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김태형 너 아프다며!"
"기분은 안좋은데...누가 그러디?"
"김준면이."

점심을 폭풍으로 잡수시고 등대고누워 그늘에서 놀고 있는데 두다다 달려온 성재가 태형의 옆에 자리를 깔고 저도 누워서 하늘을 본다. 뭔 개소리야. 아침에 기분 안좋았던 거 빼고는 평소랑 똑같은데 무슨. 그 말에 성재가 상혁을 씹는다. 시팔 그새끼 평소에 구라좀 작작치지 나는 또 너 아프다고 해서 이 한몸 희생해서 응석받아주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아오 씨. 곧이곧대로 믿은 사람은 뭔데. 태형이 한 번 쏘아주려다가 입만 아플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건드는 사람이 없어서 좋긴 하다만, 아무래도 엎드려 있던 걸 준면이 아프다고 치부해 버린 것 같았다. 가끔 반장이라고 해도 오지랖이 지나치게 넓어서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면이 가끔 있었다. 설마 제 맘대로 아픈 사람이름을 체육대회 명단에 적었나 싶지만, 그렇게 나쁜 새끼는 아니라서 오히려 잘됐다 싶다. 작년에 있었던 대참사는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너 박지민이랑 아직도 같이 다니냐? 성재가 묻자 태형이 또 그러냐는 표정으로 성재를 흘긴다. 이제는 패턴마저 지긋지긋하다. 딱히 할 말도 없을 때 박지민 걸고 넘어지는 거 하곤. 이제 좀 그러려니 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사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집애마냥 옛날일로 왈가왈부 하는 나이는 지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그런 놈이 여기 있었다. 옛날에는 지금 죽고 못사는 한상혁보다 더 부벼댔으면서 사람하나 바뀌는 건 순식간이다. 순식간에 사람 무시하고 그랬던 놈이 편가르는 것도 아니고 작작좀 해라? 육성재는 대답이 없다. 김태형은 박지민을 장난으로 밀어내거나 욕하는 경우는 있어도 행실로 뭐라 할 인간은 못된다.

학년을 올라오기 전 김태형, 박지민, 육성재, 한상혁 넷이서 미친놈 소리 들어가며 정신놓고 병신짓 하기로 유명했다. 자세히 말하자면 병신짓의 주축은 박지민과 육성재였다. 박지민은 반을 바꿔서 지맘대로 어느날은 2반에 있다가 5반에 있다가 걸려서 진짜 본인 담임에게 끌려나가는가 하면 육성재는 깝치다 초딩한테 밀쳐져서 계단에서 굴러 내려가질 않나 온갖 병신짓은 둘이 맡아하고 김태형과 한상혁은 맞장구 쳐주다 지치면 가차없이 버리고 가곤 했다. 그래도 서로 걱정해주고 챙겨주는 건 서로가 못해줘서 안달이었다. 면전에 대고 쌍욕을 해도 서로를 별로 기분 나빠하지도 않고 오히려 태형의 틱틱대는 성격을 받아줄 놈들로서는 제격이었다.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한 건 2학기 초가 되서 박지민이 학교에 나오질 않는 순간부터였는데, 평소같았으면 본인이 연락을 하던가, 아니면 담임이 먼서 태형, 성재, 상혁 셋 중에 한명에게라도 무슨 일인지 물어보는 게 정답이었다. 보다 못한 태형이 대표로 담임에게 물어봤지만, 담임은 뭔가 알면서도 대답해주지 않는 눈치였다. 원래 담임보다 먼저 알고 있어야하는 건 같이 다니는 패거리임이 분명한데, 원래 이런 일이 없던 놈이라 가장 친했던 성재가 제일 섭섭해 했었다. 담임은 알아도 되고, 우린 몰라도 되는 게 무슨 논리야. 성재는 며칠을 박지민을 가차없이 깠지만, 내심 걱정되는지 전화도 몇 번 시도했었고 그러나 연락두절은 마찬가지였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니가 지민이한테 니 취향 강요하는걸로 밖에 안들리는데."
"너도 박지민한테 물들었냐."
"물들고 말고 할 것도 애초부터 없었어."

너 언제까지 지민이 인간취급도 안할꺼냐. 태형은 애초부터 지민이 에일리언이었든, 여자였든 박지민이니까 어울려 다녔던 건데 육성재는 그렇게까지는 관대해지고 싶지 않은 눈치다. 워낙 둘이 더 친했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육성재가 그 날 박지민에게 등돌렸을 때도 태형은 그 누구에게 찾아가서 누굴 따지려 들지 않았다. 뒤늦게 정신차렸다 뭐다 해서 공부하던 한상혁만 사이에서 힘들었지. 결국에는 태형과 지민, 성재과 상혁으로 나뉘어서 어울려 다녔지만 육성재는 아쉬워질만 하면 지민의 이야기를 꺼내서 태형도 최근에는 최대한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나 먼저 간다. 성재가 건물 쏘옥 들어가자 손을 흔든 태형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곁에서 아무것도 안해도 행동 자체가 시끌시끌한 박지민없이 지내려고 하면 꼭 육성재나 한상혁이 저를 찾았다. 개인시간이라고는 교실에서 자는 것 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나마 지들끼리 서로 피곤한거 아니까 건들지 않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학교를 다녔을까 싶다. 결국 육성재는 김태형보다 쿨하지 못하다는 건데 아무리 설득하고 이야기해봐야 육성재가 이러고 있는 동안 박지민 이자식은 신경쓰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평소에는 실실 웃고 다니는데 제 말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상이 더러워서 다 도망간다던데 예전에 놈의 오만상을 봤기 때문에 신빙성이 있어서 가만 놔둔거지, 같이 다니면서 벨도 없는 놈 처럼 병신같이 실실 쳐웃으라고 놔둔건 아니었다.

박지민이 학교를 다시 온 건 거의 한달여 만이었지만, 여전히 아무도 그 이유를 아는사람은 담임 빼고 전혀 없었다. 평소에 가장 섭섭해했던 육성재가 따로 박지민을 불러 자기가 그렇게 못미덥냐고 화를 냈었다. 그 때 박지민표정이 참 가관이었지. 한달은 무슨 일년을 시달리고 돌아온 사람처럼 정신 나간 표정으로 육성재를 곧게 쳐다보고 서 있는데 내심 지민이 가정사를 얘기한다거나, 잠시 가출했었다며 진지하게 말하는 줄 알고 있었다. 남자놈들이야 가출이 허다했으니 가출이면 그냥 넘어가고, 가족일이라면 먼저 나서서 도와줄 심산이었다.

ㅡ 애인이랑 섹스하다 걸렸는데 왜.
ㅡ 야, 너 그걸 지금...
ㅡ 애인이 우리 학교라서 수습하느라 시간 좀 걸렸거든.

구라치지마. 구라 아니야. 지민의 단칼같은 대답에 난간에 붙어서서 육성재와 박지민이 하는 꼬라지를 흘겨보던 태형, 상혁 둘이서 가만 있다가 난데없는 충격에 펄쩍 뛰었다. 육성재는 그 자리에서 새파랗게 질려서 입을 못다물고 박지민을 바라보고, 한상혁은 보고 있던 영어단어장을 난간 밖으로 떨어뜨렸다. 오히려 당사자만 괜찮아 보이는 게 이건 무슨 상황인가. 박지민은 육성재의 말을 빌리자면 존나게 당당했다. 갑작스러운 친구의 커밍아웃에 태형은 저절로 인생꼬이는 소리가 들려서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저 새끼 언제 한 번 크게 할 줄 알았다. 한상혁이 도저히는 못참겠는지 한마디 하는데 육성재는 가만히 벙어리처럼 서 있다가 냅다 박지민을 피해서 자리를 뜨는거였다. 혼자 내빼버리면 뭐가 달라질까 싶었는데, 그 이후로 둘의 사이는 정말 뭐가 달라져도 한참 달라졌다. 박지민을 그 이후로 현재까지 매일 싫다싫다 소리를 질러대는 포비아가 지금의 육성재였다.

육성재는 여자에 환장해서 어떻게든 여자랑 접점을 찾아보려고 심지어 주말에는 일부러 여고 근처에서 놀다가 성에 안차면 직접 찾으러 사람많은 곳을 찾아서 돌아다녔다. 당연히 지금껏 그 이외에는 생각해 본 적도 없던게 갑자기 받아들이려니 몸에서부터 거부반응이 올라온 게 분명했다. 태형은 조금 충격만 받았다 하고 그러려니 넘겨서 지금껏 계속 붙어있지만, 한상혁도 조금은 박지민을 의도적으로 만나려하진 않았다. 박지민 남친뭐시깽이는 전학처리됐다고 하고, 지민은 그 동안 정학처리되어서 집에서 줄곧 지냈다고 했다. 질린다는 표정의 지민은 결국 그 남친이랑 헤어지고, 지금껏 잘 지낸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놈은 힘들다는 표정 한 번 안하고 금방 본래 모습도 되돌아왔다. 단순한 줄은 알았는데, 이정도까지인줄은 전혀 몰랐다. 그렇게 따지자면 넷 중 가장 무서운 놈은 박지민이 틀림 없었다.

"야. 야."
"오, 너 어디갔다왔어? 내가 너 계속찾았다 진짜."
"남이사."
"우리사이에 무슨."

이제는 이런 농담도 서스럼없이 하는 게 태형으로서는 신기할 수 밖에 없다. 너, 육성재가 아직도 저러는데 넌 아무렇지도 않아? 사실 많이 물어보고 싶은데 웃고있는 박지민의 면전앞에 선뜻 나오지 못하고 늘 곱씹기만 했다. 차라리 뒤질 때 까지 비밀로 하던가, 육성재랑 치고박고 싸우기라도 했으면 보는 사람 마음 싱숭생숭하게 하진 않을 것 같은데. 성재, 상혁이 이과로 가는 바람에 반까지 멀리 떨어져버려 이제 박지민도 될대로 되라는 것 같긴 했다. 여전히 마주치면 어색한 게 눈에 보이는데 딱히 태형은 행동으로 개입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귀찮으니까. 딴 놈 같았으면 벌써 따로 놀았을 거 지금까지 둘 사이에서 이렇게 있는 걸 보면 태형이나 다른 놈들이나 성격이 고만고만 해서였다. 해서 되면 되는거고, 안되면 마는거고. 그래도 가장 결정적인 것은 육성재 한상혁, 둘 다 입을 닫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지민도 나름대로 학교가 발칵 뒤집어질 걸 알면서도 말했던 것 같은데 그 결과는 지민도 예상치 못했었다. 물론 태형도 일이 커지지 않으니 뒤에서 널직히 하는 꼬라지를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다. 성난 황소처럼 날뛰어다닌다고 박지민이 하루아침에 여자를 좋아할리가 없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박지민 더럽게 양치질도 안하고 입에 고춧가루를 잔뜩 매달고 와서 태형이 입이라도 헹구라며 화장실로 처박았다. 다른사람이면 모르겠는데, 박지민이면 왠지 남들한테 고춧가루 자랑 퍼레이드 할 것 같아서 교실 들어가는 김에 하고 들어가자는데 박지민이 들어간 화장실 문을 열려고 발버둥치는 게 보인다. 이러는 시간에 포기하고 입헹구겠다! 아, 괜한 체력소모. 그래도 더러운 건 못봐준다. 제발 양치질좀 해 이 새끼야!

"비켜."
"..."

태형의 뒤로 정국이 바짝 다가와 섰다. 말하지 않아도 통행을 방해하는 건 저였기에 군말없이 문을 잡은 손을 놓는다. 그 반동으로 문 반대쪽에서 쓰러지는 소리가 나면서 박지민이 빼액 소리를 질렀다. 야!!!아파!!! 아무래도 바닥에 엎어진 것 같다. 박지민도 특이한 놈이긴 하지만, 태형의 뒤에 있는 전정국도 박지민 만큼 정상은 아니다. 태형이 말 없이 슬쩍 비켜주자 정국이 지나쳤다. 저건 살갑게 비켜달라고 하면 뭐 덧나나 괜히 자기한테 화풀인가 싶다. 태형이 에이 씨. 하며 반으로 돌아가자 지민이 그 뒤를 재빠르게 쫓았다. 어? 너 쟤랑 싸움? 대답이 없다. 확실히 싸운적은 없지만서도 정국만 보면 괜히 심술이 난다. 오래 전 부터 전정국과 관련되면 감정적으로 행동했다가 큰코다친 적이 한 두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괜히 예민하게 굴곤 했다. 그걸 알리가 없는 박지민은 왠일이냐며 옆에서 또 깐죽대고.

분명히 언젠가는 같이 사는 마당에 서로 친하게 지낼 마음도 가진 적이 있었다. 정국이 체육관에서 돌아왔을 때 아이스크림도 건내준 적도 있었고, 녀석이 공부하느라 밤 새 어지러놓은 책도 나름 정리해 줘 본 적도 많았다. 그래도 녀석이 지금껏 군말없이 제 심술을 다 받아준 것에 대한 미안함도 없지 않아 아무 말도 안하고 있었는데.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건지, 아니면 정말 눈치가 더럽게 없는건지 정국은 전혀 태형이 앞에서 옷 벗고 춤을 추든 뭘 하든 관심이 없었다. 결국 포기. 괜히 저만 시간낭비였지만 이제는 화내기도 힘들어죽겠다.

태형이 어서 반에 들어가라 지민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래도 점심먹고 잔디에서 한바탕 나른한 시간을 보냈으니 아침보다야 기분이 좋아졌음에는 틀림이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김태형. 너 달리..."
"나 달리기 못하는거 알지? 작년에."
"야, 뭐 하나는 해야될 거 아니야."
"우리반은 나갈 애가 그렇게 없냐?"

차마 응이라고 말하지 못한 준면이 태형을 노려봤다. 작년에 태형이네 반이 반 계주를 아주 시원하게 말아먹은 건 잘 알고있었다. 담임은 담임대로 귀차니즘이 하늘을 찔러서 역할을 번호로 끊어서 정했고 하필이면 제2외국어 때문에 1번이었던 김태형이 마지막주자가 되어버렸었다. 물론 태형은 남들만큼은 달렸다. 전혀 앞지를 의사가 없다는 듯이 늦게 들어온대로 늦게 들어갔지만, 이번에 자기를 계주로 넣을 시 역주행을 해버리겠다는 무언의 압박에 김태형 몰래 계주 쪽에 써 놓았던 태형의 이름위에 준면은 눈물을 머금고 빨간 줄 두 줄을 그어버렸다. 정국은 실랑이끝에 화장실에 간다는걸 물고 늘어져서 간신히 마지막주자를 받아냈지만 아직도 두 자리가 더 남아있었다.

그럼 박지민이나 넣어. 볼만하겠네. 태형이 눈을 흘기며 자리로 돌아갔다. 맘같아서 박지민이 달릴 수야 있다면 냉큼 넣었겠지만. 그래도그렇지 심지어 같은 반이 아닌 애를 반역죄인으로 만들 수도 없고 하다못해 하체부실인 자기가 첫 스타트를 끊겠다는데 딴건 친구도 못알아보고 하겠다고 난리더니 딴놈들은 달리기에는 유독 반응이 없었다. 사실 우승은 뭐 실력이야 고만고만하니 그나마 응원 잘하는 놈들이 응원상이라도 받겠지 하고 있는 건 모든 반이나 다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체육대회의 의의란 건 우리반이 이 정도라는 걸 보여주는 공식적인 자리이고, 성적과는 직결될 수 있는 중요한 문제로서...

"여기서 뭘 중얼거리고 있어."
"신경 꺼!"

태형때문에 불 난 가슴 전정국이 부채질을 한다. 둘은 너무 평온한데 그깟 체육대회가 뭐라고 준면이 열이 난다. 확실히 둘은 딱히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남 화나게 하는 데에는 뭐 있는 녀석들이라 둘이 붙어먹으면 주위가 피곤해질 것 같다. 김태형은 김태형대로 쿨내 뿌리고 다니고 전정국도 체육관 빠돌이질이나 하고 다니면서 뭐만 하면 귀찮다고 이리저리 내빼지, 둘이 붙어다닌다는 게 상상도 가질 않았다. 여튼, 김태형. 너 한개는 꼭 해야되니까 얼른 정해. 그러다가 남는거 한다. 일방적으로 통보를 날린 준면이 뒤돌아 고소하다는 듯 실실거렸다. 이런걸로 눈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은 태형도 자기한테 시선이 집중되는 게 싫어서 남들만큼은 한다. 대표로 뽑기에는 미친짓이지만, 머릿수 채우는 데에는 제격이었다.

책상 위에서 열심히 굴러다니다 보니 어느새 하교할 때가됐다. 태형이야 늘 칼퇴고 정국은 늘 체육관이다. 하루라도 운동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는 듯이 학교만 끝나면 체육관으로 향했다. 체육관앞에 도착하면 정식 연습시간도 아닌데 할 일 없는 놈이 체육관에서 허공에 발길질 하고 있다. 정국이 뒤로 다가서니 후배들이 정국에게 인사했다. 전정국이 태권도부 부장을 맞는 순간부터 정국은 권력남용으로 3학년 선배들을 가차없이 짤라버렸다. 평소에 태권도부 담당선생님이라는 타이틀만 가지고 있는 수학선생을 들들 볶아서 이뤄낸 성과라 그 원성은 오로지 그 선생에게로만 향했다. 워낙 해놓은 게 없는 부서라 정국은 체육관 구석에 있던 먼지쌓인 호구부터 정리했었다. 정국은 능숙하게 가방을 벗어던지고 탈의실로 향했다. 확실히 여기에 있어야 뭐든 맘이 놓인다.

김태형이랑 같이 사는 것 같지도 않은 생활을 하면서 외로움만 가득차서 조금만 정신이 헤이해지면 딱 죽고싶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신 후 곁에 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눈으로만 뒤를 쫓았던 김태형네 집에 들어가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은 조금 좋아했던 것도 같다. 그게 자기를 더 구속하게 되어버릴 줄도 모르고 어린 마음에 옆에 지켜줄 사람이 필요해서 태형네 집을 찾았던 거였다. 마음 속 동경쯤 되는 상대였던 김태형이 자기 눈에 익숙해졌을 때 쯤 깨달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족에게 자신의 존재는 고작 식탁에 밥숟가락 하나 얹어놓은 게 전부였다는 것을. 처음엔 가족의 상실감 때문이었는지 태형의 가족에서 조금이나마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태형의 어머니도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정국을 잘 챙겨줬다. 그럴 수록 마음이 반대로 텅텅 비었다. 어렸을 때 느꼈던 상실감을 채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예전에는 꼭 국가대표가 되겠다며 밤낮으로 했을 정도로 그 좋아하던 태권도도 취미로 밀어버리고 다시 악착같이 펜을 잡은 이유도 오로지 자립을 위해서였다. 학교를 졸업하면 태형과 같은 방에서 지낼 일은 없다. 꼭 그래야만 했다.

ㅡ 야 엄마가 빨리 들어오래

늘 똑같은 문자를 받는다. 언제까지나 제가 완전히 자립할 때까지일뿐 졸업하면 정국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졸업하고 나서 남들은 다른 걸 발판삼아 새로운 출발을 하겠지만, 정국은 아무것도 없는 바탕에서 제가 뼈대부터 세워나가야 했다. 언제까지 짐이 될 수는 없었다. 문자에 무미건조하게 알았다고 답장을 보내놓고 집에 갈 준비를 시작한다. 후배들도 몇몇 집에가는 게 보인다. 정국이 큰 가방을 메고 그제서야 체육관을 빠져나온다.

"야."
"......"
"이게 빨리오는거냐?"

사실 문자가 언제왔던 건지 확인도 안했다. 슬리퍼에 츄리닝 차림의 태형이 귀찮은 듯 터덜터덜 정국의 앞으로 왔다. 엄마가 너 데려오라고 시켜서 데리러왔단다. 정국이 그 말을 듣고 말 없이 집으로 향했다. 오늘도 늦어서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고,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서 복습을 하겠지. 똑같은 생활패턴에 불만이 생기진 않는다. 어머니의 죽음보다 더 혼란스러운 일은 없었다. 정국은 그 이후로 침묵을 좋아했고, 고요한 공간에서 자기혼자 있는 걸 좋아했다. 그런 걸 김태형이 못견뎌해서 그런 적이 없지만. 자는 것 이외에는 방에 둘 중하나는 나가있어야 서로가 편했다. 태형은 방 안에 혼자 있으면 노래를 틀고, 부러 바르작거리는 동작이 많아지는 듯 했다. 보고 있으면 병걸린 사람처럼 혼자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김태형의 무심한 뒷모습을 보면서 터벅터벅 걸었다. 앞지르지만 않도록 뒤로 바짝 붙어가고 있으니까 기분 한 번 이상했다. 차분하고 동그란 머리통을 가진 태형을 뒤에서 보는 느낌은 가슴 속에서부터 알 수 없는 벅참이 끓어올랐다. 반면에 태형은 무심한듯한 정국의 모습에 또 허탈해졌지만.

"빨리빨리 안 오고 뭐해."
"......"
"느려터져가지고."

다른사람에게는 무심한듯 자기에게만 틱틱거리는 태형의 모습을 이유없이 바라본다는 걸 애써 부정하고 싶었다. 이런 마음이 커진다면 분명 둘 중 하나는 못견딜게 뻔했다. 자기 혼자만 간직하기에는 너무 벅차고, 나누기에는 너무 힘든 이 감정이 더 커지지만 말고 딱 적당히 이 정도에서 끝이 났으면 좋겠다. 태형은 둘 째 치고 아주머니 뵐 면목이 없어졌다. 정국은 태형의 동그란 머리통에서 시선을 옮겨 정면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태형과 정국이 사는 집 앞에는 태형의 어머니가 둘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이 평화를 깨고싶진 않았다. 너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그리고 나를 아무 말 없이 저를 맡아주신 아주머니에게도.



















정국이는 가만보면 97이 아닌것같다... 어서 밝혀정국아ㅠㅠㅠ엉엉 97이 분위기있게 생긴건 도대체 뭐냐...사기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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