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구멍이 따가웠다. 한 두번은 눈을 뜨려다가 말았다. 발치에 그가 다가서서 물었다. 아직도 자고 있는거야? 일어나서 뭐 좀 먹어. 응? 어르고 달래는 목소리에 눈을 떠서 그를 올려봤다. 깊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뺨을 감싸쥐는 손길에 훅훅 열이 올랐다. 간 밤에 한참 앓는 소리를 내다가 그대로 잠이 든 것 같았는데 석진이 그걸 알고 찾아온 건지 눈이 잔뜩 쳐져있었다. 괜찮다고 말 하기가 힘들어서 눈을 감고 감싸쥔 그 손등위에 손을 겹쳤다. 아무것도 못하는 나를 여기까지 오르게 한 나의 구원자. 바라는 건 내 곁을 떠나지 않는 거였어.

- 박지민.

그의 목소리에 놀라 눈을 번뜩 떴다. 오래 전부터 내 이름을 불러주길 바랬지만 이건 아니었다. 방금 전 기색은 어디로 모습을 감췄는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지민을 내려다보고 있는 석진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 왜, 왜그래? 위태로운 눈빛으로 다시 그에게 손을 뻗자 그는 닿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공만 쥐고 그대로 떨어진 손을 다시 감춰잡지도 못하고 처연하게 그를 쳐다보자 석진이 입을 열었다. 기억하지 말라고 했잖아. 도대체 뭘 기억하지 말란 것인가. 지민과 석진의 거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마치 시공간에 균열이 생긴 것 처럼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가 닫혔다.

- 위선자.
- 아니야...제발.

머리를 부여잡은 손이 자유롭지 못했다.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매섭게 떨어지는 눈물을 누가 볼까 감춰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엘레나가 죽자 모든 요원들의 총구가 쓸모없어진 자신에게 향할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내 곁에 있으면 죽고 말거야. 날 버리고 도망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등을 보이며 사라지는 것 밖에 없었다. 내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그는 이제 영원히 내게 올 수 없다고 해도 좋다고 합리화했다. 그걸 알면서 시작한 관계는 당연하게 지민을 상처입혔다. 새어나오는 신음을 감출 수도 없이 그렇게 앓았다.

- 나약해 빠졌군.
- 왜...왜 죽이지 않았어?!
- 난 널 죽일 권한이 없어. 내가 널 죽일 수 있었으면 넌 이미 4년 전에 죽었지.
- 으흑...으...

엉망으로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기척없이 다가온 사토우는 지민을 차갑게 내려봤다. 그는 구원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지민을 지옥으로 잡아끌지도 않을 것이다. 영원히 그 자리 그대로 있길 바라겠지. 몇 번의 괴로움과 몇 번의 발작들을 평생동안 반복하며 혼자 처량하게 잠식해가기를 기다렸다가 한 입에 잡아 삼켜버릴지도 모를 그 눈빛으로 지민을 응시하고 있었다.

편해지길 바래? 그가 물었다. 지민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어 고개를 떨궜다. 지민이 지금껏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알면서 편해지고싶냐 묻고 있었다. 사토우는 재촉 없이 지민을 기다리는 듯 줄곧 기척없이 서 있다 지민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모든 걸 끝내야 한다는 사실을 외면하지마. 지민이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을 때도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당신은 뭔가를 알고 있어? 모든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지민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제발 알려줘. 내가 편안해질 수 있는 법을.

- 결국 너도 똑같군.
- ...
- 네가 엘레나라도 되겠다는거야?
- 아니야, 난...!!!

다른게 뭔데? 너도 무책임하게 죽어버릴거잖아.

'아니야...!'

지민이 눈을 뜨자 그곳은 이상하게 약품으로 가득찬 유리관 속이었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한채 온 몸이 마비된 사람처럼 멍청하게 둥둥 떠다니는 꼴이 이상했지만 정확한 것은 정신을 잃은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작게 뜬 눈을 굴려 밖을 보려 했지만 희뿌연 시야가 제대로 인식 할 리 없었다. 미약하게 발버둥치던 자신의 손끝만 조금 보일 뿐이었다. 뭐때문에 죽지않고 이 엿같은 유리관 속에 진열될 수 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보다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 죽기 전 마지막 기억은 아닌지 떠올렸다. 자신들을 배신한 지민의 머리를 열어 연구에 써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지민이 꿈틀거리자 유리관에 불빛이 비춰졌다. 약물이 진동을 하며 유리관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던 지민이 서서히 머리부터 빠져나오자 바닥으로 널부러졌다. 이상하게 온 몸에 힘이 없는 걸 보니 약물에 취해 정신만 또렷한 상태였다.

"박지민. 정신 들지?"
"..."
"당분간은 움직이기 힘들거야."

초점이 맞지않는 눈을 깜빡이며 희미한 불빛을 가린 인영을 응시했다. 그는 날카로운 목소리와는 다르게 나긋한 억양으로 지민을 어르고 달랬지만 전혀 깊게 와닿지 않았다. 이제 기억속에서 희미해진 사토우의 목소리가 제 귓가를 울릴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었다. 뭐라 말을 하려던 지민이 입술조차 달싹거릴 수 없는 답답함에 짧은 숨소리를 토해내며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앞으로 난 어떻게 될 것인지, 혹시 기억이라도 지워져서 다시 필리아를 위한 사람이 될지 아무것도 몰랐다.










12 : 기억










지민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할거라는 사토우의 말과는 달리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반나절을 고생해야만 했다. 꽤나 협소하고 좋지못한 환경에 혼자 누워있어야했지만 연구실의 딱딱한 침대보다야 낫다며 위로했다. 가정집의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는데에만 오랜 시간과 힘이 들었다.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어 멍청하게 앉아 시간만 떼우고 있는데 문을 열고 들어온 사토우는 아직 손가락하나 움직이기 힘들텐데, 독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옛날 그대로야. 그는 과거를 들먹이며 침대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내가 널 죽이지 않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지금 죽여."
"푸하, 그래. 그렇게 말하길 원했어. 자기가 정의를 지키는 것 마냥 그렇게 떠들어대길 원했다고."
"..."
"네가 잃어버린 기억에 치를 떨길 바래."

기억을 잃어? 그건 내가 아니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야."
"그건 네가 알아서 떠올려야지. 부모도 그런건 안해준다고."
"무슨말하는거야!"

지민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흥분하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누군가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내가 뭘 보고있는거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을 보던 지민이 몸부림쳤다. 그는 다가오는 남자에게 극심한 거부반응을 느끼며 몸부림쳤지만 벌벌 떨리는 몸은 아직 감각이 둔해 피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엘레나를 따라 필리아에 처음 들어왔을 때도 몸 속에 있던 모든 죄책감들을 찔러올려 감각을 무뎌지게만들 것 처럼 들어오던 바늘의 감각은 몇 년이 지나도 잊혀질 수가 없었다. 지민이 누운 침대가 달달 떨렸다.

남자는 트레이를 들고 천천히 다가왔다.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영원의 시간이 될 것 같았다. 난 그동안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나. 잠깐 드는 회의감에 지민이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흘렸다. 이 모든게 환상이지? 그렇지?

지민의 애원에도 무심하게 응시하던 사토우가 남자에게서 주사기를 빼앗듯 가져와 지민의 팔에 꽂아넣었다. 눈을 뒤집어깐 지민이 정신을 잃는 것 까지 확인하던 사토우는 한숨을 쉬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










"우욱...!우..."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남자의 입에서 온갖 음식물이 터져나오듯 바닥에 철퍽철퍽 깔렸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아파하는 걸 눈으로 흘깃 보던 지민이 고개를 돌렸다.

실험체 46번. 젠. 앞으로.

짧은 기계음이 들리고 방금 전 속을 전부 게워낸 남자를 짐짝처럼 실어나르는 요원들이 보였다. 두 번째 실험에서 거부 반응만 벌써 10번째였다. 제가 그 11번째를 화려하게 장식할지도 모르는데 익숙한 걸음으로 걸어가 실험의자 위에 앉았다. 푹신한 가죽 시트가 요람을 연상케 했지만 양쪽으로 온갖 장비들이 달려있는 것이 마치 집어삼키려고 존재하는 아귀처럼 지민에게 쏟아져내리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 호흡 정상. 맥박 정상. 뇌파 이상없음.

차분하게 기다리며 클래식 음악따위를 머리속에서 흥얼거렸다. 조금 더 빠르게, 천천히 느려졌다가 다시 빠르게! 뉴햄프셔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유일하게 무용을 배울 수 있는 곳. 낡은 마루바닥이 비명을 지르던 곳을 상상하며 바늘이 혈관을 찔러올리는 선명한 감각을 지웠다. 사실 매일같이 먹어야하는 빵 몇조각이 전부인 식사는 아침 화장실 변기에 처박아버렸다. 적어도 11번째의 남자는 앞서 10명의 사람보다 깔끔한 모습일테지. 온몸의 모세혈관이 요동치며 근육이 조여들었다. 자연스럽게 몸을 움츠린 지민이 고개를 뒤로 쳐들었다. 아아, 아. 제발. 7번째 남자가 지르던 비명소리가 떠올랐다. 제발 죽여줘. 날 죽여줘!!

그리고 거짓말처럼 다시 숨통이 트였다. 온 몸의 혈관들이 바르르 숨을 토했다. 토악질할 것 처럼 기침하던 지민이 가래침을 내뱉었다. 46번 실험체, 저항없습니다. 그렇게 줄지어선 무리들을 빠져나왔다. 다양한 인종의 눈들이 지민의 얕은 숨으로 섞여들어왔다. 오늘로 두 번째였다.

"헤레이스."
"기다리고 있었어."

엘레나에게 붙잡혀 필리아에 강제후송된 이후 실험실에서 처음 본 게 헤레이스였다. 첫번째 순서였던 헤레이스의 성공으로 그들은 조금 화색이 도는 표정이었지만 연달아 토악질을 해대며 살려달라 비는 여러 남자들에게 잔뜩 실망했을 것이다. 지민은 익숙하게 주먹을 맞닿았다. 실려가면 잔뜩 놀려먹어줬을텐데. 아쉬움을 표하는 헤레이스의 뒤로 세 번째 남자가 뒷목을 쓰다듬으며 얼떨떨하게 들어왔다. 키가 족히 2미터가 될 법한 장신이었다. 그의 뒤로 몇 명의 사람이 더 들어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작은 소녀도 함께인것을 보니 특정 약물에 저항이 없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듯 했다. 지민은 안도할 수 있었다. 손써보기도 전에 닿을 수 없을까봐. 사실 극심한 고통보다 더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등 뒤에서 좀 전 7번째남자의 비명소리와 총소리가 함께 들렸다. 잔뜩 굳어진 헤레이스의 얼굴을 보던 지민이 눈을 돌려 제 앞의 남자를 응시했다. 등 뒤에는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 폐기처분 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왜 이곳에 왔을까. 무엇을 바라고 온 것일까? 괜한 의문이 들었다. 남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생각보다 많군. 그의 말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아오키라고 합니다."

그의 옆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지민은 아오키의 얼굴에서 시선을 옮겨 그녀를 쳐다봤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피하지않고 지민을 계속 보고있을 뿐이었다. 지민은 피어오르는 원망에 주먹을 쥐었다. 지민이 엘레나에게 납치당한 건 석진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석진은 자주 엘레나의 행적에 대해서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눈을 했다. 엘레나의 오래된 부재와 그것을 이해하는 아버지가 석진에게 끝없는 의구심과 동떨어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다. 그 날도 엘레나가 다시 돌아가는 날이었고 석진은 누군가를 쫓아가다 공항에서 사라졌다. 엘레나가 항상 뉴헴프셔에서 먼거리를 오간다는 걸 알고있던 지민은 그녀에게 물었다. 석진이형이 어디있는지 아시죠?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민을 쳐다봤다. 석진과 지민이 항상 함께한다는 걸 알고있었다. 엘레나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그 말과는 달리 엘레나가 처음보는 표정으로 지민을 응시했다. 마치 마음만 먹으면 그자리에서 목을 꺾어 지민의 숨통을 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민이 끝이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석진이형이 어디있는지 아시는거잖아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도울게요. 저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못하고 이렇게 손놓고 있을 수는 없어요. 제발 돕게 해주세요. 지민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괴로워했다. 엘레나는 지민을 말 없이 쳐다봤다. 네가 뭘 해줄 수 있니? 뭐든 할게요. 그의 대답에 엘레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아들을 사랑하니?

네 사랑해요.

언젠가 꼭 말하고싶었던 사실을 이렇게 꺼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괴로웠지만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 날 지민이 엘레나와 그의 파트너인 사토우란 남자에게 이끌려 이 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두 달의 시간이 흘렀다. 지민은 제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들에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정말 만날 수 있기나 할까. 수십 번 골방에서 홀로 숨통이 끊어지는 꿈을 꿨다. 지민은 어리석은 선택이 되지 않길 간절하게 빌며 헤레이스와 함께 긴 시간을 보냈다. 계속되었던 약물실험에서 그렇게 400여명 중 32명이 살아남았다고 했다.





32명은 격리되었다. 각자의 방에서 정해진 시간에만 자유를 주었으며 그 외의 시간에는 전투적인 훈련을 받았다. 약물에 신체능력이 비이상적으로 높아진 2미터의 거구는 격리된 지 4일째부터 옆 방에 있던 같은 실험체의 몸을 찢어놓았고 그와 동시에 거구의 눈알도 터져나와 바닥에 굴러다녔다. 마치 몸 속에 괴물이 자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불안감이 심어졌다. 누군가가 날 죽이거나 나도 누군가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것. 남은 30명의 사람들은 자유시간에도 방에서 나오는 일이 적어졌다. 헤레이스와 지민은 처음 들어왔을 때 부터 같이 움직인 터라 남들보다 신용이 두터웠지만 부러 접점을 만들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서로 중 하나가 미쳐서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길 바랄 뿐. 지민은 자유시간에 혼자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누군가의 희미한 울음소리도 함께인 날이 있었는데 어제 한 명이 사라진 이후로 들리지 않았다. 남은 사람은 27명. 동양인은 헤레이스와 지민이 유일했다.

아오키 사토우. 엘레나의 파트너는 항상 죽으라는 말을 입에서 떼질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지민에게도 괴로우면 죽어버리라는 악담을 퍼붓곤 했는데 엘레나는 그의 언행에도 아무말 없이 차트를 작성하거나 정기적으로 있는 교육에만 관심을 뒀다. 지민의 선택이었지만 가끔 그녀의 무심한 눈빛이 생각이 나 이유없이 울컥하곤 했다. 여기 존재하는 이유마저 앗아갈 것 같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자길 버리고 갈까봐 하루에도 수십 번 그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여섯 번 째는 지민의 앞에서 목을 메고 죽었다. 혀가 길게 내려온 건 둘째치고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온갖 분비물은 전부 흘러내린 직후였다. 악취가 건물에 진동을 해서 차마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결국 내가 죽어도 저런 모습일게 뻔하잖아. 절대 다른사람의 경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차하면 정신을 놓고 자기 목이라도 조를 것 처럼 주기적인 투약과 교육을 빙자한 정신학대는 열 다섯명이 남을때 까지 계속됐다. 절반이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마른 사람처럼 갈구하는 이유는 아직까지도 놓을 수 없는 김석진에 대한 사랑과 갈망 때문이다. 약물에 절어 남의 목을 물어뜯는 한이 있더라도 놓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자신에게 모든것을 내어준 사람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몸부림. 한참을 뒤쳐져도 언젠가는 도달할 도착점. 그 이상의 무언가를 찾을 수 없는 존재였다.

"헤레이스. 네가 여기 들어온 이유가 뭐라고 했지?"
"살기 위해서."
"..."
"왜?"

헤레이스는 선교목적으로 간 타지에서 내전에 휘말려 가족을 잃었다고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2년을 정글에서 방황하다 작은 부족을 만나고 그들의 도움으로 빠져나와 흘러들어온 곳이다. 이 곳이 어쩌면 지옥일지도 모를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헤레이스는 모든 잡념과 희망을 놓아버린 사람처럼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 지민은 철제 의자에 앉아 미친 사람처럼 절뚝거리며 빠르게 걸어다니는 여자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조만간 정신을 잃은 채로 실려나갈 것이 뻔히 보였지만 그것마저 허용되지 않는 곳이었다. 이미 비이상적으로 높아진 신체능력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미쳐버리거나 몸이 산산조각났다. 하루에도 수십 번 발작처럼 온 몸이 요동치는 고통에서 헤어나오면 어김없이 다시 약물을 투약받았다. 누굴 도와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기서 적응이란것도 하네. 지민이 미친사람처럼 웃었다. 헤레이스가 눈알을 굴려 저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마지막 투여일이 가까워질때마다 반대로 엘레나의 얼굴은 점점 심연으로 빨려들어가는 표정이었다.

"46번. 살고싶나봐?"

지민의 뒤에앉아 아침에 나온 샌드위치를 우적이던 한 중년 남자가 물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죽을것처럼 피골이 상접한 남자였지만 두 눈은 지민을 곧게 응시하고 있었다. 지민이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반드시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어. 이유에대해서 함구하고있던 지민이 쉽게 입을 열자 헤레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헤레이스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해해달란 말은 안해. 난 그게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이니까."
"그렇군. 나도 내 딸이 사라지기 전에 못할 게 없었지. 내가 미친건지 아니면 저들이 미친건지 모르겠어 이젠. 여기까지 버틴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칭하더라고. 임상실험도 거치지않은 약물을 투여받고 여기까지 살아남은 게 이제 겨우 10명밖에 안 남았어.  그런데 생각이 조금 바뀌더군. 여기에서 놈들이 마지막 실험을 할까?"
"..."
"우린 좋은 실험체야. 약물을 수십 번 투여받고도 버젓이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그렇겠지. 어디가도 못 구할 실험체들에게 요원들의 자격을 줄거냐 이 말이야."

지민은 말도 안되는 소릴 들으며 뒷목이 뻣뻣해졌다. 개같은 소리 짓거리지말라며 무시했을 말이 누가 뇌에 쑤셔박기라도하는듯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혀에 꿀을 발라둔 독뱀처럼 남자는 제 멋대로 추측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수 백명의 폐기처분과 다시 들어오게된 또다른 실험체들. 엘레나는 자신의 아들을 찾겠다는 그 말을 한 지민을 믿은 적이나 있었는가? 그렇게 따지자면 지민은 애초부터 엘레나에게 속은 것과 다름없었다.

우리 특정 주파수에 반응하도록 만들어진거야. 다만 그것 뿐이야. 우린 요원과 관련된 훈련을 받은 적도 없고 아오키라는 남자는 우리에게 단 한번도 이름을 불러준 적이 없다고. 우리도 그렇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서로 번호로 부르고 있잖아. 이름을 알면서. 남자가 분노한듯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감았다. 남자는 딸을 찾기 위해, 헤레이스는 살기 위해 이 곳에 흘러들어왔지만 단 한번도 그 목적에 다가설 기회조차 없었다.

"필리아 내부에 반란군이 있어. 얼마 전 큰 소란이 있을 때 몰래 빠져나와서 들은거야. 그 곳에 들어가면 아마 빠져나올 수 있든 아니던 뭔가는 할 수 있겠지."
"그런 걸 왜 우리한테 말하는거지?"
"저 놈들 보고 있으면 그런 소리가 나와? 이미 죽어가는 놈들한테 이런 소릴 짓거려봤자 희망고문일 뿐이야."
"..."
"살 수 있는 사람은 살아야되잖아. 난 이러려고 여기 온 게 아니라고."

그들의 앞에는 약에 절어 사리분간 안되는 사람이 절반이었다. 미친듯이 웃기도 했고 송장처럼 누워 남은 시간을 흘려보내려는 듯 숨만 쉬는 사람도 있었다. 남자는 용건이 끝났다는 듯 등을 돌려 지민과 헤레이스에게서 떨어졌다. 감시카메라가 머리 위에서 돌고 그 아래에 있는 여자아이가 피를 쏟으며 바닥으로 처박혀 온 몸을 비틀고 있었다. 석진과 몇년 전 처음으로 보았던 좀비 영화를 연상케했다. 곧이어 아이는 장기를 역류했다. 지민과 헤레이스의 등뒤에 있던 출입구로 여러 명의 연구원들과 군인들이 뒤엉켜 들어왔다. 또 한명이 죽었다.





"헤레이스, 넌 저 미친놈 말을 믿어?"
"난 살려고 여기들어왔어. 근데 그 남자 말 전부 맞잖아. 요원은 무슨 뒤질 때까지 실험만 당하다가 소모품처럼 버려질텐데. 내가 왜 여기 있어야해?"
"너 정말..."

지민은 고개를 가로젓다가 손을 내리고 한숨을 쉬었다. 다 맞는 말 맞아. 근데 반란군 놈들이 뭘 목적으로 필리아를 공격하는지도 모르고 반란군으로 가겠다고? 너 여기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생각해봤어? 지민이 그를 응시했다. 헤레이스는 지민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대답했다. 젠, 우리 여기까지 잘 버텨온 건 네 덕이 커. 그런데 이건 아니잖아. 너도 만나야할 사람이 있는데 여기에서 시간만 허비하고 갈 수는 없잖아. 맞지? 그렇게 말하는 헤레이스의 눈은 확신에 차 있었다.

"내일 밤 한번의 소란이 더 있어. 그 때 둘이서 밖으로빠져나갈거야. 너도 같이 가자."
"...난."
"내일 밤까지야 젠."

벌써 남자와 말을 끝내놓은 상태인 것 같았다. 지민은 헤레이스가 나간 빈자리를 응시하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김석진에게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조차도 위험하다는 걸 알았지만 혼란스러운 감정을 감출 길이 없었다. 내가 잘 하고 있는 걸까. 이젠 엘레나의 차가운 눈과 마주할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다.










-









그 날 밤은 헤레이스의 말대로 또 한번의 소란이 있었다. 간간이 총소리와 비명소리 새벽을 울렸다. 특수 유리로 된 창에서 번쩍 번쩍 불빛이 흘러들어왔다. 감시하던 놈들이 전부 소란을 잠재우려 떠난 고요한 실험실에 갖혀있었다. 그것은 헤레이스와 남자가 움직일것이라는 신호였다. 지민은 애써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보려 했다. 헤레이스의 결정이 그를 망설이게 했지만 지민은 엘레나가 이 곳에 있는 이상 움직이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괜히 뒤척이며 잡념을 떨쳐내려했다.

"2번과 81번이 사라졌다."

지민이 소란스러운 외부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열명이 채 안되는 사람들이 이탈한 헤레이스와 남자를 찾아야 한다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사토우는 헤레이스와 붙어다니던 지민의 눈을 쳐다봤다.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도망친 놈들을 붙잡아오거나, 죽여. 그리고"

사토우의 눈이 실험체들을 둘러봤다. 일말의 자비도 없는 표정이었다.

"살아돌아와."

처음으로 살아돌아오라는 그의 말이 떨어지자 무서운 속도로 달려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지민이 사토우의 뒤에 서 있는 엘레나를 응시했다.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지민을 응시했다. 결국 원하는게 이거였어요? 지민의 눈빛을 아는 듯 엘레나는 숨죽여 입을 열었다.

'반드시 잡아서 죽여.'

실험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소리와 같았다. 지민이 그제서야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녀가 지민에게 처음 신호를 보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는 기회. 석진과의 거리가 좁혀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찾아야할 사람. 빼앗긴 내 모든것. 반란군이 있을 총성속으로 뛰어나간 지민이 거세게 뛰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얼마 못가 숨을 고르며 벽에 붙어섰다. 온 몸의 세포가 반응하는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제대로된 운동을 하게된 반작용인지 지민이 코너를 돌았을 때 이미 엎어져있는 실험체 하나가 보였다. 그는 지민보다 어린 소년이었다. 아직 죽진 않았는지 바들바들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머지않아 죽을 것 같았다. 한참이고 혼란스러워하던 지민이 눈을 질끈 감고 소년을 일으켰다.

"숨을 천천히. 깊게 내쉬고 벽 뒤에 숨어있어."

소년은 지민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심장 통증에 괴로워했다. 갑자기 뛰게 되어 몸에 무리가 온 듯 했는데 지민은 그와 더이상 함께 있을 수가 없어 발을 돌렸다. 잡아 죽이든 그들에게 다시 넘기든 지민은 사실 제가 찾는 사람이 헤레이스가 아니길 바랬다. 차라리 그 남자를 붙잡아서 아오키 사토우의 눈앞에 가져다줘야 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반란군과 필리아 소속의 구분은 정확하지 않았다. 다만 지민과 같이 훈련받던 실험체들 중 몇은 바닥에 처박혀 숨통이 끊겨있었고 나머지는 처음으로 만끽하는 자유에 움직임이 재빠르고 닥치는대로 사냥했다. 반란군은 차림이 비슷했지만 대게 건물로 침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아예 구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민이 상황을 살피려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멀리 헤레이스와 남자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전장을 가로질러 그들을 추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지민이 빠르게 경로를 바꿔 건물로 향했다. 비교적 반란군과의 충돌이 적을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어느정도 그의 생각이 맞았는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연구원들과 내부 보안요원들은 지민의 명찰을 한 번 쓱 훑어보고는 제 할일하기 바빴다. 마치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릴 소모품보듯 했지만 차라리 그게 더 낫다며 건물을 가로지르고 건물 사이를 연결한 통로로 내달리며 그들이 도주한 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반란군과 합류하기위해 반란군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민이 그들을 가까스로 따라잡았을 땐 그들이 완전히 외부로 빠져나가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로이, 생각이 바뀐거야?"
"..."
"잘 생각했어. 밖에 나가서 자유를 만끽하자고."

헤레이스는 기분이 꽤 좋아보였다. 저편에서는 총성이 가득한데 뭐가 그리 좋은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지민을 반겼다. 지민은 순간 갈등했다. 그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많지 않을까? 반란군에 소속되어 찾는 방법도 생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지민이 짧은 숨을 들이켰다.

"어서 건너와."

지민은 단 한번으로 헤레이스의 옆에 서 있던 남자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넣었다. 그는 신음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넘어갔고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헤레이스가 지민이 겨눈 총구를 응시했다. 훈련하면서 특히 사격을 잘 하던 지민이 생각이 났는지 멍청하게 지민을 쳐다보며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지민은 총구를 내리지 않고 그대로 헤레이스에게로 향하게 했다. 마치 제가 필리아의 개가 된 것 같았다.

"빨리 가."
"..."
"가지 않으면 죽일거야. 그 남자랑 똑같이."

잠시나마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던 자신을 원망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민이 그동안 버틸 수 있다는 힘을 준 것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도, 앞으로 제가 그에게 향할 수 있다는 것도 전부 이것을 위해서였다. 지민은 누구든 한 명을 죽여 필리아의 눈에 들어야했다. 내 원망해도 좋아. 난 이래야만 해. 난 원래 이런 놈이었어. 지민은 자학하듯 중얼거리면서 총구를 더 굳게 고정하며 천천히 앞으로 향했다. 헤레이스는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는지 미동도없이 지민을 쳐다보고 있다 감탄사가 터져나오듯 입을 열었다.

"네가 지옥이었구나."
"그래."

지민이 헤레이스쪽에서 인기척이 들려 벽으로 붙어섰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쉽게 진정하지 못했다. 첫 날 제게 작은 빵을 건내주며 애처럼 웃었던 헤레이스가 이젠 자기더러 지옥이라 했다. 총을 내리고 왼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헤레이스의 말대로 사람에게 상처주는 말을 할까 두려워 항상 말조심하며 심기를 살펴가며 필요한 말만 하던 과거의 자신은 없었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숨통을 단번에 끊어버릴 수 있는 지옥이 되었다. 미친사람처럼 웃음이 끊이질 않는데 눈에선 눈물이 쏟아졌다. 언제까지 이기적이 되어야 형한테 다가갈 수 있을까. 이런 나를 받아주기나 할까? 자신이 없었다.

지민이 다시 고개를 돌려 헤레이스가 있던 곳을 쳐다봤다. 그는 없었다. 대신 피를 사방에 흘린 남자의 시신만 차갑게 배를 대고 누워있었고 아직 반란군은 공격하는 중이었다. 지민은 부러 밖을 나가지 않았다. 오로지 도망치던 사람들을 잡아오는 것이 제 목적이었으니 잠잠해질 때 까지 기다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온 몸이 떨리고 모멸감에 몸서리칠줄 알았건만 지민은 편안하게 시체 옆에 앉아 있었다. 이 남자가 금방이라도 일어서서 자길 죽이려들지 모를 이 팽팽한 두려움을 즐기고 있었다. 지민은 그 자리에서 엘레나가 이 모든 것을 계획했다고 유추할 수 있었다.

지민이 남자의 시체를 아무렇지 않게 끌고 실험실에 도착했다. 남자의 피가 저 멀리서부터 길게 이어져 길을 만들었지만 아무도 그것에 눈길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지민이 남자의 시체를 사토우의 발치에 던져두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말대로 살아돌아온 것도 모자라 이탈자를 잡아왔다. 뭔지모를 승리감에 지민이 눈을 크게 떴다. 이제 더이상 기다림은 없다.

"죽였어요."

지민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떨리는 손을 감추려 애를 썼다. 두렵지 않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엘레나가 지민에게 다가와 잘했다는 말을 짓거려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지민은 요원이 되기 위해 헤레이스까지 없애버려야하는 상황에 올 것이었다.

"해냈구나."
"..."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어, 로이."

우리는 명목이 필요했어. 하지만 지민은 이상하게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신규 프로젝트의 생존자를 1명으로 마무리지은 엘레나가 지민을 다른 숙소로 옮길 때까지 그녀가 뭘 하든 지민은 말이 없었다. 그녀는 지민을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지민은 반대로 생각이 바뀌었다. 필리아의 요원이 되어 석진을 빼오는 것이 아니라 필리아로부터 석진을 보호해야하는 것을. 그가 끌려들어갔던 실험실에서 나왔을 땐 엘레나가 활짝 웃으며 지민을 반겼다. 마치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지민은 기억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인위적으로 기억다발을 쥐고 지민의 기억 일부분을 지워버린 것 처럼.

그들은 정확하게 따지자면 중립을 지켰다. 필요할 땐 반란군 소속의 사람으로써 정보를 유출시켰고 때로는 필리아를 위해 움직였다. 용의주도함에 누구도 그들을 의심하지 못했다. 지민은 간혹 엘레나의 모습을 보며 비겁하다 생각했지만 그것도 무엇에 비롯되어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트룰린 무리들을 추적했다. 방해가 되는 인물은 전부 제거했고, 다음날 아침이면 전 날의 기억이 송두리채 날아가버리거나 다른 기억으로 채워진 지민이 그 날도 사람을 처음 죽여 괴로워했다. 어제 죽였는데도. 계속. 그 죄책감은 새로웠다.

"익숙해서 놀랐어요. 그냥 찌른다는 느낌밖에는..."
"오히려 무딜 수록 좋은 거지."

테이블에 앉아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던 지민의 뒤로 중얼거리며 사토우가 걸어왔다. 그는 나른한 눈을 하며 엘레나의 맞은 편에 앉았다. 정확하게는 지민의 옆이다. 엘레나가 지민의 몫으로 준비한 음료를 천천히 삼킨 그는 복잡한 감정을 애써 숨긴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에게서 트룰린의 최근 거처를 알아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지민은 뒷목이 뻐근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사토우를 응시했다. 필리아가 최근 반란군때문에 규칙이 엄격해져 요원들의 행방과 행동 하나하나 보고해야 했다. 사토우는 오리건주 멀티노머 카운티에서 사이먼 트룰린이 CCTV에 잡힌 기록을 보여주며 아마 아직까지도 그곳에 거주중일것이라고 했다. 처음 석진이 실종되었던 뉴햄프셔와는 정반대의 주(州)였다.

지민은 그녀를 따라 비행기에 올랐다. 각자 다른 신분을 가지고 올라서는 요원들을 곁눈질로 쳐다보던 지민이 비지니스석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얼굴이 익숙하지 않거나 전부 다른 사람으로 변장해서 누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체크셔츠를 입고 배낭여행을 온 듯한 유학생 차림이었던 지민도 그들과 별다를 게 없다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만 일찍 만났더라면, 엄마 노릇은 해줄 수 있었으려나."
"..."
"사실 그와 결혼하지 않으려고 했어. 난 언제 지옥으로 떨어져도 이상할거 없는 신분에 가진거라곤 망할 목숨줄밖에 없는데. 그런데..."

결국에는 합리화했어. 난 이제 정착할만 하다고. 지금까지 목숨붙어 있으면 누구에게 기대도 좋다고. 그런데 그게 정신나간 짓이었지. 결국 내 불행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간거야. 난 절대 누군가와 어울려선 안됐어. 안됐다구. 재앙이야 내가. 엘레나가 울부짖으며 침대에 눕혀졌다. 그녀는 몇 번이나 말을 더 짓거리더니 이내 잠든 듯 미동이 없었다. 사토우와 지민이 그녀가 완전하게 깊은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하고 거실에 어질러져있는 술병들을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내가 다 버려도 또 새로운 걸 사오지. 몇 번째냐는듯 사토우가 중얼거렸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지민은 사토우가 떠나도 깔끔해진 의자에 앉아 시침이 12시를 지나길 기다렸다. 차갑게 가라앉은 거실에 혼자 앉아서 기억을 더듬었다. 언젠가부터 떠오르지 않는 과거들을 시간순서로 짜맞춰 올라갔다. 공백. 그는 그 공백들을 곱씹으며 서서히 기억을 누군가에게 잠식당해가는 것을 인식했다.

그것은 어느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일까. 잠든 사이에? 아니면 순식간에? 아주 작은 틈새를 알아차리는 것도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지민은 그것만은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시간을 인식하지 못한다. 자꾸 기억이 단편적으로 잊혀진다. 심지어는 하루가 통째로 날아가버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실험실에 갇혀 실험을 당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정신질환인가 싶다가도 확연하게 차이나는 기억의 양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제 기억의 관여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트룰린들이 알아차린것같아."
"따라붙어."

인파속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파이 트룰린의 뒷통수를 보던 지민이 사람들에게 치이며 서서히 멀어져감을 느꼈다. 젠장, 그가 어디에 있냐고 물어야 하는데. 사토우와 엘레나의 통신을 사이에서 듣고있던 지민은 파이가 순식간에 사라진 골목길을 따라 이동하며 그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썼다.

"너는 누구지?"

순식간에 건물 창문에 매달려있던 파이가 지민의 등 뒤로 떨어져내리며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인적 드문 골목길에서 지민의 머리통이 바닥에 찢겨 피가 세어나오기 시작했다.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파이 트룰린은 생각보다 더 몸집이 재빠르고 강력한 힘으로 지민을 짓눌러왔다. 팔이 꺾여 움직이지도 못한 채로 얼굴도 돌릴 수 없자 그는 지민을 죽여버리려는 듯 칼을 꺼내 목에 겨눴다.

"누구야."
"...유스."

등 뒤에선 대답이 없었다. 네가 어떻게 유스를 알고 있는지도, 그런사람 모른다는 거짓말도 하지 않고 지민을 속박한 손을 풀었다. 지민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이를 공격하며 빠져나오자 그제서야 그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는 큰 눈에 이국적인 코를 가졌으며 선천적으로 붉은 빛 머리칼을 가진 사내였다. 그것 치고는 파이 트룰린은 동양인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파이 트룰린의 한쪽 허벅지가 피에 젖어 있었다. 파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소속이 어딘지 밝힐 리는 없고, 유스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
"..."
"꽤 흥미는 생기지만 그의 위치를 알려줄 순 없어."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민이 파이에게 달려들었다. 자신의 다친 한쪽 다리를 노린다는 것을 알아챈 파이가 지민의 공격을 피해 벽쪽으로 붙어섰다가 팔로 그 공격을 막았다. 한참이고 공격을 계속하던 지민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휘청거렸다. 피를 많이 흘린 지민이 시야가 흐려지며 정신을 다잡기 힘들었다. 파이 역시 한쪽 바지가 전부 피로 젖어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일반 신체보다 더 발달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스를 죽이러 왔어?"

아니다. 트룰린들이 볼모로 잡고 있는 것일 뿐 유스의 존재를 아직 필리아는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민은 이대로 계속 추격을 진행할 수록 엘레나의 소속 팀원들이 유스의 존재를 알아차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되도록이면 빨리 그의 위치를 알아내야만 했다.

"우욱!!!"

지민이 헛구역질을 하며 머리를 붙잡았다. 파이 트룰린이 가지고 있는 총상이 머리속에서 맴돌았다.

"..."

지민이 혼란스러운 머리를 붙잡고 파이의 얼굴을 응시했다. 처음 있는 부작용에 숨을 가파르게 내쉬며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는 지민을 바라보며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부작용인가?"

의아한 빛을 하고 있는 파이가 물었다. 지민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파이가 지민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아 생긴 충격인지 떠올리지도 못할 기억들이 그제서야 수면위로 떠오르려 하는 건지. 다만 나란히 서 있는 그는 이유를 알고있는 듯 했다. 내 기억이 끊겨있는 이유. 왜곡된 진실들. 파이의 발치로 경고하듯 총알이 박혔다. 얼굴에 피가 몰려 괴로워하던 지민이 휘청거리며 그 출처를 눈으로 쫓았다.

"동료가 왔군. 나중에 봐."
"..."

파이는 몸을 돌려 골목을 빠져나가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지민이 분함에 주먹을 바닥에 내려쳤다. 트룰린들에 대한 분노가 차올랐다. 놈들만 아니었으면 모든 걸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내 모든걸 앗아간 것으로 모자라서 원래 제 것인마냥 지니고 있는 게 분해서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괜찮냐며 지민을 부축해주는 요원을 따라 일어섰다. 파이 트룰린을 추적할 때 왜 따라오지 않았냐는 물음에 그를 쫓으라는 지시가 없었다고 무안해하는 동료의 말을 들으며 건물 위에서 자길 내려다보고 있는 엘레나를 올려다봤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로이, 제정신이야?"

엘레나가 피웅덩이를 뛰어넘으며 지민에게 다가섰다. 트룰린들과 접촉했던 놈들이 사지가 찢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그 처참한 공간에 들어오지 않고 벽에 기대어 줄곧 지민을 보고 있던 사토우의 시선이 지민의 발치에서 멈췄다. 작은 나이프를 들고 있었는데 설마 저 손바닥만한 나이프만으로 이지경을 해놓았다는게 흥미가 있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요즘 성격이 이상해 진 것을 본인도 느끼고 있는지 차분하게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과 목, 그리고 옷에 피가 튀어있었다. 피냄새. 지민은 그 비린내 속에서 열기를 식혔다. 그제서야 그 익숙함에 제가 오늘 사람을 처음 죽여보는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떠올리지 못하는 기억속에 본인도 오늘과 같이 놈들을 죽였을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을 처음 죽여봤는데."
"..."
"전부 다 죽이지 못하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엘레나는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뭐라고? 믿기 힘들다는 듯 지민의 어깨를 붙잡았다. 지민이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내 기억이 온전하긴 해요? 기억도 안 나는데 시간은 이미 지나 있고. 도대체, 왜. 왜이런거에요? 이미 확신한 것 처럼 묻는 지민의 말에 그녀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지금 힘들어서 일시적으로 충격을 받은것 뿐이야."
"부작용일지도 모르잖아요. 이제 시간이 없는데, 지금 당장 놈들을 죽여버릴 수 있으면서.."
"진정해."
"그 개자식들만 아니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어!!"

차라리 내가 다 죽여버리고 유스를 데려올거야. 왜 못하는데?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는 실험실에서 부작용에 괴로워했던 실험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엘레나는 보는 것도 괴롭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지민을 진정시키려 안간힘이었다. 로이.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필리아에게 유스를 들킬 수 없어. 네가 트룰린들을 죽여버리고 유스를 데려온다 한들, 그 이후는? 평생 그를 따라다닐 놈들에게서 자유로울 거라 생각해?

뭐든 도운다고 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찾아온다고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이건... 지민은 떨리는 손을 감추려고 필사적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간 느껴왔던 감정들과 우린 평생 필리아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알게 된 이후로는 단 한순간도 차분해 질 수 없었다. 그의 행동을 놓치지 않은 사토우는 지민에게 다가와 물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하냐고. 지민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기약없는 기다림과 잡히지 않는 그. 되돌릴 수 없이 이미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서.

지민은 임무를 쉬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렇다고 한들 추적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지민은 눈을 뜨면 아침마다 제 기억이 온전하게 자리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미쳐버려서 닥치는대로 죽여버릴까봐 그렇게 속에 있는 열기를 잠재웠다. 이성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다루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지금껏 잘 해온대로 하면 된다. 지민은 평범한 차림새를 하고 다시 트룰린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지민의 얼굴을 아는 건 파이 뿐이었지만 아마 파이가 다른 일행에게 일러두었을 것이다. 놈들의 거처를 알아내야 한다. 어디서 생활하는지 알아낸다면 석진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파이 트룰린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지어진 지 한 세기는 된 것 처럼 낡은 다리 밑이었다. 가로등불이 채 닿지 않은 어둠 속에서 얼굴을 드러낸 트룰린은 지민을 응시하며 다가왔다.

"내 말이 농담으로 들려?"
"..."
"죽기 싫으면 꺼져."

첫만남의 장난기 어린 미소는 찾아볼 수 없이 핏발 선 눈을 굴려 정확하게 지민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제정신인가 살짝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자신이 폭주했던 그 날처럼 삼백안을 번뜩이면서 한 손에는 나이프를 들고 채 숨이 멎지않은 놈의 머리채를 질질 끌었는데 그 놈은 큰 상처도 달고있지 않았으면서 공포감에 벌벌 떨며 그대로 딸려왔다. 버둥거리는 다리가 모래바람을 일게 했다. 아마 파이와 접촉했던 놈들을 얼마 전 전부 찢어죽여버린 것 때문에 잔뜩 화가 난 것 같았다.

아무리 나랑 비슷한 놈이라도 내 일에 방해는 하지 말았어야지. 파이가 머리채를 잡은 손에 힘을 풀자 놈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일어서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지민의 뒤쪽 달려나가 멀어지자 태형이 나이프를 던졌다. 짧은 나이프는 기어코 놈의 뒷목에 박혀들어가 숨통을 끊었다. 산 송장이 바닥에 널부러지는 소리에 지민을 뒤를 돌 필요도 없이 태형을 온전하게 볼 수 있었다.

"나도 그 연구실에서 살아돌아온 놈인데."
"..."
"너처럼 미련하게 엘레나가 시키는대로는 안했어."

지민이 주먹을 쥐었다.

"그쯤되면 왜 자꾸 기억이 없어지는 것 같은지 미쳐버릴덴데. 실험 부작용이 그거야. 의무적으로 주파수에 반응하는 약물을 투여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기억이 삭제되는 걸 알아차릴 수 있지. 멍청하게 기억못하는 놈들이 차라리 나아. 괴로움에 못이겨 평생 도망쳐다닐 일 없이 뒤질때까지 필리아에 충성을 바칠 수 있으니까."
"..."
"우린 참 불쌍해."

지민이 지금껏 가졌던 모든 의문들과 가설들이 전부 맞았다. 도대체 왜? 엘레나는 왜 자기 기억들을 삭제 시켰으며 정작 유스를 찾는 일에 시간을 끌고 있는지. 전부 제가 선택한 길이었지만 이런 걸 바라지는 않았다. 파이 트룰린이 이내 입을 다시 열었다. 엘레나는 아마 평생 김석진을 찾을 수 없어. 가능하다고 해도 하지 않을거겠지. 김석진을 찾는 순간 김석진도 필리아에게서 자유롭지 못하니까. 넌 평생 김석진의 뒤만 봐주다 끝날 운명이란 말야.

다만 그렇다고 해도 좋으니까 그만 무사해주길 바랬던 그동안의 다짐들이 반대로 처참하게 무너지려 했다. 지민의 눈을 응시하던 트룰린이 피식 웃었다. 뭐, 다를 게 있을 줄 알았어? 희망따윈 철저하게 짓밟아 무시해버리는 그였지만 지민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게 맞으니까. 처음부터 지민은 그걸 알면서도 개입했던 거였다. 정신따위가 강하지 못해 생긴 미련들 때문에 기억을 지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위치에 선 자신이 혹시라도 보답을 바라고 있을까봐.

"로이...?"

파이 트룰린의 뒤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트룰린이 볼만 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자신과 나란히 선 석진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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