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야, 박지민 소문 들었냐. 나같으면 자살함. 게이새끼.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환청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제 몸을 껴안는다. 뭐가 그렇게 외롭냐고 누군가 따져묻지만 지민은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본인도 모른다. 이복 형이 아니라 항상 붙어다녔던 석진이 자신을 강간했었다고 사람들은 떠들고 다녔다. 그러나 그는 한 번 부정도 안하고 마치 본인이 실제 저를 강간했다는듯이 늘 자신에게 미안해했다. 왜? 늘 묻고싶은 건 항상 왜냐는 의문이었지만 자신은 그에게 묻지 않았다.

- 날 거부하면, 김석진이 어떻게 되는 지 보여줘?

악몽처럼 팔안에 가둔 자신에게 으르렁거리듯 말 하던 이복형제는 매번 저를 김석진으로 옭아맸다. 폭력적인 행위 속에서도 계속해서 석진을 언급하며 상처주고 또 상처줬던 그 기억이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떠올라서 괴롭게 했다. 머리에서는 그가 잘못이 없다고 말해도 몸이 그러질 못했다. 지민이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입에 지민의 벗겨진 교복 셔츠를 물리고 한껏 고개를 뒤로 젖혀 내장이 끄집어내질 것 같은 고통을 줬다. 그 기억이 아직도 몸에 남아있어서 밤마다 땀에 흥건하게 젖어 헉헉거리며 소스라치게 놀라서 깨곤 했다. 계속되는 환청과 악몽. 그것을 잠재우기 위해서 밖으로 돌게된다. 마음에도 없는 남자를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몸을 섞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날은 푹 잘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많이 놀랐다. 이제는 아예 마음도 더럽혀진 사람이 되어버렸을까봐 한참을 가지 않던 적이 있었지만 결국 그 악몽과 환청에 져서 발길을 끊지 못했다. 남자를 만나지 않으면 밤에 잠을 못자고 환청이 들려. 김석진이라는 이름 세글자가 계속 나를 협박해. 누가 그런 말을 믿어줄까 싶었다. 아무리 쿨한 척을 하던 김태형도 저의 실체를 알게되면 자신을 떠날까봐 무서웠다. 이미 육성재도 저를 역겨워 하지 않았는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애써 허리아래로 집어넣어본다. 그 누구도 자신이 이러고 있는 것을 알아서는 안 된다. 김석진은 이미 저를 다 알고 있다는 듯 했지만 이렇게까지 인 줄은 모른다. 결국 지민은 자신의 떨리는 몸을 이끌고 다시 그곳으로 향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민이 천장을 바라보며 심호흡하고 있는데 별안간 초인종소리가 들렸다. 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울리는 초인종소리가 환청이아님을 외치고 있었다. 김태형인가 싶다가도 요즘에는 사이가 영 아니라 그가 오지 않을 거라는것 쯤은 안다. 비척비척 걸어가 현관문 앞에 섰다. 밖에있는 사람도 지민의 기척을 느꼈는지 더이상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다. 지민이 피식 웃었다. 올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이제 집까지 알아냈네."
"미안해."
"그 좆같은 미안해 소리좀 어떻게 해주면안돼?"
"지민아."
"..."
"김재혁 죽었어."
"...뭐라고?"
"김재혁 자살했어. 지민아."

잘못들은 건가? 김재혁이 자살할 리가 없는데 김석진이 거짓말 칠 리도 없었다. 새아버지가 그의 앞길을 막지 말라며 그렇게 떠나간 지도 벌써 3년이 지나버렸는데 그가 죽을 이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복 형제는 공부도 잘 하고 앞길이 창창하다며 당연하게 본인의 희생을 요구했다. 잘 지내는 줄 알았다. 지금까지 본인이 되게 우울한 척, 불쌍한 척 했는데 이제 그걸 못하니 되게 웃긴 결말이다. 여러 사람 인생 박살 내 놓고 자기는 무책임하게 죽어버리다니.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릴 줄 알았으면 찾아가서 지랄이라도 해 보는게 나았으려나. 지민은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원망할 대상도 사라진 지금 자신이 왜 사는지도 잘 모르게 될 것 같았다. 항상 주도권을 빼앗긴 채 수동적으로 누군가의 의견만 따르고 항상 웃는 얼굴로 대답하던 자신이 얼마나 병신 머저리 같았는지 깨달아서 오히려 더 좋았지만 차라리 그 때가 아무런 걱정이 없어서 부러울 지경이었다.

"문 좀 열어줘. 응?"
"..."
"...지민아."

옆에 있길 항상 바래왔던 박지민이 다른 사람에게 망가져서 자기를 거부하고 이유없이 미워하는 건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 항상 미안하다고 먼저 사과하고 애원하고 부탁하고. 김석진은 언제부턴가 그게 당연하다는 듯 했다. 문을열자 무너져내린 박지민을 보고서도 그 앞에 앉아 그를 만질 생각도 못 하고 어깨를 떨며 지민을 쳐다보고 있는 게 너무 처량해서 지민이 먼저 그에게 손을 뻗었다. 힘들었어. 힘들어서 내가 이렇게 상처입고 절망적이라는 걸 누군가가 알아줬으면 했어.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입을 못열겠더라. 이렇게 계속, 입만 닥치고 있으면 정상인처럼은 보이더라고. 지민이 영혼없이 소리내어 웃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잡아챈 석진이 왜 이러냐는 듯 지민을 곧게 쳐다봤다. 그에게 말해도 되는 걸까 싶다가도 입술이 저절로 닫혔다. 저를 불쌍한 놈 그 이하의 눈으로 쳐다볼까봐 차마 열쇠를 뒤로 감춰버렸다. 석진은 지민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어지럽혀진 방을 쓱 보더니 지민의 팔을 잡아끌어 침대로 향했다.

"방금 전에 소식 듣고 찾아왔어. 알려주고 싶지 않았는데...그렇다고 속일 수도 없었어."
"...불쌍한 척은 내가 다 했네."

석진이 지민을 말 없이 쳐다봤다. 옛날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눈을 마주쳐오면 씨익 웃으면서 왜? 하고 묻던 박지민. 누군가는 박지민을 보고 걱정없이 살아서 부럽다고 했지만 지민이 학교를 나오지 않으면서 가장 불쌍한 애는 박지민이라고 금방 돌려서 했다. 석진은 지민을 보는 사람들의 잣대가 혐오스러웠다. 자신이 지민을 강간했다고 수근거려도 다 참을 수 있지만 지민이 무엇보다 집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눈빛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덜덜 떨면서 눈을 꾹 감고 있어도 귀로 들어온 그 음성들이 남겨진 것들마저 다 박살냈다는 것을.

지민이 손이 떨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서 심호흡을 하며 손을 잡아눌렀다. 대상이 사라진 분노와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불안감이 순식간에 지민을 덮쳤다. 박지민? 아, 그 강간당한애? 같은 학년도 아닌 사람들에게서 한참이고 오르락내리락 했던 말들이 환청이 되어 귓가를 웅웅 맴돌았다. 아무리 박지민을 잘 알고있는 김석진이라고 할지라도 너무 멀리 돌아와서 이제 그도 자신을 포기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박지민은 너무 망가졌다. 망가져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한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 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도 굳건하게 자신을 괴롭게 하던 상대의 죽음은 덩달아 자신도 무너지게 만들었다.

"지민아..."
"..."
"난 니가 필요해."
"그럴리가."
"..."
"가까이 두지 않으면 내가 그 사람처럼 자살이라도 할 까봐 그러는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 안한다는 거 어떻게 하면 알아줄래. 석진이 애원조로 지민에게 말했다. 자기가 뭐라고 이렇게 필사적인지 잘 모르는 눈치라서 석진이 나오려는 눈물을 꾹 눌러참는다. 자신도 이제 한계라는 게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지민이 모르게 해야 했다. 잘못된 애정이 사람을 끝까지 망가트린다는 것을 지켜봐왔기 때문에 얼마나 이성적인 판단을 해야하는지도 잘 알고, 지민이 자신에게 아직도 숨기는 것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석진은 눈 앞의 박지민을 두고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숨막히게 했다. 앞에 두고 있어도 그런 것 같지가 않다. 계속 서로를 난도질하는 대화는 더 이상 하기 싫었다.

"...나랑."
"..."
"자."

석진의 눈이 커졌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잘 모르겠어. 그가 멍청하게 다시 되물었다. 이제는 더 이상 되돌릴 수가 없었다. 둘 모두.






-





"안 들어가고 거기서 뭐 하니?"

태형이 꼭 죄짓다 들킨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그냥... 태형의 대답에 어머니는 소리없이 웃으며 멍하니 쳐다보지 말고 방으로 어서 들어가라며 태형의 등을 밀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걸 알아차리신건 아니겠지. 하고 방으로 떠밀리듯 들어온 태형이 책상 위에서 공부하는 정국의 옆모습을 보고는 그대로 지나쳐 침대로 향했다. 저렇게 공부하는데 달그락거리며 컴퓨터도 못하겠다. 괜히 폰을 들어 육성재가 팔을 열바늘이나 꿰맨다는 연락에 한상혁에게 그놈이 왜 갑자기 달려들었는지를 물었다. 답장이 느리게 올 모양인지 1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한참이고 대답이 없어서 그냥 폰을 꺼버렸다. 또라이는 맞지만 성격이 그렇게 모난 새끼는 아닌데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여겼다.

"...야."
"..."

사각거리는 샤프질소리가 끊기지 않는다. 단단히도 집중했는지 우주를 통달할 것 같은 뒷통수가 아무런 미동도 없이 책상에 처박혀 있다. 말 한 번 꺼내보지도 못하고 계속 끙끙 앓다가 후회할 것 같아서긴 해도 아직 전정국에게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해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말 없이 그 자리에 함께 있다가 그 일을 잊었으면 했으니까. 저 놈의 공부가 언제 끝날건지, 아마 저녁시간이 다 될 때 쯤 끝날지도 모르겠다. 쉬는 날에도 어김없이 학교 일정에 맞춰 공부하는 전정국은 정말 보면 볼 수록 인간미가 없었다. 한 번 아픈적도 없고 화를 낸 적도 없고. 찌르면 피가 초록색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본다. 그러다가 별안간 정국의 샤프질 소리가 끊겼다. 왜. 그의 대답이 정확히 20분 만에 들렸다. 태형이 반사적으로 확인해보니 정확하게 학교 쉬는시간이다.

나쁜새끼. 들었으면서도 일부러 대답하지 않은 기색이 역력해서 태형이 눈썹을 찡그렸다. 대답하는 거 기다리다가 돌아가시겠네. 태형이 부러 비아냥거리자 한숨을 쉬며 참고서를 닫은 정국이 의자를 돌려 태형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런데 오히려 태형이 고개를 돌려 정국의 눈을 피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사람이 왜 갑자기 되려 피하는지 영문을 모르던 정국이 다시 한 번 대답했다. 왜. 그러자 태형이 눈을 크게 돌리며 입술을 축였다.

"...이번 주, 주말에 시간 있냐?"
"..."
"있냐니깐?"
"무슨 일인데."

주말에 무슨 일을 하던 알 바 아니라고 쌩까던 김태형이 우물쭈물 하는 모양새가 뭐 마려운 강아지 같아서 정국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요즘 이상하다. 정말 아파서 그런건가 싶을 정도로 태형이 갑자기 자신에게 이상한 말을 하질 않나 정국의 머릿속에서만 침범해오던 김태형이 현실에서 정국의 선을 넘어오려고 했다. 딱 거기까지만이야, 한 적은 없었지만 늘 김태형은 자신의 모든 카드를 꺼내서 보여주지 않았다.

그냥, 어디 좀...같이 가자. 그냥 있기만 하면 돼. 태형의 말에 정국이 그의 정수리를 한참이고 깊게 내려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하고 짧게 대답하며 저녁먹으라고 부르는 목소리에 방을 나갔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참았던 숨을 내쉬고 침대 위에 벌러덩 누운 태형이 팔뚝으로 눈을 꾸욱 눌렀다. 자기가 언제 전정국한테 이렇게 눈치보면서 부탁한 적이 있었나. 아마도 이 번이 처음일거다. 이제 어떡하지, 고민하며 태형이 한숨을 깊게 내쉰다.

"맛있니?"
"네, 맛있어요."

태형이 먹는 것에 배는 먹을 것 같이 입에 우겨넣는 정국이 힐끗 태형이 깨작거리는 모습을 쳐다봤다. 아주머니도 그런 태형이 신경쓰인다는 듯 항상 올라오는 고기반찬을 집어 태형의 밥 위로 얹어 놓았다. 태형아 복 다 날아간다. 엄한 목소리에 정신차린 태형이 그제서야 한숟갈 입에 퍼넣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길래 방금전에도 방 문 앞에서 멍때리고 있었어. 둘이 싸우기라도 했니? 아무렇지 않게 묻는 목소리가 잔뜩 날이 서 있다.

"안싸웠어요."
"그래? 그럼 혹시 몸 안좋은 거 아니고?"
"아니야, 그냥 요즘에 생각할 게 많아서 그래."

공부에 공자도 입밖으로 안꺼내던 아들이 이제야 대학걱정하나봐. 하는 엄마의 목소리에 정국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좋아하는 거 하면서 미련 같은거 갖지말고 살아. 항상 태형에게 하는 말 때문인지 그저 이 집에서는 웃음거리일 뿐이었다. 태형이 입술을 꾹 다물면서 말을 아꼈다. 분명 어릴 때 새엄마에게 당했던 그 기억 때문에 태형에게 많은 걸 바라지 못하는 게 맞는 말 아닐까. 식탁 아래에 위치한 손이 바르르 떨렸다. 아니라고 애써 합리화 하며 눈을 감았다.

잘 먹었습니다. 정국이 일어나자마자 따라 일어선 태형이 잘 먹었다고 어영부영 말하면서 정국의 뒤를 따랐다. 반도 안먹었는데 배 안고프니? 어머니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다. 더 먹다가는 다 게워낼 것 같아서라는 말이 입안으로 삼켜졌다. 발목에 족쇠를 찬 것 처럼 질질 끌정도로 발걸음이 무겁고 쳐졌다.

"있다가 간식 가져다줄까?"
"아뇨 괜찮아요."

전정국의 뒤를 따르며 심장이 쿵쾅거렸다. 잘못을 저지른 것 처럼 마음이 좋지 않았다. 사실 엄마에게 숨긴다는 건 그녀에게 정말 해선 안될 지시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프다고 했다.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는 매섭게 치켜올라간 눈빛을 한 새엄마에게 잡아먹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마저도 비웃는다는듯 아버지는 그녀와 함께 태형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끝이라는듯 떠났으면서 갑자기 자신을 만나고 싶다고 한다. 끝까지 이기적인 사람. 그녀와의 만남이 태형의 모든 걸 어그러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잘 사는 사람에게 굳이 찾아와서 헤짚어 놓은 이유가 뭘까. 내가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버지를 찾아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까, 자기 혼자 시궁창같은 생활을 하고 있으니 억울해서라도 자길 끌고 아버지에게 했던 것 처럼 추락하려는 걸까, 아니면...!

"김태형!"
"...!하아...하..."

정국이 태형의 어깨를 잡았다. 등 뒤에서 잘 따라오던 애가 컥컥거리면서 몸을 사시나무떨듯 했다. 정말 죽을 사람처럼 숨도 못쉬고 자기 목을 쥐던 그 행동이 병동에서 봤던 어린 태형과 겹쳐보여서 눈앞이 아찔했다. 김태형은 전혀 극복하지 못했다는 듯 불안하고 겁먹은 표정으로 정국을 올려다봤다. 숨이 가쁜지 자꾸 기침을 해서 몸이 휘청거렸다. 정국이 책상 의자에 태형을 앉혀놓고 그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넌 아직 그 때의 기억에서 자라지 못한걸까. 태형이 발작을 할 때마다 겁먹은 표정으로 어머니의 침대 옆 커튼을 붙잡고 숨어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자신은 이제 태형의 앞에서 제 어머니가 했던 것처럼 불안한 그를 올려다본다. 김태형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최근까지, 아무 일이 없었다. 다시 발작을 하거나 불안해하면 다시 병원을 다녀야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세상이 전부 무너진 것 처럼 자신의 어머니를 붙잡고 울던 아주머니가 또렷하게 기억났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김태형이 다시 어린 김태형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정국이 한숨을 쉬며 눈꺼풀이 덜덜 떨리는걸 참아냈다.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은 태형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병적으로 자신을 숨기던 김태형이 이제 한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정국은 이미 깨달았다. 좀 괜찮아? 답지 않게 유한 목소리로 태형에게 물었다. 태형은 좀처럼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허우적거리듯 손을 떨며 멍하니 허공만 응시했다. 그걸 보던 정국이 태형의 손을 감추듯 잡았다. 제 어머니가 태형을 그냥 보고 지나칠 수 없던 것 처럼 정국도 마찬가지로 태형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누르고 살아도 좋으니 김태형이 무방비하게 무너져내리는 건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었다. 제발, 제발 이렇게 약해지지좀 마, 어? 쏟아져나오려는 감정을 눌러참듯 벌벌 떨리는 목소리가 김태형이 듣고 있을리가 없지만 정국은 무릎이라도 꿇고 빌고 싶었다. 자존심 높아서 잔뜩 날 선 김태형이 갑자기 무너져내리는 걸 두눈으로 지켜본 정국도 그의 두려움이 전염된 사람마냥 벌벌 떨고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들지 마. 제발.

"전정국..."
"..."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중얼거리듯 말하던 김태형의 눈물이 정국의 손등위로 떨어져내렸다. 그러나 아무도 서로에게 털어놓고 말하라고 하는 쪽이 없다. 자신의 트라우마에 먹혀버릴까봐 두려워진 김태형과 그 모습에 함께 제 감정이 무서워진 전정국은 서로의 허물어진 벽 사이를 두고 어느 누구도 넘어가지 않고 마주보고 서 있었다. 누구라도 그 벽을 넘었다가는 겉잡을 수 없이 서로를 찌를까봐.











야! 마지막주자니까 잘 못뛰면 죽는다. 알았어? 긴장해서 벌써부터 땀에 흠뻑젖은 김준면이 누구더러 협박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체육대회에 목숨건 놈들이 성난 황소마냥 관중석에서 응원도구를 펄럭이며 니가 이기네 내가 이기네 하고 있었다. 호들갑은. 첫 번째는 김준면이고 두 번째는 부반장이고 세 번째는 아까부터 욕을 중얼거리고 있는 김민석이다. 김태형 욕도 섞여있는 걸 보니 정말 나가기 싫어하는 듯 했다. 정국이 마지막주자라 라인 안에 서서 내리쬐는 태양을 정면으로 맞고 있었다. 빨리 끝내버리고 집에가고싶다. 총소리가 울리고 김준면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와, 존나 못생겼다!!! 반 놈들 중 하나가 소리치자 전부 놈들이 깔깔대며 자지러지다가 폰을 들어 놈의 눌린 면상을 찍기 시작했다.

"마지막 주자들 준비해."

진행하는 선생님의 말에 정국이 무표정으로 라인에 맞춰 섰다. 괜한 긴장감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땀이 관자놀이를 간질여서 괜히 한 번 손등으로 쓸어보고 있는데 순식간에 벌써 얼굴이 새빨개진 김민석이 벌써 반바퀴를 돌아 입으로 시발시발 거리면서 손을 내밀었다. 바톤이 넘겨지고 출발한 정국이 순식간에 두 놈을 제치며 코너를 돌았다.

- 니가 그랬잖아, 1등하면 소원 들어달라고. 들어줄게.

미친, 정국이 이를 악물었다. 소원이든 뭐든 중요한 건 김태형과의 약속이었다. 다리 힘이 풀려 넘어질 뻔 한 걸 힘있게 발을 굴러 정상페이스로 되돌아온 정국이 제일 먼저 결승선을 넘어오자 같은 반 놈들이 자지러지며 정국에게 달려들기세로 환호했다. 울컥 치고 올라오는 열기에 땀을 흘리던 정국이 모래바닥에 주저앉았다. 뜨겁게 차오른 몸 속으로 더운 바람이 들어온다. 드럽게 더운 날씨에 전력질주라니, 짜증이 치밀어 오르지만 저 멀리서 침을 흘리면서 좋아하던 김준면이 흥에겹다못해 울먹거리는 걸 보니 어이가 없어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저 띨빡한 반장놈이 어디서 감동을 집어먹었길래 저래. 다들 전정국 미친놈이라면서 환호하며 밀려오자 정국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쳤다. 더워, 가까이오지마.

"어유 내새끼 잘했다! 잘했어!"
"...미친놈."
"야 우리가 축구 져도 1등이래, 뭐먹을까?"

너나 많이 먹어. 대충 대답해주면서 고개를 돌려 관중석을 쭉 둘러봤다. 무의식적으로 쳐다보다 오늘 김태형이 아프다고 학교에 안 나온게 기억이 났다. 아침에 이불을 푹 덮어쓰고 아파. 한 마디만 내뱉던 김태형은 정국이 집 밖을 나가기 전까지 얼굴 하나 보여주지 않았다. 그날 그렇게 자신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쥤던 이후로 김태형이 자기를 조금 멀리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결국 김준면이 노래를 부르던 1등을 했는데 전혀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김태형은 모른다. 정국은 굳이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둘 사이의 벽을 새롭게 만들고 있는 김태형에게 말해봤자 이상한 관계만 되풀이 될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래도 속에서는 김태형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소원 들어줄게. 김태형을 좋아하던 자신이 아주머니 앞에서 죄인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게 괴로워서 그 마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 부정해도 속에서는 곪다 못해 썩어 문드러진 채로 가만히 멈춰 있을 것이다.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채로.

"다음 순서는 2학년 축구 결승이 있겠습니다."

방송소릴 듣고 이제야 쉴 수 있다며 고개를 돌리니 창백한 얼굴을 하고 앉아있는 박지민의 얼굴이 보였다. 요즘 김태형과 붙어다니는 걸 못봐서 그랬는지 그 날 그 통화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었는지가 궁금했다. 정말 그 소문이 사실이었는지 아닌지도 정확하지가 않은데 김태형과 투톱을 달릴 정도로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는 박지민이 눈이 부셔 눈을 가늘게 뜨고 자기 반 응원도구를 팔랑팔랑 마지 못해 흔들고 있었다. 종종 붙어다닐 때 보다 더 마른 몸을 하고 있다. 정말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김태형과 연관된 사람이니 자연스럽게 관심이 쏠렸다. 멍하니 응시하던 정국의 눈빛을 알아차린 듯 지민이 고개를 돌려 정국과 눈을 마주했다. 놀란 정국이 고개를 돌리며 애써 박지민을 무시했다. 박지민은 한참 정국을 쳐다보다 이내 흥미를 잃은 듯 다시 축구경기로 눈길을 돌렸다. 신경 쓰지 말자 하면서도 소문이 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박지민은 알까 싶었다. 다른 소문도 아니고 입으로도 꺼내기 힘든 소문들이 자기를 둘러싼 걸 알고 있을까. 정국도 이내 축구경기로 눈을 돌렸다. 사실이든 아니든 저는 방관자일 뿐이다. 죄를 짓는 느낌이 들었다.

1등은 정국과 태형의 반이 되어 코딱지만한 상금을 받고 담임이 기분이다! 피자먹으러가자! 하며 반 놈들을 우르르 끌고 사라졌다. 상금보다 내는 돈이 많다는 건 애써 신경쓰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다른 몇몇 놈들과 비슷하게 중요한 일이 있다면서 빠진 정국이 뒤늦게 교문을 빠져나갔다. 체육대회라면서 연습도 안 하고 오늘은 책이나 읽다가 자야겠다면서 걸음을 느리게했다. 마음을 느리게 먹으니 세상도 함께 느려진 기분이었다.

- 내가 아무리 속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지고 치를 떨어도 그 만큼 세상은 더 이쁜 것 같아.

김태형 네 말이 맞다. 세상은 나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런데 하나 너도 모르는게 있다. 네가 생각했던 것 보다 내가 너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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