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어디 아프냐 진짜?"
"몰라...말걸지마, 머리아파."

이 모든 원흉인 육성재가 앞에서 알짱거리니까 속이 더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어제는 뭐 안아프다면서 그렇게 쏘아대더니 오늘은 왜이렇게 비실대냐고 옆에서 궁시렁 중이시다. 차라리 한상혁이랑 가서 쎄쎄쎄나 하고 놀지 왜 괜히 문과반에 와서 이렇게 유새인지 영문을 모르겠다가도 딱 알 것 같았다. 바로 제 옆에 박지민이 없다. 확실히 어제 이후로 정상등교한 놈은 2교시가 끝나고서도 제 반에서 엉덩이 딱 붙이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친하다는 김태형과 싸워서 냉전상태에 돌입했다고 어디서 그런 개소리를 집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좀전부터 육성재가 앞에서 시비를 거는건지 위해주는 건지, 어찌됐건 놈의 말로는 걱정중이셨다.

다행히도 같이 반이 갈라지면서 붙어다니던 한상혁은 수행평가를 잊고 안했다면서 아침부터 미친듯이 베끼는 중이라는데, 수업시간에는 수업들어야된다고 그렇게 열내다가 쉬는 시간만 되면 수행평가를 한다고 했다. 딱히 궁금하지는 않은데 성재가 옆에서 조잘거리니까 알기싫은 것도 다 알게되었다. 그래도 예전에 친구였던 정은 아직 있는 지 왜 싸웠는가, 아니면 잘 싸웠다같은 소리는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못참겠으면 집이나 가라. 평소에도 삐쩍 말라서 힘이라도 제대로 쓸까 걱정했는데, 이제는 골골대냐."
"머리울린다니까?"
"꺼져준다, 꺼져줘."

지금 분명히 제대로 힘도 못쓸거라는걸 알고 약올리는게 맞다. 아침부터 몸이 몇십대 후려맞은 것 같더라니 그냥 무시하고 등교했건만 1교시가 끝난 이후부터는 온 몸에 불덩이가 돌아다니는 것마냥 식은땀이 나고 축 쳐졌다. 몸살이라도 걸렸는갑다. 하고 아무도 안건드려서 아이러니하게도 기분은 괜찮았다. 시원한 책상에 볼을 대고 누워있다가 살짝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앞자리에서 줄곧 저를 보고 있었는지 전정국과 딱 눈이 마주쳤다.'뭘봐 새꺄.'또 무시한다. 난 아파 뒤지고 있는데 인정한번 가득하네. 한숨을 쉬며 별안간 다시 책상에 엎드렸는데 바지에서 진동이 울렸다.

[병원가. 미련하게 버티지 말고. -전정국싸가지새끼]

존나. 인정이뚝뚝 떨어지네, 어이가 없어서 울컥했나보다 목구멍이 뜨거워지면서 애써 눈두덩이를 교복으로 문질렀다. 별거 아닌데다, 심지어 말투도 싸가지가 없는게 드러나는데 왜 괜히 눈물이 났는지 정말 모르겠다. 왜 귓가에 기억에도 없는 전정국의 목소리가 맴도는지 잘 모르겠다. 이건 분명히 아파서 그러는 거야. 원래 아프면 평소에 별로 관심없던 것도 다 신경쓰이는거라고. 결국 3교시 수업종이 치고, 국사선생님이 앞문을 열고들어와 교탁을 탁탁 내려치는 것까지 확인했다. 그리고는 다시 엎어졌다. 귓가가 웅웅거리며 모든 신경이 소리로 집중됐다.

잠들고싶은데 전혀 졸리지가 않았다. 이제 더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 진급이 힘들거라는 지민의 담임선생님 말이 생각났다. 내가 졌다 박지민. 니가 뭘 하고 돌아다니던 나는 그냥 그 자리에서 기다려줄테니까 피하는 것 처럼 굴지좀 말란 말이야.

"야, 태형아 너 괜찮냐?"
"..."
"미친새끼야 이번시간 끝나고 보건실이라도 가라."

아프던, 방광이 터져버릴것같던 절대 수업과 관련되지 않는 말을 하지 마라. 국사가 처음 학기가 시작될때부터 반복한 그만의 규칙은 불문율이었다. 결국 아파서 뒤지더라도 그 자리에서 수업을 듣다가 뒤지란 뜻이라는 걸 아는지 태형의 옆자리에 앉은 민석이 소곤거렸다. 그냥 아프다고하길래 수업듣기싫어서 둘러댄거라고 생각했는데, 숨소리를 들어보니 애 상태가 말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진짜 뒤지게 생겼는데?












김태형이랑 같이 다니던 쪼그만애 있잖아, 저새끼 이름이 뭐더라?

박지민.

아, 맞다 박지민. 저새끼 중학교 때 아는 형한테 깔려서 중학교 자퇴했다가 1년 쉬고 올라왔다는데?

...

자살시도하고 그랬었대. 그 충격으로 애가 한동안 말을 못하더래...암튼 진짜 쟤네 학교에 소문 다 퍼지고 가족이 죄다 흩어져서 박지민만 이쪽으로 왔대. 와, 시발 내가 처음에는 소설쓰지말라고 그랬는데 내 친구가 소풍같은 단체사진에는 박지민이 있는데, 졸업사진에는 없는 거 보고 놀라서 와...진짜 존나 이런 경우가 있나 싶어가지고.

너 이거 지금까지 누가 알고 있냐.

나랑 걔. 이것도 그새끼가 절대로 딴새끼한테 알려주지말라고 했는데 너한테만 알려주는거야.

...그새끼한테 만약 이거 우리 셋 말고 누가 알고있다는거 들리면 죽여버리겠다고해.
그리고 너도.

...

내가 못할 것 같냐?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했어야지, 지금까지 왜 참고 있었어. 아주머니가 병실에 파리하게 누워있는 태형의 얼굴을 손으로 쓸며 애처롭게 살피고 있었다. 3교시 중간부터 애가 죽을 것 같더라니 끝나자마자 김민석이 애를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겁을 하며 애를 살피는데 끙끙 앓던 김태형이 힘이 풀려 옆으로 떨어지듯 쓰러지는 걸 본 전정국이 사색이 되어 바로 김태형을 들쳐매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신처럼 구급차 올때까지 기다리는 것 보다는 바로 큰거리에 있는 5분밖에 안걸리는 대학병원으로 직접 달려가는 게 나을거라는 생각에서 한 행동이지만, 이제껏 단 한 번도 접촉이 없던 둘 사이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놈이 분명히 있을텐데. 그래도 정국은 태형의 얼굴을 보자 그런 걱정은 눈 녹듯 씻겨내려갔다. 만약, 망설이다 자기손으로 데리고오지 못했더라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 같았다. 결국 망설임도 없이 태형을 업어들었지만.

그것도 모를 태형은 약에 취해 누워있었다. 아주머니는 근무중에 달려오시느라 오래는 계시지 못했다. 들쳐업고 달려온 전정국과 혹시 몰라 같이 따라온 김준면이 나란히 서서 병실을 지키고 있는걸 보던 아주머니는 마음이 놓인다는 표정으로 다시 돌아가셨다. 준면이 그제서야 앓는 소리를 내며 태형의 옆 의자에 걸터앉았다. 새끼가, 아프면 제깍제깍 말을 해야지. 사람 간떨어지게 아주. 약간 소란스러운 8인실에 혼자 자고있는 김태형을 내려다보고 있는 전정국은 아무말이 없었다.

"아줌마가 너 아시는 눈치시던데, 뭐냐?"
"그냥. 엄마끼리 아는 사이야."
"이야, 꿈에도 몰랐다."

같은 집에 산다고 하면 분명히 김태형이 사색이 되어 지랄을 할지 모르니 정국은 일단 둘러댔다. 뭐, 엄마끼리 아는 사이라는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필이면 아무것도 모르는 김준면이 따라올게 뭐람. 반장의 신분으로 왔다고 하지만, 정국이 보기에는 수업을 제낄수 있는 껀덕지를 발견해 아주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아오, 저걸 후려팰수도 없고. 정국은 한숨을 쉬며 비어있는 옆자리에서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영양실조에 몸살감기가 뭐냐, 하긴 이새끼 뭘 제대로 먹는 걸 본적이 없어. 걱정섞인 준면의 말에 정국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침밥은 거의 먹는둥 마는둥하고, 점심은 건너뛰는게 일수고 저녁은 그나마 반 공기 먹고 배가부르다면서 숟가락을 내려놓으니 당연하겠지. 조금이라도 참견하려하면 네가 뭔상관이냐며 으르렁거리고 달려들 김태형을 잘 알아서 일부러 말을 안 하고 있었는데, 이런 사단이 날 줄은 몰랐다. 분명 아주머니는 아침밥과 저녁밥은 잘 챙겨먹지 못해도 학교에서 먹는 점심은 여느 남학생과 다름없이 잘 먹는 줄 아셨겠지. 배가고프다면서 매점에서 뭘 또 사먹는 다른 놈들과는 달리 매점에 가서 사탕이나 사서 하나 입에 물고있는게 전부였다. 어머니에게 한 번 제대로 말이나 해 본적은 없었다.

준면은 쉬는시간인지 담임에게 전화가 걸려와 잠시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 표정이 썩는 걸 보니 병실에 계속 있고싶은 눈치였다. 준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국이 다시 앞을 향했다. 창가 쪽 자리라 햇빛이 잘 들어와 태형의 촉촉한 속눈썹이 빛이 나고 있었다. 왠지 엄청 신기했다. 지금까지 김태형의 자는 모습을 이렇게 무방비하게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던 것 같은데. 언제 준면이 올 줄 알고 정국은 자신도모르게 손가락을 들어 태형의 볼을 쓸었다. 일방적인 태형의 폭력과도 같은 터치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매일 뺀질거리더니 혹시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피부라도 가꾼건가 싶을 정도로 반질거리는 느낌에 놀라 손가락이 조금 움츠러들었다.널 내가 어떡하면 좋겠냐. 제발 내가 널 신경쓰게 하지 마. 조금의 부탁을 담아 창백하고 긴 태형의 손을 잡았다. 여자 손 처럼 얇고 가는 손가락이 자신의 굵고 투박한 손에 닿자 몸이 움찔했다. 그 흔한 터치도 없던 둘 사이에 스위치가 켜진 듯 퍼득거리며 손을 놓아버린 정국이 자신의 눈을 가려버렸다. 제발 그런생각 하지 말라고 수백번 수천번을 되세겨보고 억눌러와도 언제 그랬냐는듯 김태형에게 다가가고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깊이 빠져버렸다.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시기가 지나면 다시는 쳐다도 보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왔다. 그와의 이 시간들을 망쳐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생겨나는 욕심들을 도대체 어떻게 감당하려고.

"야, 괜찮은거만 확인하고 바로 오랜다. 하여간..."
"..."
"너 뭐하냐?"
"...아무것도 아니야. 가자."

빨리 가기싫은 자신과는 달리 빨리 이 곳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정국을 보던 준면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놈이 데려간다는거 뺏어서 데려왔으면서 같이 있기도 싫어하는건 무슨 심보야. 분명 둘 사이에 무언가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전정국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아 보여서.

"김태형 저새끼 달리는 건 무리겠지? 아씨, 그냥 다른새끼 시켜야겠다."
"..."
"그대신 너 빠지면 죽는다."
"알겠어."

김태형을 업고 달려온 이 길을 김준면과 나란히 걸어간다. 분명 달려갈땐 보이지 않던 주변이 지금은 왜이렇게 잘 보이는지 그게 더 짜증이 나서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감정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이런 사소한거 하나에도 안달이 나서 돌아서고나면 후회하게 된다.영양실조나 감기몸살이 아니라 그놈의 친구인 박지민 때문인 것 같았다. 자기 몸이나 챙겨야 할 판에 엇나가서 고민만 하다 몸이 무리를 한 것 같다는 전정국식 결론. 자기가 알고있는 박지민의 과거를 알려주기라도 하면, 김태형 성격에 가만히 못있지. 오히려 둘의 사이가 더 틀어진다던가 더 고민만 하다 둘 중에 하나는 분명 상대방을 떠날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듣지 않은 척 해 주면, 니가 더 편해질까 아니면 왜 말해주지 않았냐며 나를 원망할까. 본의 아니게 둘 사이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건 전정국이었다.

태형이 바닥으로 처박히는 소리가 들리고 보았던 국사의 사색된 얼굴을 곱씹던 김준면의 목소리가 들렸다가 학교에 진입하자 더 시끄러운 목소리 때문에 귀가 울렸다. 학교 끝나고 병원에 한 번은 들려야 할 것 같은데 벌써부터 망설여졌다. 평소에도 그렇게도 싫어하던 새끼가 자기 들쳐업고 달려서 병원에 데려다 줬다고 하면 눈물 흘리면서 고마워할 건 기대하기도 싫었다.











"너 왜 여기있냐."
"퇴원했는데."
"그러니까 왜 퇴원했냐고."

왜라니. 이제 다 나았으니까 집에 왔지! 하루도 안되서 집으로 들어온 티를 퐁퐁 풍기는 태형이 아직도 창백한 얼굴을 하며 침대에 누워있다. 그 놈의 막무가내성격 어떻게좀 해 봐라. 하면서 톡 쏘아줄 사람도 없으니 살판났다. 정국이 신경질스럽게 태형이 덮은 이불을 들췄다. 의사선생님이 분명히 너 이틀이나 삼일은 병원에 있으라고 했는데 누가 마음대로 집에 들어오냐?

"엄마한테 말하고 왔어."
"...그냥 통보한거겠지."
"성실하게 포도당 다 맞고 약도 처방받아서 집에 잘 왔어. 뭘 더 바래."

태형은 분명 누가 들쳐매고 왔든 그딴건 신경쓰지않는 눈치였다. 차라리 그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며 그래도 아직 골골대는 태형 때문에 방 안 온도를 높힌 정국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오늘 할 분량의 복습이었는데 학교에서는 김태형한테 신경한번 쓰지 않던 놈들이 김태형이 어떻게 되었나 물어보는 통에 심란해서 하는 수 없이 그냥 죄다 가져와버렸다. 너, 달리기에서 빼준대. 너 대신 김민석이 나간다더라. 태형 만큼은 아니었지만 어디가서 누군가에게 주목받길 싫어하는 민석이 나가다니. 태형의 눈빛이 커졌다. 김준면이 매점셔틀이라도 했나 무슨 일이래? 나름 억지로라도 이름 올리고 나몰라라 내뺄 줄 알았는데 선심쓰듯 물러난다니 뭐 좋네.

망설임없이 책을 펼쳐 공부를 시작하는 정국을 보고 혀를 내두른 태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학교에서도 모자라서 집에서까지 공부하는 모습은 언제봐도 너무 적응 안된다. 학교에서 그렇게도 죽을 것 처럼 했으면서 집에와서 쉬지도 않는 전정국이 언제부터 이렇게 바뀌어버렸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냥 엄마 다리만 붙잡고 쫄랑쫄랑 놀러오는 아이인줄로만 알았던 녀석이 다른 놈 신경써줄만한 여유가 생겼다는게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프다며, 자라."
"정국아."
"..."
"내가, 아파서 그러는데 밥좀 차려주면 안되겠냐?"

병원에서 뭘 잘못맞았나 생전 불러보지도 않은 정국의 이름을, 그것도 성을 어디에 팔아먹고 서스럼 없이 부르고 있었다. 김태형은 요새 확실히 이상해졌다. 보나마나 그 빌어먹을 놈의 친구 일 때문인게 확실했지만, 그걸 굳이 티를 내고 싶진 않은건지 자존심만 쎄서는 은근 다른 방향으로 티를 내고 있었다. 왜 그런지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정국은 고개를 돌려 태형을 한 번 봤다가 다시 교과서에 시선을 맞췄다. 뭐먹고 싶은데.

"아무거나."
"그러니까 뭐."
"니가 나한테 해주고 싶은거 해."

니가 먹고싶은 음식을 왜 내가 골라야 하는지, 왜 너는 한 번도 맛본 적이 없는 내 음식을 먹겠다고하는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난 정국이 거실로 나왔다. 부엌에는 가끔 아주머니가 피곤하실 때나 밥시간도 아닌데 끓여먹는 라면이 두어개 있었고 냉장고 속에는 조금씩 양념해 놓은 밑반찬이나 계란, 고기 한 근이 있었다. 혼자 있을 때는 라면이나 끓여먹었는데 저 골골대는 영상실조한테 라면을 주기가 조금 뭐해서 결국에는 고기를 꺼내들었다. 그냥 굽기만 하면 되는건데 준비시간은 쓸데없이 길어서 짜증나는 삼겹살. 기름이 사방으로 튀기는 걸 아무말 없이 바라보는데 등 뒤로 어슬렁거리며 주방으로 걸어들어온 태형이 식탁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아픈게 무슨 벼슬이라고. 태형이 눈동자를 굴려 전정국을 보는데도 정국은 접시 위에 익은 삼겹살을 올려두고 다른 반찬들을 꺼내놓기 바빴다. 같이 몇 년을 살았다고 해도 왠지 다른 모습들에 서로가 신기해서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감을 못 잡는 눈치였다. 아주머니는 자연스럽게 세명의 몫을 위해 밤낮없이 일을 하시느라 바쁘다.

"먹어."
"앉아."
"...뭐?"
"앞에 앉으라고."

병원에 갔다 오더니 생판 다른 사람이 된 건가. 들어도 믿기지가 않아서 우두커니 서 있던 정국이 아무말이 없자 태형이 짜증을 내며 자기 앞 자리를 젓가락으로 툭툭 쳤다. 나 혼자 밥 먹기 싫으니까 앞에 앉아좀 있어라, 어? 공부 하루 안 한다고 성적이 뚝뚝 떨어지냐? 그제서야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정국이 얼른 먹으라는듯 식탁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요즘에 체육관 안 가냐?"
"시험기간이야."
"아, 맞다."
"밥이나 얼른 먹어."

그제서야 밥에 코를 박는 태형의 정수리에 입꼬리가 올라가려던 정국이 괜히 코를 긁으며 숨기려고 애썼다. 심장부근이 답답해서 두어 번 주먹으로 두드린 정국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식탁아래에 둔 손을 마주쥐고 손가락 장난을 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다르게 변했다는 것 쯤은 항상 느껴왔던 사실인데 이제서야 이질감이 느껴지는 건 알 수가 없었다. 태형을 넋 놓고 보고 있던 정국이 태형이 고개를 번쩍 들자 순식간에 거실쪽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가 다시 세차게 뛰고 있었다.

"니가 그랬잖아, 1등하면 소원 들어달라고."
".....너."
"들어줄게."

안들은 것 처럼 행동해 놓고는 이제와서 소원을 들어준다고 나오는 김태형을 바라보는 정국의 표정이 미묘했다. 살짝 원망섞인 눈빛을 보내오는 정국을 모르는 척 다시 밥을 한 입 떠서 입에 집어넣은 태형이 피식 웃었다. 너 진짜 그런 표정 존나 처음보는 거 알아? 그의 말에 정국이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이라는 것도 처음이고. 어떻게 같은집 같은방에 살면서 이런 적은 처음이지? 흐하하. 김태형이 처음 전정국에게 활짝 웃었다. 항상 저를 보면 어디 하나는 비뚤어져 행동하던 김태형이.

어디 하나 결핍된 사람처럼 남일에는 참견하기 너무 싫어하는 태형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오지랖도 얼마나 넓은지 입이 쉴새없이 조잘조잘거려서 감당하기 힘들 때도 있었다는 말이 무색할만큼 그 어린 나이에 겪었던 힘든 일들을 안다면 절대 아무도 그를 원망할 수 없었다.

어릴 적 겪었던 아버지의 외도와 아버지의 애인이 태형에게 했던 폭언과 학대.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아버지는 외동아들인 태형을 데리고가길 원했고 양육권을 얻은 아버지는 곧장 본인과 새엄마가 사는 집으로 옮겨왔다. 그의 새엄마는 긴 웨이브머리에 겉모습은 항상 단정하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집에서는 꼭 원칙을 지키도록 했고, 태형이 칭얼거릴때나 아버지가 새엄마에게 소홀해졌을 때 마다 트집을 잡아 큰 벌을 주었다. 큰 매로 종아리가 터지도록 맞거나 발로 짓밟고 성희롱을 하며 그를 유린하는 등.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을 해 놓고도 아버지 앞에서는 항상 자신의 어깨를 으스러질듯이 붙잡으며 웃고 있는 새 엄마에게서 아버지를 데려오기 위해서는 자신이 침고 견디는게, 그게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항상 태형이 다른 것에 흥미를 가질 때마다 화냥년이라며 그를 여자대하듯 하며 하등취급했다. 그리고 그녀는 얼굴을 제외하고 멍과 피투성이인 태형에게 긴팔과 긴바지만을 입길 강요했다. 그렇게 형성된 김태형의 습관이 학교에서 문제가되기 전까지 계속된 치밀한 학대는 그의 반 선생님이 이상한 점을 제기하면서 끝이 났고 어머니는 그런 여자에게 자신의 아들을 보냈다는 것에 대해 큰 죄책감으로 아버지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혼자 태형을 키우게 되었다.

전정국이 김태형을 처음 본 건 집이 아니라 정국의 어머니가 입원했던 일반병실에서였다. 몸이 약한 어머니 옆에서 항상 책만 읽거나 태권도띠를 만지작거리던 정국은 어느날 들어온 온 몸이 멍투성이에 밤마다 괴성을 지르며 벌벌떠는 김태형에게 관심이 쏠렸다. 병실에서의 소문은 새엄마에게 학대받은 아이. 이게 전부였다. 태형은 항상 일주일에 두 세번씩 어린나이에 전혀 알아듣지도 못할 상스러운 말을 하며 엉엉 울었다. 태형의 어머니가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운 사이 창문으로 뛰어내리려던 태형을 살린 정국의 어머니 덕에 이 둘이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기도 했다. 자폐증상을 보이던 태형을 조금씩 호전되게 만든 건 유치원 선생님이었던 정국의 어머니였지만 오랜만에 그를 보는 날 그는 정국과 그의 어머니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다 먹었다."
"먹었으면 약 먹고 일찍 자라."
"엄마도 아니고......"

툴툴거리며 방으로 올라가는 태형을 뒤에서 물끄러미 보던 정국이 그가 먹은 밥그릇과 반찬그릇들을 정리하며 드는 쓸쓸함을 지울 수가 없어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건 좋아. 그런데 제발 내 머리속 휘젓지좀 마라. 항상 식탁에서 마주하는 아주머니의 얼굴에 죄를 지은 사람처럼 항상 밥만 먹게 했던 태형의 어중띈 태도에 정국이 괴로웠다.

'육포세대 > 삼키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뷔] 삼키다 6  (0) 2015.12.04
[국뷔] 삼키다 5  (0) 2015.11.12
[국뷔] 삼키다3  (1) 2015.09.23
[국뷔] 삼키다 2  (2) 2015.09.13
[국뷔] 삼키다  (2) 2015.09.13
blog image

Written by Zipduck

어...어...(죽어있다) 트위터 @zipzap_duck 비번 1995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