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님 쌈 흡입하고 회사들어가서 일할것같쟈나여



1 : 끝내면 퇴근해요.

호석은 당황하지 않았다. 소시오패스라는 소리도 참고 견딘 난데, 내가 이까짓 소리로 동요할 줄 알아?

"시바알...!!!!"

당황하지, 않고. 앞에 있는 서류를 집어던졌다. 민대리 그 자식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이딴 잡일이나 시키면서 지는 칼퇴근을 했다. 난 솔직히 같은 팀이면 눈길이라도 한 번 주고 갈 줄 알았는데 김태형이랑 실실 쪼개면서 나서는 모습을 보니 배알이 꼴려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민윤기가 회사에서 내 동기랑 히히덕 거리는 시간에 저는 복합기에 A4나 채워넣고 민윤기 던져주는 차트를 항목별로 정리하는것도 모자라서 내일 회의 준비도 전-부 해야했다. 솔직히 제가 영업팀 막내라 이런 일은 군말없이 할걸 미리 알고 있으면서도 은근히 사람 성질 돋구는 말을 필터링 해서 듣지를 못했다. 아니 근데 왜 내가 필터링해야해? 저 민대리는 나 엿먹으라고 한 게 분명한데???!!

'미안한데, 이것도 좀 마저하고 끝나면 퇴근해요.'

즉 이거 다 안끝내면 퇴근할 생각은 하지도 말란 거라는 소리다. 집에가서 캔맥주나 까서 못봤던 분데스리가나 시청할 예정이었다. 민대리만 아니었으면 내가 지금쯤 소파에서...!

"어후...!씹."
"뭐하십니까?"
"아, 하하 아닙니다."

민윤기대리 엉덩이를 걷어차는 시늉을 하느라 뒤로 넘겼던 머리가 앞으로 죄다 넘어왔다. 자, 심호흡. 후후 하고. 호석은 지나가던 남준에게 웃어줬다. 그는 호석에게 뭐 저런 병신을 봤나 하는 눈으로 그를 흘기며 지나갔다. 호석은 남준이 어떤 식으로 이상하게 생각하든 신경쓸 생각 없었다. 남준씨는 남준씨 나름대로 김대리에게 시달리고 있을테니 배려해주는거라며 혼자 만족했다.

퇴근하기 전 호석은 마지막으로 휴지통을 비우며 난 역시 영업3팀의 인재야. 하고는 뿌듯했다. 이런 잡일 내가 안하면 누가 해? 민윤기. 요르단사업으로 한건 크게 했다고 으스대지 말란말야. 쯔증는드그!

"남준씨? 우리 맥주한잔?"
"아뇨. 싫습니다."
"김대리님이 시킨거 내일해도 되잖아?"

김대리가 시켰을 게 뻔한 노란 상철에 묶여있는 서류를 눈으로 훑던 남준이 심기가 불편한 듯 한숨을 쉬었다. 방금전에는 누구 씹으면서 허공에 발길질까지 했던 사람이 지금 앞에서 맥주한잔 하자고 하는 사람이랑 동일인물 맞습니까? 남준의 말에 쩝, 하고 입을 다문 호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성실하게 다 끝마치고 퇴근하십쇼. 전 이만 가보겠슴다.

저거저거, 김대리 좋아하나? 왜저렇게 열심히해. 투명한 유리문 하나 건너편으로 보이는 남준의 진지한 표정에 호석은 괜히 제가 할 일도 다 안마치고 도망가는 뺀질 사원인 것 같아서 기분이 좀 꾸질꾸질 했다. 저 워커홀릭 종자들. 유흥은 하나도 모르는 쫌생이들. 괜히 김대리와 남준을 싸잡으며 곱씹은 호석이 어둠속에 환한 빛으로 다가온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2 : 인맥쓰레기

"휴지통 정호석씨가 비웠습니까?"
"아, 예 그게, 보이길래 하하. 깨끗하게 치웠습니다."
"자랑입니까?"
"예?"
"휴지통은 청소하는 분들이 치워주시는 걸로 충분합니다만 정호석씨는 이런 거 할 시간에 복도에 떨어트린 서류나 제대로 챙기시지 그러셨습니까. 제가 잡일 조금 시킨다고 휴지통까지 비우라고 말한 적 있습니까?"

호석은 제 자리에 올려진 발자국찍힌 서류를 한 번, 잔뜩 무시하는 투의 민대리를 한 번 번갈아 쳐다봤다. 동시에 옆 자원팀에서 고개를 쭉 빼고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곤 얼굴을 숙였다. 민대리가 아니라 민머리나 돼버려라...부들부들...네가 뭘 잘할 줄 알아. 하는 듯한 투에 주먹이 쥐어지는데 제가 잘못한 거라 반박도 하지 못했다. 맞다, 정호석이 밤마다 맥주찾듯 민윤기를 울부짖으며 분노를 표한 건 민윤기대리는 꼭 그냥 애교로 지나갈 수 있는 것 까지 전부 물고 넘어져 사람 텐션을 꼭 저기압으로 만들고 나서야 내가 언제 널 갈궜냐는 듯 무심하게 지나쳐갔다. 저런 류의 사람들은 성가시긴 한데 특히 상사로 두면 더 성가신 법이었다. 완벽함만 추구하는 꼰대냄새 가득한 민대리. 오늘도 정말 꼼꼼하게 내 텐션을 하락시켜주시는군.

오과장님은 오늘도 역시 호석을 감싸주는 법이 없다. 그저 무심하게 저놈 또 저런다, 하고는 모니터로 시선을 옮겨가는데 진짜 비참할 수가 없었다. 원 인터에서는 이 상황이 심각한 줄 모르는건가 싶었다. 영업씩이나 하면서 융통성 없게 딱딱한 민대리가 말이나 되냐고. 호석은 팬끝을 물며 고민에 빠졌다. 부서이동이 시급하다. 역시 현장에서 인력충원일로 본사에 발붙이는 게 아니었어.

원 인터 내 수많은 부서들에는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여러 분류의 종족들이 살아숨쉬고 있다는 것을 입사 3개월만에 터득한 호석은 자신이 인맥 인프라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했다. 그 종족이라하면 첫번째는 지랄족. 지랄족의 족장은 마부장이다. 그 지랄맞은 성격으로 감봉된 걸로 치자면 원인터에서 신입하나 더 뽑았다는 설이 나도는 가히 최고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단호박같은 결단력과 사바사바의 실력으로 살아남은 밀림의 왕 타입이었다. 그리고 또 한명, 하대리. 아래 저보다 사원들을 군대식으로 굴려먹는다는 악명높은 조교스타일. 철야는 물론 원인터 정문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모든 행동을 감시하고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깐깐한 소금쟁이 스타일이다. 불쌍한 동기인 지민씨는 입사 첫날에 성대리의 결혼했어? 한마디에 무슨 그런소리를 하냐는듯 에이~ 제가요? 여자친구도 없어요 히히 소리를 짓거렸다가 그래? 그럼 이거 다-해^^ 하며 야근에 출장에 현장 감시에...어후...애도를 표합니다. 둘이 부서를 맞대고 있어 그 사이를 지나갈 때면 없던 요실금마저 생길 지경이다. 그리고 이미 하대리는 제 밑밥에 흥에겨워할 지경으로 먹음직스럽게 조리해두었다. 하대리가 원피스 피규어 덕후라는 걸 캐치해 알랑방구 뀌며 한정판을 우수수수 뿌려줬더니 하대리는 줍줍하며 호석에게 따봉을 했다는 전설을 만들었으니 호석은 일단 하대리의 레이더에는 일단 발을 뺀 셈이었다. 호석은 기분좋아서 큭큭 웃었다.

"뭐합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면 어떡합니까. 일 안하고."
"아, 지,지금 하고 있었습니다."

못미더운 듯 호석이 정리하던 자료를 곁눈질로 확인한 민대리가 한숨을 쉬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오 할렐루야. 지쟈스. 하마터면 대빵크게 웃을 뻔 했다. 호석은 망상같은건 닥치고 일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기필코 정시에 퇴근하겠어. 그립다, 나의 사랑 나인투식스...



3 : 개뿔

사실 소개 못해준 종족이 하나 더 있다. 지랄족의 뒤를 잇는 종족 설인족. 왜 설인이냐 설명하기 전에 김남준와 김석진대리를 보면 입 싹 닫고 고개를 끄덕일거다. 깐깐한 것도 모자라서 모든 말과 행동이 차가운 사람들. 호석은 굳이 남준이 아무리 제게 뭐라 해도 다 너그러이 이해했던 부분이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남준과 호석은 입사 동기라 인생동지 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호석 마음대로 생각해 버린 탓도 있지만 그 전에 철강팀 츤데레 김대리에게 매일 시달리는 걸 두눈 뜨고 지켜볼 수가 없어서 그랬다. 단칼같은 건 김남준도 어디 내놔도 질 사람이 아닌데 그는 김대리앞에서만 안절부절 시달리기 바빴다. 그걸 보면 눈물이 앞을 가려서 차마 볼 광경이 못됐다. 내가 남준씨 생각하는 마음을 좀 알아줬으면.

"남준씨, 한대 필래요?"
"예."
"참나, 내가 이 맛에 회사 다니는데 담배값은 나를 이해 못해주네. 그쵸?"
"끊을까 생각중입니다만."
"에,에에? 스트레스받을 땐 뭘로 풉니까 이거 아니면."

한모금 쭉 빨아들이던 호석이 푸스스하고 코와 입에서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내 담배 한모금마다 김대리를 원망하는 마음 한모금 떠나보내는 낙으로 사는데. 남준은 아마 얼마 안가서 과로로 쓰러질 것 처럼 위태로워보이기도 했다. 입사동기가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니 호석은 안구에 습기가 찼다, 진짜 벌어먹고 살기 조온나 힘들다는게 우릴 두고 하는 말인가봅니다 김남준씨.

"후, 정호석씨."
"켁, 쿨럭쿨럭. 예. 민대리님."
"칠레 포도수출건 *CY까지 THC표 정리 끝냈습니까?"

*CY (Container Yard : 컨테이너 집하장)
THC (Terminal Handling Charge : 터미널 화물처리비)

갑자기 외벽 귀퉁이에서 튀어나온 윤기가 호석을 발견하더니 다가와 물었다. 남준는 민대리에게 말없이 꾸벅 인사를 했고 호석은 담배연기가 목에 걸려 쿨럭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예, 그거, 제가 쿨럭쿨럭...! 민대리는 연기가 제 몸에 닿는 게 싫은 듯 두어걸음 물러섰다. 그제야 괜찮아진 호석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건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민대리가 말 없이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긴장감에 호석은 1초가 보름같았다.

"오과장님이 검토하신다고 하셔서 제가 *CO랑 같이 추려서 전달했습니다."

* CO (Certificate of Origin : 원산지 증명서)

아, 그렇습니까? 왠일인지 깔끔하게 마무리한 호석에 별 말 없이 돌아선 민대리는 사내로 돌아가며 본인의 양팔에 코를 킁킁댔다. 호석의 담배냄새가 벨 것 같아 그런 게 뻔히 보여 호석은 저도모르게 코를 찌푸리며 같이 킁킁댔다. 청정 무공해처럼 생긴 건 알았지만 담배냄새까지 싫어할 줄은 몰랐네. 아직도 칼칼한 목 때문에 가래침을 들고 있던 종이컵에 뱉었다. 점심시간에는 좀 자유로울 것 같았는데 민대리는 사람이 참 일관되게 앞뒤가 콱콱막혔다. 오과장님 쓰러지셨을 때는 앞뒤 안가리고 업고 뛰어가더니 자기 몸은 하나 관리도 안하고 있는게 뻔히 보이네. 매 끼니 거르며 일만 하는 걸 보니 언제 제가 민대리라도 업고 뛸 날이 올 것 같다는 도시전설이 목전에 있었다. 제발 그 때 출장중이길 비는 수 밖에.

"정호석씨."
"예?"
"민윤기대리님은 좋은 분 같아보입니다."

하하, 이게 미쳤나. 호석은 하마터면 속에 있는 말을 내뱉을 뻔 했다. 남준의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민대리에 대해 너무 무지한 발언이 아닐까 싶다. 내 동기가 내 상사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니. 조금은 섭섭해지는 건 뭘까. 호석은 어색하게 웃었다. 남준의 말을 부정할 수도 없고 답답해 뒤질 것 같은 건 저뿐이었다. 저 말끔한 얼굴에 속으면 안된다니까. 아무래도 철강팀이 영업 3팀이랑 많이 떨어져 있어서 그런가 싶다. 장초가 어느새 짧아졌기도 하고 더 필 생각도 없어서 비벼 끈 호석은 남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있다 봅시다 남준씨.

아마 점심 내내 일만 한 건지 양사이드에 서류를 잔뜩 쌓아올린 민대리는 지문이 닳도록 불나게 타자질 중이었다. 그냥 지나치기도 뭐해서 제 자리에 앉은 호석이 괜히 섬유팀에 전달할 서류만 뒤적였다.

"정호석씨."
"네."
"텐션이 너무 높습니다. 정호석씨는."

그래서 매일 내 텐션 낮춰주느라 수고하십니다. 전생에 나랑 부부였어요? 아,이것도 좀... 호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4 : 회식하자

"예, 저희가 그럼 회의후에 정확한 날짜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전화를 끊은 민대리가 한숨을 쉬며 서류를 정리했다. 그를 보던 오과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호석을 불렀다. 정호석이. 오늘 회식이다, 알겠냐? 오과장의 말에 호석은 키야, 오과장님~하며 좋아했다. 퇴근 후 홀로 맥주일 줄 알았는데 회식이라니. 법인카드 쓰시는겁니까 오과장님?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싱글벙글한 호석과는 다르게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민대리가 우물쭈물댔다. 입사 이후에 한 번도 없던 회식이었는데 하여튼 오과장님은 즉흥적이 너무 심하시다니까.

오늘 영업 3팀은 칼퇴를 했다. 칠레건도 마무리 되어가니 쉬어가는 타임인 것은 물보듯 뻔했다. 오과장이 주로 찾는다는 곱창집에 들어선 셋은 가장 안쪽에 자리잡았다. 곱창 3개랑 소주 2병! 하고 소리친 오과장은 허허 웃더니 호석과 윤기를 번갈아 봤다. 야 너희들 고생 많다. 민윤기 너 이자식 좀 힘좀 풀고 살아. 너 보면 내가 다 숨이 막혀. 민대리는 호석이 있어서 그런지 고개만 숙일 뿐,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현장 현장 거릴 때 그냥 얼간이인 줄 알았는데 잘 따라오고 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과찬이십니다."

호석과 오과장의 죽이 척척 잘 맞았다. 윤기는 그냥 오과장이 따라주는 술을 받아 마실 뿐 별다른 얘기는 없었다. 그래도 맞장구는 쳐주는 게 지루한 티는 안 내는 것 같아서 호석은 텐션이 마구 솟구쳤다. 싹싹한 호석은 재빨리 오과장의 잔을 채워주며 그의 비위를 맞추는 뻐꾸기를 사정없이 날렸다. 딱딱한 민윤기만 보다가 저를 보니 아주 펑 터지듯 오과장표 유머가 폭발했다. 키야, 과장님 신세대 유머 잘하십니다.

"이 새끼 이거봐라, 크하하하하!"

거하게 취한 오과장은 역시 호석의 어깨로 옮겨갔다. 간이 좀 좋지 않은 지 얼굴에 홍조기가 있었다. 그럼에도 오과장은 한 번의 패스 없이 쭉 8병을 달렸다. 호석도 상당히 마셨지만 유흥을 좋아하는 남자답게 이까짓 소주는 왠만하면 취하지 않았다. 영업하기에 딱 맞는 신체조건을 가졌다고나 할까 하하하!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의 지갑에서 5만원을 추려 택시기사에게 주고 잘 부탁한다며 오과장을 태워보냈다. 오과장을 보내고 구부러져있던 허리를 찌뿌둥하게 펴자 그의 옆에는 민윤기가 서 있었다.

사실 좀 놀랬다. 소리소문 없이 사라질 줄 알았던 사람이 제 옆에 자리를 지키고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호석이 담배가 고파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그만뒀다. 민대리가 담배를 싫어하는 것 같아 보여서 괜히 피웠다간 무슨 소리를 들을 지 몰라 굳이 이 업된 기분을 가라앉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까 보니 오과장이 기분이 좋아 민대리에게 수없이 부어줬던 것 같은데 그걸 곧대로 다 마신건지 술앞에서는 천하의 민대리도 어쩔 수 없나보다. 살짝 눈이 풀린 민대리는 호석만 보면 어디 하나 꼬집어내려고 안달 난 사람처럼 그를 나무라진 못했다.

"민대리님도 택시 세워 드릴까요...?"
"네."

매번 챙겨주려면 됐다며 무르던 사람이 조금 힘든지 망설임 없이 호석의 도움을 받는다. 왠지모를 승리감에 조금 뿌듯한 호석이 금방 오는 택시 하나를 잡았다. 이번에도 제 지갑에서 돈을 빼려던 호석이 제 손에 닿는 민대리의 손에 제지당했다. 됐습니다. 나도, 돈 있으니까. 그럼 그렇지. 호석이 그럼 그렇게 하라며 순순히 물러섰다. 평소에 그처럼 깔끔하게 제 눈 앞에서 사라지는 택시를 바라보던 호석이 쯥, 하고 저도 오늘만큼은 깔끔하게 돌아섰다.




5 : 고졸에 낙하산

오, 쉣. 마부장이 이성을 잃은 건 순식간이었다. 오과장을 평소에 안좋아하던 게 눈에 보이던 마부장이 갑자기 며칠 전 성희롱 발언을 회의 중에 꺼내놓은 오과장에게 눈깔이 뒤집혔다. 물론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내놓을 이상한 타이밍은 아니었다. 역시, 여자들은...에서 시작하는 특유의 여성비하발언을 듣는 사원들의 심정이 가시밭길 이었겠지만 성적 비하발언이 회의 안건이 아니라는 오과장의 따끔한 일침에 빡쳐버린 것이다. 앞에 나와 피티를 하던 선차장이 오과장에게 한 두번도 아니고, 그냥 좀 넘어가지. 빔을 쐈는데도 불구하고 오과장은 어제 과음한탓에 붉게 충혈된 눈을 번뜩이며 마부장에게 밀리지 않고 대적했다. 살벌한 말들이 오갔지만 호석은 토달 군번이 없기 때문에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앉아 있었다. 윗대가리들의 싸움에는 호석의 그 유려한 말도, 광역 친화력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가 언제 여자들을 성희롱했어? 어? 야, 안영이 말해봐, 내가 너한테 언제 그런말 했어?"
"예? 저...저는..."
"빨리 말해봐!!"

겁을 잔뜩 먹은 영이는 눈을 질끈 감고 부들부들 떨었다. 마부장 들어보니 애들도 있다던데 부인이 불쌍하다. 호석은 일개 신입사원이라 그저 영이를 측은하게 쳐다볼 뿐 어떤것도 못했다. 적어도 20명은 족히 넘는 대회의장이 싸하게 얼어붙었다. 오과장은 왜 가만히 있는 영이를 건드리냐며 더 열을 냈다. 싸움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역시 옛날에 이름좀 날렸다는 오과장은 마부장과 동년배라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상대방이 수치심을 느꼈고 다른 사람들이 공감하는데 이보다 더 확실한게 어디있습니까, 마부장님."

갑자기 민대리가 나섰다. 어,어이 민대리님. 대리님이 나설 자리는 아닌것 같습니다만. 당황한 호석이 좆됐다 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대리와 과장이 버티고 서 있으니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진 마부장은 민윤기 너 이 새끼 잘 걸렸다는 듯 손가락으로 척 가르치더니 이상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 이 고졸새끼 언제 안 기어오르나 했어! 낙하산 주제에 대리까지 잘 올라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어? 어?"

세상에, 민윤기가 고졸이라고? 미친. 비단 호석만 놀란 건 아닌지 호석과 입사 동기들의 눈이 커졌다. 치사하게 학벌로 모든 사람 앞에서 망신주는 마부장이 백번 천번 잘못했지만 모든 부서에서 손을 놓았던 요르단건을 대성공시킨 장본인인 민대리가 고졸에 낙하산이라니. 다른 대리급들의 표정이 죄다 굳었다. 입사동기가 이런 치사한 이유로 부하직원들앞에서 개쪽을 당해서도 그 이유였고, 앞으로 제 기수들이 입방아에 오르락 내리락 할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너도 김동식이 처럼 되고 싶어서 안달났...!!"
"마부장님!!!!!!!!"

오과장의 기함과 같은 소리에 깜짝 놀란 호석이 펜을 떨어트리자 그 소리에 마부장이 그제서야 이성이 되돌아온 듯 모두의 표정을 살피더니 자리를 접고 일어났다. 마부장 아래 사원들이 전부 오과장을 따라 일어서 일렬로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선차장도 한숨을 쉬더니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대리는 마부장을 따라나서지도 않고 짜증냈다. 야, 민윤기 너는 왜 가만히 있으면 될 걸 괜히 일 크게 만들어? 어?

오과장이 하대리에게 닥치고 가라는 의미로 손짓하자 씩씩대던 하대리가 회의장 밖으로 향하고 안영이도 고개를 숙이고는 지민과 함께 그 뒤를 따랐다. 회의장은 쑥대밭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던 철강팀도, 선차장 사람들도 선차장의 지시에 전부 빠져나가고 자리에는 영업 3팀과 선차장이 남았다. 이거야말로 제대로 가시방석인 호석이 울상을 지으며 자리를 지켰다. 호석의 자리는 잘 보이지 않는 건지 아무도 나가라는 사람이 없었다.

"마부장님이 잘못하셨어요. 근데 오과장님은 일을 왜 크게 만드세요."
"입이 간지럽더라고. 말 안하면 내가죽을 뻔 했어."
"하...그래도 김대리 일 꺼내는 건 아니셨는데..."

김대리...? 호석은 제가 입사하기 전 무슨 일이 일어났겠다 싶었다. 호석은 왠지 민대리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기분이었다. 왠지 보면 안될 것 같았다. 선차장까지 밖으로향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이 큰 대회의장이 무겁게 영업 3팀을 짓누르고 있었다. 평탄한 사회생활은 기대한 적 없었지만 그 치열한 스팩경쟁에서 살아남아 올라오니 이번에는 부서가 이 모양이었다. 역시 부서이동이 시급해.

저는 괜찮습니다. 일을 더 크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민대리는 어딘가에 홀린 사람처럼 영혼없이 일어나 회의장을 나섰다. 호석은 타부서 사원들에게 들었던 옛날 얘기가 어쩌면 시기어린 말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민대리가 신입사원 시절, 영업3팀에 있던 김대리님의 이야기. 그 디테일한 사정은 잘 모르지만 김대리님은 지금 이 회사에는 없다고 했다. 그냥 누가 어떻든 제 자리만 지키고 서서 눈가리고 입 닫으면 다 끝날 위치에 서 있는 호석이었지만 그의 오지랖이 용납하지 않고 있었다. 저 혼자 붕 떠서 섞여들지 못하는 건 아마 영업 3팀이 절대 호석에게는 알려줄 수 없는, 알려주지 못하는 어떤 사건이 있었음을. 그는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미안하다."

부서에 돌아온 오과장님은 민대리에게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미안해질때면 더욱 심해지는 그 과도한 제스쳐들을 민대리는 알고 있는지 괜찮다며 방방 뜨는 오과장을 가라앉혔다. 괜히 다 검토가 끝난 칠레 수출건 문서를 띄워놓고 도대체 누구한테 물어보면 될까 짱구를 굴리고 있던 호석은 민대리가 본인을 부르자마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호석씨, 미안합니다."
"아, 아닙니다."

왠지 민대리의 어깨가 작아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입사할때는 그가 무슨 슈퍼맨 급으로 크게 보였는데 영락없는 월급쟁이라는 표정을 보니 제가 다 우울해질 지경이었다. 본인이 너무 민대리를 나쁘게만 생각했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작아보이는 그의 모습은 누군가가 찌르면 금방 와르르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6: 궁금해요?

"정호석씨, 거래처좀 같이 갑시다."

칠레건이 끝났다. 오과장님이 합성수지건으로 새로 들어와서 거래처 목록도 확인할 겸 방문좀 하라고 지시했었던 건 기억나는데 민대리는 왠일인지 호석에게 동행을 제안했다. 뭐든 혼자하는 게 편해보이는 사람이 대뜸 같이하자고하니 여간 어색한 게 아닐 수 없었다. 이제야 민윤기의 방식을 저에게 전부 알려주는 건가 싶어 저도 이제 재대로된 일을 하지 않을까 마냥 들떴다.

김대리한테 아직도 숙제나받는 남준씨를 이겼다는 생각에 뭔가 앞서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남준의 우수한 성적에 약간 열받아 있었는데. 역시 부서하나 잘 들어갔다니까. 호석은 누군가 기회주의자라 욕해도 할 말이 없었다.

"운전할 줄 압니까?"
"아, 저 면허 없습니다...하하."
"기사로 쓰려해도 안되네요 정호석씨는."
"쓰읍. 죄성합니다."

호석의 그 빠진 발음을 들은 윤기는 눈썹 한 쪽을 찌푸리더니 운전석 쪽으로 향했다. 호석은 그저 한가득 서류를 껴안고 조수석에 앉아 정면만 쳐다봤다. 운전면허 없는 게 뭐가 어때서. 공부하느라 그럴 시간도 없었는데. 호석은 그저 웃었다. 윤기와 비슷한 나이대라지만 신입사원일 뿐인 자신의 위치가 그가 얼마나 인생을 허비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남들보다 많이는 늦었지만 그래도 남들 다 못해서 안달인 대기업에 입사했다는게 어디냐고 혼자 위로했다. 기대치가 높은 직업이니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기도 했다.

"정호석씨. 지금 저한테 물어보고 싶은거 많아 보이는데요."
"그런거 없습니다."
"고졸에 낙하산인 내가 왜 이 원인터에 대리로 앉아있는지 되게 궁금한 표정이던데."

사건의 당사자인 윤기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니 넋놓고 있던 호석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사실 되게 궁금해서 밤에 잠도 못잤다. 그래도 자기 상사가 그렇다고 일을 시원찮게 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제가 떠들고 다녀봤자 제 얼굴에 똥뿌리기밖에 더 있냐 싶었다. 아니나다를까 민대리가 고졸에 낙하산이라는 이슈는 사내에 얼마 떠돌지 못하고 그냥 흔히 오징어씹듯 지나가는 얘기 정도밖에 되질 못했고 특히 다른 동기들은 오히려 대단하다는 생각을 가진 놈들도 있었다.

저는 편견같은거 없습니다. 호석은 처음으로 윤기에게 떨지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사실 민대리에 관해 무슨 말을 어떻게 하고 돌아다니는게 같은 팀이기 이전에 본인도 그렇게 내놓고 돌아다닐 스팩은 아니었기 때문에 호석은 그저 분위기를 어떻게 탈까 흐름을 노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연줄로 들어왔다고 해서 실수해도 다 받아주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
"오히려 저번 일 같은 경우가 계속됐죠."

호석은 그저 바보처럼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그는 그의 자리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게 역력해 보였다. 요령을 피우려고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너무 딱딱하지 않은 것도 아닌 딱 적당한 일처리. 호석이 갓 입사했을 때 막 민대리 덕분에 회사 전체가 난리날 뻔한 일을 정리했다면서 친히 사장님까지 내려와 보너스를 받는 걸 목격하면서 저런 회사원이라면 매력 있을 것 같다고 느꼈었다.

민대리는 부드럽게 차를 세웠다. 사무실이 아니라 공장이라 다소 놀란 호석이 총총총 그를 따라갔다. 그 큰 공장을 전부 둘러보며 공장장이 하는 말을 꼼꼼히 체크하고 나서야 원하는 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이게 웬일.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지나갔다. 간혹 바보처럼 얼빼고다니는 호석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는 민대리만 빼고. 호석은 계속 돌아다녀 지친 다리를 질질 끌며 민대리뒷꽁무늬만 쫓아다녔다.

"다 끝나면 바로 퇴근해도 됩니다."
"옙!"

호석은 허공에 주먹질을 했다. 운동부족이 가져온 결과지만 이게 어디 하루이틀 수시로 오는 기회도 아니고 재빨리 가방을 챙겨든 호석은 조수석에 앉아 운전하는 민대리를 쳐다봤다. 내가 그동안 좋은 사람을 나쁘게만 생각했나 자꾸 죄책감이 들었다.

"민대리님 어디 사십니까?"
"아, 저는 퇴근 안합니다."
"예...?"
"할 일이 많아서요."

호석만 왠지 뺀질사원으로 만든다. 남준도 본인을 항상 무안하게 만들더니 민대리 역시 가차없이 본인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호석은 황금같은 퇴근을 무르지 않았다. 서 있을 힘도 없는 이 몸을 어서 집으로 끌고 들어가 일찍 잠드는 것이 본인에게는 훨씬 더 이득 일게 뻔했다. 호석은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민대리의 뒷 모습을 보며 그저 꾸벅 인사를 했다. 아싸, 집가자 집.



7: 휴일의 남자.

"여긴 어쩐 일이세요?"

호석이 얼굴을 감싸안았다. 갑자기 급 피곤해졌다는 걸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바리바리 싸들고 온 보따리가 호석의 골치를 더했다. 한 번도 언성높이면서 싸워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마냥 피곤하기만 했다. 고개를 돌려 아파트 현관을 보자 아버지가 타고계실 차가 바로 앞 주차장에 주차 되어 있었다. 호석은 뭔들 못하겠냐는 표정으로 단아하게 서 있는 어머니를 차 한잔이라도 대접하려 주방을 서성였다. 오늘은 또,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이렇게 행차하셨는지. 호석이 커피포트에서 내린 커피를 따르고 어머니는 흡족한 표정으로 식탁에 앉았다.

"저번에 만났던 여자는 헤어졌니?"
"연락도 안되던데요. 제가 싫은가보죠."
"그래? 안됐네..."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셨을거면서 아무렇지 않아하는 표정이란. 참 볼때마다 안타까우면서도 화가났다. 분명 아직까지도 내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으시겠지. 호석은 착잡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마주했다.

"갓김치는 전주사는 고모가 부쳐줬더라, 그리고 저번에 보니까 파김치가 다 떨어졌길래 몇가지랑 같이 싸왔어."
"매번 감사해요. 못찾아뵀는데."

사실은 싫은거면서. 호석은 본인이 인간관계에서 그렇게 뛰어난 화술과 사바사바로 잘 살아나갔지만 어머니 앞에서는 발가벗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 엄마는 지금 이게 행복해요? 분명 달갑지 않을 걸 알면서,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로 당신을 만족시키는걸 알면서 매번 모르는 척 하느라 당신 괴로운 걸 눌러 참으면서 사는 게 행복하세요?

역시 평범한 가족이라는 걸 죽을 때 까지 깨닫지 못하고 죽어버릴 것 같아서 호석은 쓰게 웃었다. 어머니가 떠나간 그 흔적조차도 모순이 가득해서 어디가서 따지기도 뭐했다. 이럴 때만 그 지옥같은 강남 빌딩 숲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호석도 자세히는 몰랐다. 그냥 본인이 항상 바쁜 도시에서 현실과 동떨어져있는 그 찰나의 기분이 좋은걸지도. 호석의 귓가로 아버지의 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닫아야겠다.

"하."
ㅡ 정호석씨, 미안합니다.

희미하게 웃으며 호석을 바라보다 자리로 돌아가는 윤기가 갑자기 떠올랐다. 쓰읍, 괜히 그리워지네. 휴일이 지나고 평일이 돌아오면 한결같이 싫어하게 될 건데 사람마음 참 간사하다. 휴일만 되면 그리워지게 만드는 참 이상한 남자다 싶었다.









그냥 등장인물 그대로 썼었는데 리네이밍하니까 배틀호모느낌나고좋습니다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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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Zipd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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