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

말해봐.

......

니가 날 좋아한다는거?

아주 엿같은 꿈이다. 정국은 일어나자마자 보이는 천장에 침을 퉤, 뱉고싶었다. 1층에서 자고있는 저 놈이 평상시에 머릿속을 헤짚어놓는것도 모자라서 꿈까지 점령해버렸다. 그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항상 일정한 거리를 지키면서 그의 주위를 지켰다. 물론, 그에게 제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것이 뼈가 시리도록 고통스럽지만 이제는 조금 무뎌져 덜 고통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래서 그걸로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김태형은 전정국에게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자꾸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김태형을 밀어도 밀어낸 것 같지가 않고 또 한순간에 어린애들 말장난처럼 별것도 아니게 되어버린다. 아, 아침에 이게 무슨 청승이냐. 정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
"일어나"

분명 자기 목소리만 듣고 끙끙거리면서 짜증낼 놈이 인기척도 없다. 아직 아파서 그런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아래를 확인하니 녀석의 자리가 말끔하게 비워져있었다. 놈이 먼저 일어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지 곱씹어봤다. 딱히 없었다. 다음날이 기다려진다고 흥분하던 놈도 아니었고 어제 딱히 그런 기미도 아니었기 때문에 부스스 일어나 1층으로 내려왔다. 태형의 어머니만 분주하게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괜히 주위를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두리번거리자 누굴 찾는지 알겠다는 듯 아줌마는 태형이 아침 일찍 누구 만난다고 나갔다며 식탁에 마저 접시를 놓았다. 태형이 아는 사람 중에 자기가 모르는 사람이 있나?

"오늘은 태형이랑 못가서 서운하겠다."

아뇨. 아침마다 보는 젖은 머리를 안봐서 오히려 괜찮아요. 대답대신 식탁에 앉아 밥을 한술 떠 먹었다. 왠지 아침이 조용한 것 같다. 존재만으로도 큰 김태형이 없는 아침은 마치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차갑게 정국을 맞이했다. 문득 학교를 졸업하고 과연 그가 없는 곳에 혼자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할 수 있을까. 아침을 혼자 맞이하고, 그가 없는 새로운 공간에서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다가올 미래는 대답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지도 않았다. 막연하게 두려웠다. 고작 인생에서 김태형을 만난 날이 얼마나 된다고 그가 없는 공간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니.

"정국아. 오늘 일찍올 수 있지?"
"...네."

문득 고개를 들어 달력을 보니 세상이 무너진 날이었다. 4월 17일.

어머니 기일.





태형은 눈을 나른하게 뜨고서는 컵 위를 미끄러지는 작은 물방울들을 바라봤다. 주위에 다른 여러 물방울을 집어삼키며 서서히 추락하다 아래에 깔아둔 티슈에 스며든 그 모양새가 꼭 자기인것같았다. 혼자 딴 세계에 와 있는 것 같다. 왜 난 여기에 멍청하게 앉아 있어야 하며 이 사람은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아내서 아침부터 이 물방울마냥 추락하는 기분을 만끽하게 해주는 건지. 솔직히 백 날 천 날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되지 않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무의미한 행동이었지만 태형은 그냥 궁금했다. 왜 본인에겐 악몽뿐인 나를 만나려고 했어요? 만나봤자 난 가진게 없는데.

"태형아."

끝없이 추락할 것 같은 목소리로 그녀가 태형을 불렀다. 난 아무것도 몰라요하는 얼굴로 아직 젊은 그녀를 내려다보자 그녀는 태형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양 손을 바르르 떨었다. 키가 자기 허리에도 못미쳤을 때 이 여자가 어찌나 커 보였는지 그녀에게 가려진 세상은 온통 흑빛이었다. 도망칠 곳을 찾지 못해서 그 흑빛 사이로 숨어든 시간들은 이제 더이상 없지만 그 잔상이 태형을 괴롭힐 수는 있었다. 태형아, 아버지가 아프셔. 그 말을 듣자마자 생각은 머리를 거치지 못하고 허공으로 빠져나갔다. 아직 그 잔상은 태형을 괴롭힌다.

아버지는 잘 살고 있어. 그러니까 괜찮아. 이런 말은 할 수가 없는 걸까? 책임을 전가하려는 건가 싶었다. 태형이 눈을 내리감았다. 아침부터 입고나온 교복이 괜히 신경쓰였다. 꼭 어머니를 통하지 않고 저를 만나야만 하는 이유를 물었다. 접근금지 풀렸어요? 이미 예전에 접근금지명령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학교는 등교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들어있지않는 가방은 제 옆을 지키고 있었다.

"왜 나를 무서워해요?"
"..."

이 만큼이나 커서? 솔직히 묻고싶지도 않았다. 키가 유달리 작아서 약했던 아이가 자기를 집어삼킬 것 처럼 커져 있으니 혹시라도 복수할까봐? 복수는 예전부터 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녀 스스로 가라앉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태형은 피식 웃더니 가방을 챙겨들었다. 여자는 본분을 다 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오전시간 한적한 카페를 빠져나갔다. 잔뜩 움츠러든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태형을 짜증나게 했다.

"태형아. 아버지가 널 보고싶어하셔. 생각나면 그 번호로 전화해."

예상과는 다르게 가라앉아가던 그녀를 아버지는 놓지 않았고 아버지와 함께 가라앉았다. 아버지는 저에게 사과를 구하지도 않았고 그냥 더이상 연락하지 않는 것으로 사과를 대신했다. 아예 그냥 인생에서 꺼져버린거다. 태형의 의사를 묻지도 않았다. 이미 한참이고 늦어버린 학교를 이제와서 가고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냥 퇴원같은 거 안했다고 구라치고 농땡이나 피울까. 발걸음이 느리다. 김준면이 제 멀쩡한 꼴을 보고 또 열불내는 것도 딱히 보기도 싫고 박지민이 저를 피해다니는 꼴도 생각하기 싫었다. 이제 막 내리쬐는 빛을 느끼면서 가로수 사이를 멍하니 걸었다. 새상이 많은 걸 요구하는건가, 아니면 내가 별거아닌걸로 이지경일까.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마주잡고 쭈그려앉은 태형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던 그녀와의 만남은 그녀의 깊은 주름에 빨려들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았다. 고작 몇 년 지났다고 괜찮은 줄 알았냐면서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았다. 때릴까봐 두렵다는거? 가당치도 않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태형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냥 태형이 보고싶지 않은 것일 뿐이다. 뭐든 내 탓이 되어야 했던 그 때부터 그녀는 모든 것을 태형의 탓이라고 원망하고 있었다. 깊게 들어가면 갈수록 그녀가 끔찍히도 싫어했던 자신의 모습이 나오는 것 같았다. 달라진 거 하나 없다고 하는 듯한 그 눈이 앞으로도 계속 자신을 좀먹어간다.

"괜찮아요?"

그림자가 드리워져 태형의 앞을 가로막았다. 꼼짝않고 쭈그려앉아있는 김태형 앞에 마주앉은 남자가 태형을 흔들었다. 대답하고싶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둬요. 내버려두면, 잠시면 괜찮아질거니까 제발 그냥 가. 바들바들 떨리는 턱은 말소리도 제대로 못 낼 지경이라 그냥 흥미를 잃고 돌아가길 바랄 뿐이었다. 태형을 걱정하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조용해서 괜찮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눈물이 쏟아졌다. 누구라도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냥 아무말도 하지 않고 옆에만 있어줬으면 좋겠다.

차라리 학교로 돌아갔으면 피곤하다는 핑계로 하루종일 누위있을 수 있을텐데 왜 그걸 몰랐을까. 그렇게도 가기싫던 학교가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 처럼 있던 태형이 자리를 털고 천천히 일어섰다. 뭐가 어찌되든 일단 학교로 가고보잔 심산이었다. 학교에 가면 보기싫은 녀석들도 봐야하고 아직도 쌩까는 박지민도 봐야하니 머릿속이 정리될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계속 괴롭히는 여자의 잔상에게서 꺼내달라고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 괜찮아요?"
"...네."

아직도 안 가고 쭉 태형을 보고 있던 남자가 태형의 안색을 살피더니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한 번 흘긴 태형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굴이 익숙했는데 그게 어디에서 본 사람인지 기억나질 않는다.





-





"태형이 아직도 열 안내렸니?"

보약을 지어먹여야 하나...하고 고민하는 아줌마를 보던 정국이 태형이 있는 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학교에도 오질 않더니 1년만에 엄마 산소에 다녀와서 방에 들어가니까 더운 기운을 푹푹 내뿜으며 혼자 끙끙 않고 있는 김태형이 있었다. 신기루같은 새끼. 어디에서 누구랑 있었는지 말도 안 해주는 걸 보고 태형의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싫은 건 죽어도 안하는 성격은 누구를 꼭 빼닮았다고 할 수 없어서 입을 꾹 다물 수 밖에. 정국은 비실거리는 태형의 콧잔등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땀이 송송 맺혀있을정도로 푹 젖은 김태형은 위태로워 보이는데 녀석은 끝까지 뭐때문에 그러는지 이야기도 해주지 않고 혼자 앓는다. 그게 사람을 더 애태우는 건 아냐? 정국은 신경질스럽게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의 태형을 노려봤다.

전정국...? 모기소리같은 태형의 목소리를 용케도 알아들은 정국이 왜, 하고 대답했다. 다 죽어갈것 처럼 희미하게 뜬 눈이 정국을 담자 피식 웃음이 새어나간다. 왜 웃냐고 물어보는데 태형이 하는 말이 오늘 같이 못가서 미안하댄다. 팔짱을 낀 정국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항상 못잡아먹을 것 처럼 하더니 그런 건 용케도 기억하고 있어서 알다가도 모를 놈이란 건 분명했다. 미련하게 오늘 같은 날 아프기나하냐...농담하면서 웃는 김태형의 눈이 전혀 기쁜 것 같지가 않아서 정국은 맘에 들지 않았다. 신경쓰지말라고 이빨세울 때는 언제고 아파서 왜 신경쓰게만드는지 모르겠다.

"일어났으면 죽 먹고 약 먹어."
"아프다..."
"..."
"진짜 아파."

아프니까 감기 약 먹으라는거지. 정국이 무심하게 대답하자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승맞게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그 날의 기억은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학교 앞까지 가놓고 교실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다시 되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는지 처음 느꼈다. 원래 주변도 돌아보지 않고 산 지가 오래됐는데 태형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주변은 이기적이게 이쁜 색이었다. 내가 아무리 속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지고 치를 떨어도 그 만큼 세상은 더 이쁜 것 같아. 태형의 말에 정국이 인상을 쓰며 그에게로 향했다. 바보같은 말 그만하고 밥 먹기 싫으면 자라. 손바닥으로 천장을 가려주는 전정국의 온기가 따듯하다.

"존나 힘들면, 니가 대신 버텨줄래?"
"..."
"내가 못버틸것같아서..."

김태형은 얼마 못가 다시 잠들었다. 김태형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처럼 시리다는 걸 전정국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아직도 트라우마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도, 병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숨기려 하는 것도 전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국은 함구한다. 이기적이게도 김태형을 애써 모른척한다.

태형의 곁을 지키며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정국이 반짝이는 김태형의 전화를 들었다. 콩새끼? 콩새끼라고 하면 박지민이 노래를 부르고 다녔던 이홍빈의 별명일텐데. 김태형답게 무음으로 해 놓은 전화는 쉬지도 않고 연달아서 두 번이나 왔다. 혹시 급한전화인가 싶다가도 그냥 무시해버리기도 몇 번인데 그 놈의 전화는 쉬지도 않고 계속.

ㅡ 야, 이제야 받냐? 박지민 지금 또 여기로 왔는데 이번에는 이상한 남자가 박지민 데려가려고 하는데 박지민이 소리지르면서 화내고 있어. 이거 뭔상황이냐?








나 이제 김지민도 아니고 니 애인도 아니야 개새끼야. 박지민의 말에 흠칫 굳은 석진이 처참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못본 사이 많이 달라졌다. 이제 더는 웃어주지도 참고 견뎌주지도 않을 사이가 되어버린 것 쯤은 알고 있었다. 아른 거리는 옛날의 치기어린 감정들이 떠올랐다. 왜 그 조금의 희망때문에 떠나질 못하겠는지. 석진은 지민에게 용서를 구할 생각은 없었다. 얼굴만 봐도 악몽같은 일이 떠오르는 것도 잘 안다. 그래도 옛날과 같은 지 묻고 싶었다. 가시를 세우는 지민은 한참이고 석진을 노려보기만 했다. 이기적인 남자. 그저 꼬인 관계 속에서 덩그러니 멈춰있는 박지민이 이기적인 걸까. 아니면 이제와서 다시 돌려놓으려는 김석진이 더 이기적인걸까.

"이러지마. 너 일부러 이러는 거 알아."
"..."

지민과 떨어져있는 지민의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세상이 전부 내려앉은 것 처럼 울며 지민을 잡아달라고 하는 어머니의 외침에 죄인처럼 살던 본인이 직접 개입해봤자 더욱 상황만 악화될 거라고 지금껏 미뤄왔던 결정이었다. 단 한번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박지민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처참하고 절망적이었다. 석진은 지민에게 한 발 다가섰다. 지민이 움찔했다. 생각해보면, 모두에게 절망이었던 그 날에서 헤어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전의 지민은 밝다는 말 이외에는 그를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처음 본 날 저런 애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쉴새없이 웃던 애라 눈길이 자주 갔다. 딱히 깊게 생각하려 하지 않는 성격이라 어딘가 맹해보이는 것도 같았는데 주변은 사람이 끊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더 관심이 갔고, 그 관심은 금새 남들과 다른 색을 띈다. 석진은 지민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냥 계속 옆에 있을것. 힘든 일이 있으면 도움을 청하거나 기댈 것. 그리고 그것은 박지민이 중학교 2학년 때가 되고 부모님의 재혼으로 새로운 형제가 생기면서 석진과 지민의 사이는 미묘하게 흘러갔다. 이혼 한 친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며 지민을 부정하던 어머니는 이상하게도 새아버지가 데려온 그의 새로운 형에게 집착했다. 어머니의 모성애가 이상한 방향으로 표출된다는 사실을 지민은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 않고 묵묵히 견뎠다. 어머니는 항상 친아들처럼 그를 우선시 여겼고 지대한 관심을 쏟았으며 언제라도 그에게 희생될 준비를 마친 것 처럼 굴었다.

어머니의 집착이 심해질 수록 지민의 형은 지민을 찾는 횟수가 많아졌다. 성격이 좋아 친해지는 건 무리가 없었다. 지민을 귀여워해주고 챙겨주고 다른 형제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이었지만 지민은 이런 이복형제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민의 형은 형제로서 지민을 챙기는 줄 알았지만 실상은 다르게 흘러갔다. 먼저 이상함을 눈치 챈 지민은 그럴리가 없다며 합리화 했다. 형이니까, 형이니까 당연한걸수도 있지. 그는 동생이 처음이니까 내가 특별할 수 있겠지, 합리화 하면서 그는 일방적인 이복형제의 집착과 압박을 받아냈다.

그것이 성희롱인지 몰랐다가 알게 된 날. 지민은 석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석진은 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오히려 새로운 형제와 더 친해질 기회를 부러 만들고는 했다. 시기적으로 석진이 지민에게 신경써주지 못했다. 마침 석진에게 중요한 시험이 눈 앞에 있었고 항상 옆에 있어주질 못하는 자신을 대신해서 그의 새로운 형이 지민에게 잘해주리라고 믿었으니 그것이 지민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상대방에게 느꼈던 감정이 형제가 되었을 때도 지속이 되냐고 물어본다면 석진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이미 생겨버린 감정을 형제애로 아무리 포장하려고 해도 근본적인 감정을 전부 포용할 수는 없었으리라. 항상 함께했으면 했고, 자신만을 바라봐줬으면 하는 마음을 형제애로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민의 형은 과할 정도로 그에게 집착했다. 자신 뿐만이 아니라 지민과 모두를 위해서라도 접어야 했던 감정을 왜 그는 떨쳐내지 못했는가에 대해서는 당사자가 아닌 이상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남남이었던 사이가 가족이 되는 것 처럼 어려운 건 없다고 했지만 왜 하필이면 박지민이었어야 했냐고 따지고 싶었다.

"이제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그러니까..."

결국 그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을 거라고 이야기할 것이었다. 답은 정해져있었다. 석진은 애원했다. 넌 내 모든것이었고, 난 너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으며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전락해버렸음을. 난 그것을 받아들였고 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때부터 붕 떠버린 애정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은 지민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같은 집에서 사는 그와 친해졌다고 떠드는 박지민의 눈이 어느샌가부터 두려움으로 바뀐 걸 느꼈음에도 애써 괜찮다고 다독였던 게 잘못이었을까. 박지민에게 괜찮다고 암시를 걸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석진이 다가와 지민의 손목을 잡자 멍하니 내려다보던 지민이 그의 손을 거세게 내쳤다.

"니가 뭔데 나한테 부탁해?"
"..."
"항상 다 이해하는 척 하지마. 하나도 안 그래보이거든."

다 죽여버리겠다며 울부짖던 때가 생각났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앞에서 갈팡질팡했던 자신이 죄스럽기도 했지만 더 죽여버리고 싶었던 건 이 관계마저도 지옥으로 추락시켜버린 그의 이복형제였다. 그가 지민을 위함이라는 허울좋은 핑계로 자신을 이상하게 대했을 때부터 어딘가 잘못되어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자기가 조금만 더 지켜봤다면 지옥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텐데. 지민이가 다른 사람도 아닌 형에게 당하는 일은 없었을텐데.

처음에는 사실이 아닌 줄 알았다. 같은 집에 살면서 수십차례나 당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을 때는 모조리, 전부 죽여버리고 싶었다. 석진과 동시에 그 눈빛을 알아차린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새아버지. 빌어먹을 새아버지는 박지민에게 어머니에게 알려지면 좋겠냐 협박하면서 그 이복형제의 추악한 짓을 입막음했다. 어머니는 뒤늦게 일이 커지고 나서야 새아버지의 추악한 이중성을 보며 치를 떨었다. 지민이 1년 동안 정신과 치료와 실어증을 겪는 동안 석진은 지민과 어머니 집에 찾아가 하루가 멀다하고 그를 기다렸다. 처음에는 도대체 누구인데 자꾸 애를 만나려하냐고 의심했던 그녀는 시간이 지나고 석진에게 의지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지민은 석진과 어머니를 제 발로 떠나 혼자 지내기 시작했다.

"집에 가자."
"신경끄고 꺼지라고!!"

맘에 없는 소리를 하는걸 잘 알고있다. 자기는 괜찮다고 그의 형에게 맞아 다 터진 입을 하고서는 실실 웃었을 때와 지금이 다를게 없었다. 힘든 일이 있으면 기대라고 했을 땐 언제고 그날 그렇게 보냈냐고 원망하지도 않았다. 너는 그 충격으로 그 괜찮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닫아버렸고 석진을 완전한 타인으로 여기며 더이상 옆에 있기를 거부했다. 이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척 하면서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멈춰있는 걸 어떻게 지나칠 수 있겠냐고 소리라도 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석진은 지민앞에서 항상 죄인이었다. 그러고 싶었다. 지켜주기도 전에 타인에 의해 상처입은 그를 감당해 낼 자신도 없어서 이렇게 늦게 찾아온 것만으로도 자신이 얼마나 죽일 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강간당했다는 소문을 피해 다른곳으로 향했던 지민을 잡을 수도 없었다. 호흡이 거칠어진 지민이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그 휘청거리는 몸을 하면서 이제는 차라리 자기가 자릴 뜨려고 했다. 매일 밤 겪는 고열로 힘들어했던 그 감각들이 다시 몸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지민은 그토록 보고싶지 않았던 석진의 얼굴을 보며 증오가 아니라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을 뿌리채 뽑아버리려고 발악했다. 애초부터 니가 내 아들을 그런 표정으로 봐서 그런것이다, 라며 책임을 지민에게 돌렸던 새아버지도 이제 자신의 곁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의 흔적이 아직도 지민의 온 몸을 타고 올라왔다. 이럴거면 왜 찾아왔어. 불안하다며 밤중에 찾아왔던 날 박지민을 보고는 피곤함에 민감하게 반응하는거라 다독이며 돌려 보냈던 김석진은 그때 지민을 잡았어야 했다. 이제는 반대로 되어버린 상황에 치가 떨렸다.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테니까 제발 이런 짓좀 그만해."
"...내가 여기에서 뭘 하든 내가 하고싶으니까 하는 거야."
"넌 스스로를 죽이고 있어. 알아?"
"가르치려들지마."

철저하게 본인의 생각과는 다른 행동을 하고 있는 것 쯤은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고 있는 듯 했다. 지민은 눈을 감았다. 인생에서 아예 꺼져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용케도 찾아와서 모든 걸 뒤흔들어버린다. 멍청하게 넋 놓고 웃는 지민을 보던 석진이 그의 손을 잡았다.

"너도 나한테 원하는거 있어?"
"..."
"몸이라도 대주길 바래? 응?"











"김태형."

교무실 한가운데 서서 쥐죽은 듯 고개를 숙인 태형의 위로 선생님의 묵직한 손바닥이 내려앉았다. 그냥 아팠어요, 하면 될 일을 인정해버리면 지금껏 덤덤하게 대해왔던 그녀에 대해서 의식하는 꼴이 되어버리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나서 입을 닫아버맀다. 조용하더니 또 시작이냐. 그의 물음에 그냥 대답을 포기한다. 이해를 바랄 수도 없으니 수업을 빼먹은 건 오로지 본인의 책임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얼마 전 쓰러졌던 놈이라 뭐라 크게 혼낼 수도 없고 그냥 한 번 불쌍한 듯 쳐다본 선생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고만 일러줬다. 태형이 그나마 맘에 드는 사람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딱 그 정도로 일러주고 끝내버리는. 책임은 오로지 태형에게만 있다는 그 모습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자기가 정말 돌아버린건가 싶었다.

말 없이 돌아선 앞으로 불쑥 누군가가 태형의 앞으로 지나쳐갔다. 정수리를 보아하니 박지민이 틀림없었다. 저새끼 아직도 쌩까네. 그의 걸음을 눈으로 쫓던 태형이 본인의 담임에게 향하는 지민의 모습을 보고 다시 돌아섰다. 언제부터 오는 지민 가는 지민 막아섰냐만은. 적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하루아침에 본래 병신같은 모습으로 저를 찾아올거라 믿었던 예상을 아주 엇나가고 있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으니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었다. 딱히 문과반에서 친한 놈도 없는데 이제 아예 혼자가 되어버린건가 싶기도 하고. 평소에는 그냥 좀 꺼져줬으면 하는 존재가 빈자리만 남기고 떠나버려서 그 자리를 곱씹어야 하는 김태형은 그 생소한 감정에 어쩔 줄 몰라할 수 밖에.

태형이 수업 중간에 자리로 돌아오자 몇 놈들의 시선이 태형에게로 머물러 있다가 소근댔다. 금방 뒤져버릴 것 처럼 쓰러졌던 새끼가 팔다리 휘적거리면서 아무렇지 않게 들어오니까 좀 신기한가 싶어서 태형은 부러 바르작거리며 자리를 정리했다. 한숨을 쉬며 정면을 바라보자 앞자리에 있던 전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엄마한테 수업 제낀거 들통나면 큰일 날 텐데. 놈이 말 하지 않을까. 태형이 엄지와 검지로 지이익 입지퍼를 닫는 시늉을 했다. 여전히 무표정으로 흘기던 전정국은 그러리라는 대답도 없이 다시 수업에 집중한다. 될 대로 되라지 뭐 어쩌겠어. 아무리 발버둥쳐도 안되는 건 애초부터 그냥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야, 난 너 뒤지는 줄 알았는데. 괜찮냐?"
"안뒤져서 죄송."
"박지민은 어떻게됐냐."

그놈의 박지민 이야기할 때면 고갤 살짝 숙이고 목소리를 낮추는 이홍빈을 가소롭게 보던 태형이 물었다. 야, 넌 박지민한테 졸라 맞은 적 있냐? 뭘 그렇게 무서워해. 그 말에 홍빈이 언제 자기가 걜 무시했냐면서 욱해서 반박했다. 쫀거맞네. 태형이 속으로 그렇게 단정짓고 알았다며 홍빈을 진정시켰다. 계속 놀리면 끝도 없을테니 그냥 어르고 달래주자는 심산이었다. 홍빈은 아직 태형과 지민이 냉전상태인 줄 모르는 듯 어서 태형에게 해결책을 요구했다. 그런 거 알았으면 진작 하는 시늉이라도 했겠지 새끼야. 꼭 김태형만이 박지민을 구할 수 있는 용사라도 되는 것 처럼 그렇게 굴어서 더 짜증난다는 거였다.

"어제 내가 전화했을 때는 받아놓고 씹더니."
"받은 적 없어 병신아."
"받은거 같았는데?"
"그 꾸진 폰으로 거니까 병신같지."

시발 스마트폰 쓰는 너희들이 깡패지! 폴더폰을 쓰다듬으며 으르렁 거린다. 저건 또 시대를 역행한다면서 지랄이다. 그런거에 연연하지 말고 성적이나 신경써라 븅신아. 남말할 처지가 아닌데 이홍빈이 버럭했다. 야, 너는 다 찍어도 그정도 나오니까 나같은 새끼는 별거 아니다 이거지? 그의 말에 태형이 웃었다. 아니 병신아 니가 경찰되고싶다며 아니었냐? 이미 틀려먹었다고 이홍빈은 눈물을 머금었다. 꿈은 꿈인가보다 그치?

마침 기다렸다는 듯 나란히 앉은 홍빈과 태형의 위로 고함소리가 내려앉았다. 야, 육성재랑 박성우랑 싸운대! 그 말에 이홍빈이 퍼드득 일어섰다. 육성재라고 했을때 설마 박지민이랑 싸우는 건가 했는데 다른 새끼라는 사실에 의아했다. 또라이같은 새끼였어도 성격은 물렁한 줄 알았는데 뭘 잘못먹었나. 느릿느릿 움직이는 태형과는 다르게 다른 새끼들은 다리에 모터라도 달았나 단번에 이과반으로 달려갔다. 존나 영양가 없을텐데 밥먹기 전에 체력 방전될 것 같이 뛰어가는 놈들의 뒤를 쫓은 태형이 어디한 번 보겠다고 사이를 비집고 들어섰다.

"이 씨발 새끼가...다시 말해봐!!!"

이홍빈이 턱을 덜덜 떨며 옆에서 말했다. 저새끼 진짜 돌았나본데? 그도 그럴것이 팔뚝에 피를 잔뜩 흘리면서 반대쪽 팔에 한상혁이 매달려 있었다. 아 시발! 육성재 이 개새끼야 정신차리고 병원가라고! 상혁이 소리치자 들리는지 안들리는지 모를 육성재는 놈을 때리려고 달려들었다. 타이밍 비슷하게 놈들의 담임이 소리 치면서 들어왔다. 애들을 돌려보내는 다른 선생의 고함을 들으며 반으로 돌아오려는데 뒤에서 밥먹으러 존나 빨리 나간 줄 알았던 박지민이 서 있었다. 표정이 가관이었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태형이 뒤돌아 빠져나가는 지민을 쫓았다.

너 육성재랑 무슨 일 있었지. 안 그랬으면 저새끼가 저정도로 미칠 놈도 아니고 니가 그런 표정 짓고 있지도 않았을테고. 영문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태형이 물었다. 박지민이 대답이 없다. 또 좆대로 대답만 할거면 이제 다시는 안 봐 개새끼야. 극단적으로 짓거려댄 것 치고는 태형의 차분한 얼굴을 보던 지민이 떨리는 손을 뒤로 숨겼다.

"넌 내가..."
"..."
"...더러워?"

그동안 했던 통보식 대답은 아니라 신선했다. 그래도 어이가 없는 건 똑같네. 태형은 고개를 저으며 또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니가 무슨 지랄을 하건 난 신경 안써. 그의 말에 박지민이 다 죽어갈 것 같던 표정을 지우며 웃었다. 무슨 대답을 바라고 물어봤던 건데? 태형이 묻자 박지민은 그냥 그 말이 듣고 싶었댄다.

"그동안 왜 피했던건데?"

꼭 그렇게 따지고들어야 하냐며 나무라지도 않은 지민은 그냥 육성재가 다쳤으니까 찾아가봐야되는 거 아니냐면서 실실 웃었다. 저 새끼가, 자기 일은 쏙 빼놓고 말하는 게 아주 도가 튼 새끼네. 태형이 괜히 아랫입을 물며 지민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너 나 친구 맞긴 하냐? 그의 말에 지민이 웃는다. 당연하지. 나름 시원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김태형만 엄청 답답해 죽을 것 같다. 일부러 엿먹으라고 하는 것 같아서 서서히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때 쯤 지민이 태형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지말고 그냥 좀 넘어가주면 안되냐? 육성재가 왜저러는지 나도 모르는데. 정말 연관없냐는 태형의 말에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이 한숨을 쉬며 반으로 향했다. 지민이 거리낌없이 태형의 뒤를 쫓았다.

태형은 교실에 도착 하자마자 아직 저장되어있지 않은 11자리 번호를 맨 위에 띄워놓고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사실을 왜 엄마가 아니라 나에게 먼저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옛날 이후로 눈 앞에 한 번 나타나지 않았던 아버지는 그렇게 그 여자가 좋았던걸까, 하고 의문이 들 뿐이었다. 가봐야 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이제는 본 지 한참 지난 아버지가 자기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심각한 상태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혼자서는 절대 가지 못할것 같았다. 태형이 정국의 곧은 뒷목을 응시했다. 저 찔러도 피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은 자식과 같이 간다면 괜찮을까? 녀석의 무덤덤한 표정에 덩달아 아무렇지도 않게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솔직히 전정국에게 자신의 위독한 아버지를 보러 가자고 이야기하지 못한다. 둘 사이에는 암묵적으로 가정사를 이야기해본 적이 없었고 하더라도 누군가를 통해서만 이야기했다. 그래서 자신이 누구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하는지도 안중에 없을테고. 아버지나 그 여자를 다시 본다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게 뻔한데 사람이란 게 참 이기적이었다. 가슴 한켠에 남은 의구심 때문에 그런 리스크 하나 쯤 감수하려했다. 사실 자신이 아무런 말 하지 못하고 그냥 멍하니 아버지의 모습만 눈에 담을 것이라는 걸 잘 안다. 그래도 그 여자의 말이 뭐라고 태형을 고민하게 만드는건지.

"아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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