. 알지말에서 여자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었다. 지금 힌바를 없애버리면 분명 이들같은 조직이 다시 생겨나 알지말같은 창녀 촌이 그곳에 자금줄을 만들 게 분명했지만 상관 없었다. 살아남기 위한 방법중에 하나였으니까. 그들만의 필요악의 정점에 선 남준이 웃었다.










-










"다가오지 마."
"로이 왜 그래."
"오지...마."

석진이 한 발작 다가왔다. 반대로 한 발작 멀어진 지민이 끙끙거리며 눈가를 손등으로 꾹꾹 눌렀다. 한국어 공부하겠다고 어눌한 발음으로 형형 거릴 땐 언제고 지금은 처음봤던 그 때로 돌아가버렸다. 고개를 갸웃하며 더 다가선 석진이 아예 도망가버리려는 지민의 손목을 잡아버렸다. 좋아하는 밴드 공연을 가겠다고 친구들끼리 돈을 모아 비행기 티켓까지 구해 놨으면서 며칠 전 부터 석진에게 형이랑 떨어지기 싫다고 칭얼거리던게 생각났다. 왜, 또 나랑 떨어지기 싫어? 하고 물어오자 지민이 석진의 눈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게 아니라,"
"공연 끝나고 돌아오면 하고싶은 말이 있어."
"아니, 나는..."
"진짜 중요한 말이니까 지금처럼 도망가려고 하지 말고. 알았지?"

이제는 느낄 수 없었던 한국에 대한 향수를 석진을 통해서 느꼈다는 게 너무 벅찼다. 서로가 좋은 기억이 아니었지만 지민은 그에게서 듣는 정확한 한국발음이 좋았다. 엄마 아빠도 그랬는데. 한국말도 영어도 어눌하다고 친구들이 놀리면 괜히 어른스럽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체격이 작고 아이같은 외모에 게이같다고 조롱했던 놈들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그가 좋았다. 그 감정이 통제할 수 없을만큼 커져서 그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얼굴에 몰린 열기 때문에 정신을 못차리는게 영락없는 어린애같아서 보여주기가 싫다. 석진은 이만큼이나 자라서 남자가 되어가는데 자기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라서.

더럽다고 할까? 그는 한국에서 오래 살았으니까 아마 동성애 포비아일 수도 있었다. 인터넷에 쳐봤는데 한국은 그런 사람들이 많대. 그런데 나, 유스를 좋아하나봐. 석진이형이 좋아. 얼마 전 조금 배웠던 불어로 표현해도 모자랄만큼 좋았다. 갑자기 다가온 혼란스러운 감정을 추스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한 마디도 못하고 그를 보낼 준비부터 했다. 어짜피 그는 게이도 아니고 쎈 척 하는 남자아이와 키스하는 취미도 없을거다.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이 상대방에게 짓밟히는 게 가장 싫었다.

"도착해서 집으로 꼭 전화하고."
"응..."
"가서 제이슨이랑 적당히 마셔. 안 마시면 더 좋고."
"응..."

멍청하게 석진의 턱만 쳐다보고 선 지민이 고개만 끄덕였다. 분명히 그냥 걱정돼서 하는 말일텐데 멋대로 해석 하고 있는 자신이 생소해서 정신이 저 멀리로 날아가버렸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석진이 지민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쭉 밀었다. 시야가 가려진 채로 키가 큰 석진 쪽으로 턱을 치켜들게 되자 바둥거리며 반사적으로 석진의 허리춤을 꼬옥 잡았다. 유스?

"잘 다녀와."

입에 닿았다 떨어진 온기가 금새 차갑게 식었다. 방금 연인같았다.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을거야. 맞지? 지민이 속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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