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 납치





"젠장...!"
- 침착해. 어제부터 아침 운동은 간 흔적도 없고 그냥 계속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외부 침입센서도 그대로인데 지금까지 들어오지 않아. 평소엔 급해도 메세지 남기고 갔었는데..."
- 알았어. 어제부로 다 끝내고 돌아가려던 참이었으니까 제일 빠른 비행기로 갈게. 늦어도 내일 이면 도착할거야. 이유 없이 사라질 놈은 아니니까 천천히 루크가 했던 말들 생각해보면서 기다려봐. 혼자 다니면 위험하니까 답답해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거 알지?
"알아... 그래도 네이선에게 연락해봐야겠어."

알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통화기록을 뒤져 네이선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한참이고 전화를 받지 않았다. 손이 덜덜 떨리면서 분노가 치밀었다. 지옥 끝까지 쫓아오던 그들을 죄다 지옥불에 머리통을 밀어넣는 한이 있더라도 죄다 숨통을 끊어버리겠노라고 다짐했다.

- 우리는 킬러를 양성하고 많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더 능숙하게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환경이 무엇인가, 훈련받은 요원들이 배신하지 않고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
- 단순히 기업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국가적 차원이죠. 결과가 궁금하면 도망쳐보세요. 대가는 장담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인내심을 가지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영원히 떠나는 것도, 친아들을 죽이지 못해 그 뒤를 쫓는 것도 하지 못할테지. 아이러니하게도 저 병신같은 말을 짓거린 사람은 엘레나 킴이었지만. 그들은 눈에보이는 최대의 결과를 추출하기 위해 많은 표본들을 뽑아 만들어진 삶의 노예로 키우는 노력을 많이 했다. 그들중에 태형과 지민이 있었다는 것도 평생 지울 수 없는 고통이었다.

능숙하게 최소한의 짐을 꾸린 지민이 잭나이프를 챙겨들며 방을 나섰다. 파이도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있다는 것에 확신하지 않고 분명 오는 길에 짐작될 만한 곳 몇 군데를 살펴보고 올 것이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잘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합리화 했다. 집을 나서면서 익숙한 번호로 전화를 걸자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가 지민을 반겼다.

"박지민입니다. 러시아 출신의 동양인이에요. 시즈란 항구에 거주했고 러시아 이름은 카야 이바노비치 페트로프. 현재 루크라고 불리고 있... 젠장..."
- 거의 1년만에 연락했으면서 첫 마디가 사람찾는거라니, 서운하네. 지금 어디 있는데?
"..."
- 걱정마. 도청은 막아뒀으니까.
"일리노이 오크파크(oak park)에 잠시 거주하고 있어요. 다음엔 어디로 떠날지 모르겠지만."

오크파크 좋지. 유명한 소설가도 그 지역 출신이라더군. 잡소리를 짓거리는 상대방이 말이 없는 지민을 눈치채고 루크의 이름을 읊었다. 시카고에 있는 내 형이 찾기 시작할거야. 그의 말에 도대체 가족이 몇이냐고 묻는 지민의 목소리가 꽤나 감정이 서려 있었다.

- 나야 뭐, 같이 일하는 모든 사람이 가족이지.

엘레나와 함께 하면서 알고 지내던 남자였는데, 말 하는게 정신이 없어서 딱히 연락하고 지내진 않았다. 그러나 지민은 남자의 정보력과 사람을 추적하는 것에는 인정하는 부분이라 아무래도 좋으니 루크를 찾아야 했다.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데 지민이 들고 있는 잭나이프보다 조금 더 작은 칼날이 지민의 옆 벽에 박혔다. 재빨리 벽 뒤에 숨어 숨죽이고 있는데 누군가의 발걸음이 들렸다. 발자국소리가 두어명은 되어보이는데 그렇다고 쉽게 생각해서도 안된다.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 칼날을 아래로 잡고 공격준비를 했다. 지민이 눈을 감고 그들의 동태를 느끼기 시작했다.

- 망설이면 니가 죽어.

손을 휘둘러 잭나이프를 던지고 벽에 박혀 있던 칼 날을 뽑아든 지민이 앞에 있는 남자의 허벅지에 칼을 박으려고 팔을 휘둘렀다.

- 한 번 사람을 죽이면 그 다음은 아무것도 아니야.

사토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렇게 여럿을 키웠을 거니까. 비슷한 패턴으로 지민에게 공격하는 또 한명을 발을 걸어 넘어트리고 빠르게 다른 한 명의 목을 잡아눌렀다. 목이 잡힌 놈은 쉽게 당하지 않고 복부를 발로 차며 지민에게서 멀어졌다. 힘이 엄청나서 장이 파열되지 않았을까 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살기위해서는 따질 겨를이 없었다. 빠르게 공격을 하고 고개를 드는데 바로 또 칼이 날아들어왔다. 총을 소지하고 있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왜지? 본인같았으면 저격이라도 했을 텐데. 이유를 고민하는 와중에 허벅지에 스쳐 바지로 피가 스며들었다.

"죽일 생각은 없어보이는데, 어디소속이지?"
"CRYPTO."
"..."
"우리는 PLIA소속이 아니야."

아직도 PLIA라고 부르는 놈들이 있나? 지민이 웃자 남자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반응했다. 루크를 찾으러 나가야 할 판에 놈들이나 상대해 줄 시간은 없다. 혹시 루크를 이미 잡아둔 눈치는 아닌 것 같은데 클립토 놈들은 지민이 목적인듯 그를 둘러쌌다. 여기저기에서 여럿이 몰려오자 이미 퇴로까지 막힌 지민이 순종적으로 굴 것 처럼 서 있었다. 이미 지민이 정신을 잃은 놈 둘이 발치에 널부러져 있는데 그들은 눈길하나 주지 않았다. 어짜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해 보여서 섬뜩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사토우와 비슷한 냄새를 풍겼다. 혹시 사토우가 벌써 여기까지 쫓은건가 싶어 주위를 둘러봐도 사토우는 커녕 죄다 눈동자만 남겨두고 얼굴을 가린 사내들이 전부였다.

"흐..."

빌어먹을 고통이 온 혈관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모든 근육들이 요동치며 정신이 혼미해지자 오기로 버티면서 설명해주기전까지 응하지 않겠다며 주위를 경계했다. 남자는 미동없이 지민을 응시했다.

"카야 이바노비치 페트로프는 드미트리예비치 페트로프 살인 용의자로 러시아가 쫓고 있더군."
"뭐,라고?"
"그는 반년 전 부터 러시아에서 1급 수배자야."

아마 루크를 데려오면서 태형이 죽여버렸던 남자를 말하는 듯 했다. 그가 죽은 후 바로 루크가 말도 없이 사라졌으니 용의자로 몰리는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렇다면 루크가 사라진 이유가 모국에서 쫓아온 놈들을 따돌리려 한건가? 뭐가됐든 루크의 생사를 알 수 없으니 여기에서 멍청하게 태형을 기다리는 것 보다 제가 직접나서는 편이 낫겠지만 그들은 지민이 자기들과 함께하는걸 원했다.

"우리와 함께한다면 이바노비치 페트로프 수배명령을 없애고 그를 살려두도록하지."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지?"
"그는 러시아를 피해 달아난게 아니야. 오히려 그들을 전부 죽여버리고 돌아오는 중이지. 아마 그 소식을 러시아가 알면 이바노비치 페트로프가 살인자라고 기정사실화해서 어떻게해서라도 죽이려 들거다."
"..."
"네가 우리와 함께한다면 평생 그를 자유롭게 해주는거야. 파이 트룰린도 함께."

식은땀이 품이 넓은 티셔츠를 잔뜩 적셨다. 이미 저들은 제가 독에 못이겨 곧 쓰러질것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선택권은 없었다. 지민이 가진 무엇 때문에 저렇게 후한 조건을 내걸었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분명 태형은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자기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고통속에 살고 있으니까. 지민이 눈을 감았다. 분명 그는 나에게 화가 날 것이고 아마 평생을 볼 일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조건이 트룰린들과 루크의 영원한 평화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악마의 속삭임에 흔들리고 있다는 자신이 소름이 끼치도록 어이가 없었다.

지민은 앞에 선 남자를 쳐다봤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인간관계를 박살내는데에는 도가 텄군. 뒷통수로 온 공격에 정신을 잃은 지민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 망설이면 니가 죽어.

나는 망설여서 이 지경까지 왔는걸. 죽는 것 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상, 그 고통, 감각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아숨쉬는 이유는 다 그 때문일까? 조금이라도 더 버틴 대가로 그와 함께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는 보상 때문에.

지민이 온 몸을 비틀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면서 폐부 가득한 숨을 내뱉었다. 아직 살아있는 게 용했다. 적어도 쇼크로 죽을 것 같은 몸상태는 둘째 치고서라도 약을 복용하지 못했는데 눈 앞은 생소한 천장이었다. 천국일까? 이상한 생각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으나 줄곧 소파에 앉아서 차를 마시던 누군가가 지민의 움직임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를 바라보자 말끔한 캐주얼차림의 남자는 지민에게 다가오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안녕. 이틀만이야."

말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제안 했던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는 마른체형이었지만 다부진 근육이 셔츠에 전부 실루엣으로 드러났다. 지민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대답을하지 않자 무안하지도 않은지 피식 웃더니 자기가 앉아있던 소파를 한 번 흘깃댔다. 차 좀 마실래? 꽤나 친근하게 말하는 그에 당연하다는 듯 응하지 않자 이제 좀 본론을 말할 생각이 드는지 한 번 크게 한숨을 쉬었다.

"파이 트룰린, 사이먼 트룰린, 유스 킴과 2년동안 PLIA에게서 도망쳐다녔던 제이라고 하면 알아보겠나?"
"..."
"미군소속 작전팀 클립토요원인 페어벤 제이. PLIA를 없애버리기 위해 그들의 정보를 얻는 목적으로 이탈자 파이 트룰린과 사이먼 트룰린에게 접근했었다."
"PLIA가 어디인줄은 알고 있는거야?"
"우리는 명령으로 움직인다."

지민이 피식 웃자 호석의 눈썹이 꿈틀댔다. 직업정신은 무척이나 투철한 것 같은데. 당신은 파이와 사이먼을 속였어. 지민이 그를 노려보자 호석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맞아, 나는 그들과함께 움직이면서 미군쪽에 지속적으로 PLIA의 행보를 보고했지. 지민이 말이 없자 호석은 지민의 발치에 서서 다시 입을 열었다. PLIA에 스파이로 들어간 내 동료들은 전부 연락두절이 됐어. 그래서 놈들과 지속적으로 접점이 있는 자들을 찾았고, 그게 사이먼들이었지. 중간에 이상한 놈이 하나 끼긴 했지만 말이야. 그 이상한 놈은 유스를 두고 하는 말이었지만 지민은 미동이 없었다. 호석은 이번엔 지민이 그 역할이라는 듯 쳐다봤다. 내게서 뭘 바라는거지? 최근 접점은 없었다. 지민은 사이먼과 엘레나가 죽은 이후로 놈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그들이 언제라도 찾을 수 없게 항상 거처를 옮겨가며 생활했을 뿐이었다.

"맞아 그게 이상한 부분이야. 항상 꼬리를 물고 붙어 있던 감시원들이 너희들에게서 끊겼어."

그것은 과연 좋은 징조일까? 아예 PLIA에게서 버려졌을까, 아니면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일까. 지민은 일정하게 기포를 뿜고 있는 어항 속 공기주입기를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넌 우리들과 함께 PLIA놈들을 전멸시킨다."
"..."
"파이 트룰린의 양모가 PLIA에 감금중이고 1년 전부터 생사를 알 수 없어."

우리가 원래 데려오려 했던 파이 트룰린에게 이성을 요구할 수 없다는 뜻이지. 이바노비치 페트로프 또한 러시아 1급 지명수배자로 미군부대에 이름을 올렸다간 우리쪽 입장이 난처해져. 호석을 쳐다보고 있던 지민이 침대 시트를 쥐었다. 도대체 우리에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거지? 그리고 파이에게 어디까지 숨겨야되는건지 알 수가 없어졌다. 내 아픔을 자신의 일 처럼 생각하던 파이를 생각하지면 자신의 선택으로 그가 증오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살인청부업자에서 미군소속 요원까지 아주 난리를 치는 신분이동에 지민은 이미 여러 나라를 거쳐가며 제가 가진 알량한 양심마저 바닥을 드러내는 걸 겪었다. 한 없이 약해지다가도 누구보다 냉철했다. 이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면죄부가 되길 빌고 싶었다.

PLIA의 정보국에서 요원들이 수행했던 임무들을 이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까? 생체실험은 물론이고 정신 감옥에 가뒀던 그들을. 그리고 동료들과의 약육강식으로 하루에 두어명씩 버려지는 걸 보면서 버틴 내 2년간의 기록. 그들은 당연하게 여겼던 비인간적인 사고방식.

"파이 트룰린쪽은 우리요원들이 감시하고 있으니까 넌 우리와 함께 움직이면 된다."
"내가 꼭 배신하지 않을것 처럼 단정짓지 마."
"본의아니게 됐군. 유스에게 필리아놈들이 붙을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단 소리야."

그건 또다른 재앙의 시작을 알렸다. 가면 갈 수록 호석의 손바닥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지민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정처 없이 떠도는 걸 보던 호석이 한숨을 쉬었다.

"네 손으로 끝내고싶으면 기회를 줄게."
"너희는 필리아를 없애지 못해."
"내가 그렇게 만들거야."

지민이 그를 비웃었다. 호석의 자존심을 건들인 듯 그의 눈이 날카롭게 지민을 응시했다.

"내가 클립토에 들어와서 지난 5년동안 잃은 동료만 손가락으로 셀 수가 없어."
"..."
"내가 요원으로 살아있을 때라도 전부 없애버릴거라고 매일 다짐을 해. 필리아에 요원으로 활동해서 내 요원들을 죽인 네게 부탁까지 하고 있을 만큼...!"

호석의 목소리가 커지자 노크소리가 들렸다. 호석이 분노를 가라앉히고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들어와. 그가 쳐다보지도 않고 입을 열자 각잡힌 몸짓으로 들어온 요원이 호석을 불렀다. 지민도 따라 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브리핑 5분전입니다."
"당신 뜻대로 해보지."
"알겠어. 로이가 깨어났으니 이곳 안내는 네가 해줘."
"네."

호석은 미련없이 돌아서서 병실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요원은 호석이 빠져나간 뒤를 쳐다보고 계속 고개를 숙이다 지민을 쳐다보고선 빠르게 다가왔다.

"방금 전에 팀장님목소리가 들렸는데 혹시 싸우신 건 아니죠?"
"..."
"필리아에 민감하셔서 그러신것 뿐이에요. 많이 갈구시긴 하지만."

요원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지민이 필리아 소속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진 않아 보이는데 지민을 대하는 게 어색하지가 않았다. 복잡한 머리를 침대 헤드에 기대어 생각했다.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쳤다고 아우성이었지만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의 안녕을 빌어주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가. 이제와서 포기한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지민은 분명 다시 그들과 싸울 것이다. 싸우다 죽더라도 놈들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리라.

"미안하지만 급한대로 집에 있는 약을 가지고 왔어요. 아마 해독 치료도 훈련과 함께 동시에 이뤄질거니까 걱정마세요."

지민이 지어본 기억이 없는 웃음을 한가득 담은 요원이 부러워졌다.










-










"제이! 딜런이 날 죽이려고 해!"
"폴, 니가 먼저 시비걸었잖아."
"재미있는걸 어떡하라고...와악!!"

소파위를 뒹군 폴이 뒤따라오는 딜런을 쳐다보며 뒷걸음질쳤다. 하하, 설마 진짜 하겠다는 건 아니지? 식은땀을 흘리며 양 손이 붙잡힌 폴이 어깨에 들쳐지며 꽥꽥 소리를 질렀다. 미안해! 미안하다고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호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 볼 꼴 많이 보여주는군. 멍청하게 서 있는 지민이 뭐 씹은 표정으로 복도끝으로 사라지는 딜런과 폴을 쳐다보고 있는 걸 힐끗 보고는 툭툭 건물 벽을 치며 호석이 주위를 환기했다.

"아침과 저녁 해독치료를 받고 그 외 정규시간에 우리와 함께 훈련하게 될거야. 시간표는 네 거처에 놓여있을테니까 알아서 맞춰."
"..."
"규칙적으로 생활하는게 익숙하지 않을테지만,"
"괜찮아. 오랜만이라서 어색할뿐이니까."

말을 덧붙이려던 호석이 입을 달싹이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필리아에서 훈련받던 때를 떠올리던 지민이 호석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뭘 더 안내받으면 되는거지? 그의 말에 호석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니, 이제 여기서 생활하면 돼. 요원들과 말을 섞던 혼자 지내던 상관할 바 아니지만 아마 환영받진 못할거야. 그의 말에 지민이 피식 웃었다. 나도 바라진 않아.

호석이 바쁘다며 건물 밖으로 향하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지민이 비교적 한산한 건물 내부에 숨통이 트이듯 숨을 토해냈다. 의도적인지는 몰라도 건물 내부 깊숙히 있는 제 방이 이렇게나 멀게 느껴지다니. 복도를 따라 거닐며 방마다 들리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평소 겪어보지 못한 소음이었다.

"필리아에서 도망치다가 들어온 놈이 있다는데, 아직 멀었나?"
"오다가 필리아 놈들이 죽여버렸을지도 모르지."

아무래도 내가 뜨거운 감자인가. 지민이 문 밖으로 들리는 말을 지나치며 제 방으로 향했다. 파이와 루크는 만났을까? 저를 배신자 취급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항상 자길 못믿냐며 개별활동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는 파이가 이번에는 자길 찾아나서지 않길 바라며 담요를 정리했다. 여기서 누가 한바탕 뒹굴고 간 것 같은데, 하며 인상을 찌푸리자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어? 어어. 이번에 새로온 분이구나. 반,반가워요."

휴지통을 슬쩍 들어 등 뒤로 숨기는 남자는 방금 죽을 것 처럼 어깨에 매달려 사라진 폴이었다. 뭔가 잔뜩 숨기고 있는 모양새에 지민이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그가 든 쓰레기통에 시선을 두자 폴이 크게 당황하며 미소지었다. 난, 새로왔다길래 휴지통좀 비워주려고. 하하. 그 어색한 미소에 지민이 한숨을 쉬며 환기구를 열었다. 방금 전까지 주인이 없었을 방에 누군가와 신나게 한 판 했을 거다. 미세하게 코를 찌르는 이질적인 냄새에 담요를 들어 폴에게 들려줬다. 미안해요!! 당분간은 주인이 없을거라길래. 얼버무리던 그는 지민이 대답이 없자 눈치를 보다 시트도 죄다 걷어 가져갔다.

"새,새거로 가져올까요?"
"..."
"새거로 가져와야겠다-"

잔뜩 딴청을 피우며 시트와 담요를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폴은 뒷걸음질치다 팔랑대며 문 밖으로 사라졌다. 덕분에 침대는 옷을 벗고 있는 모양새 때문에 철제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지민이 가만히 그가 나간 출입구를 응시했다. 환영받지는 못할테지만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언젠가는 끝내버려야 할 싸움을 시작했지만 아직 제게는 트라우마에 씹어먹혀진 과거였다. 외면하고 있던 모든 사실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를 위해 내가 무엇을 외면하고 있었는지 뼈저리게 느끼며 괴로워할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사람을 찾아달라며 전화한 본인이 사라진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클립토도 필리아를 수년째 쫓고 있다 진전이 없자 최후의 방법을 쓴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최근까지 필리아에 있다가 도망쳐 나온 나같은 지원군이 필요했겠지. 모든 것을 청산하기 위해서 클립토로 왔지만 사실 지민이 그들을 이길 수 있다고는 장담하지 못했다. 아마 클립토가 전멸되고 지민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필리아의 감시를 받을 만큼 위험한 짓인건 알면서도 싸우고싶다는 생각은 접을 수가 없었다. 이미 제겐 남은 사람이 없었으니까.

"시트랑 담요 가져왔는데, 테이블에 둘게요."
"..."
"이제 곧 저녁시간인데 혹시 괜찮으면 같이 가요."

지민이 소리없이 일어섰다. 같이 가겠다는 제스처에 얼굴이 밝아진 폴이 소개해줄 사람이 많다며 벌써부터 너스레를 떨었다. 정작 상대는 관심이 없었다. 어제 오후부터 아무것도 먹지를 않아서 그런지 속이 쓰리다 못해 긁는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랐다. 유니폼을 입지 않은 유일한 요원이 된 지민을 보는 눈들이 건물 내부로 들어갈 수록 숫자가 늘었다. 다들 필리아에서 온 남자라면서 수근대기 일수였지만 정작 악감정이 있는 놈들은 지민을 외면하고 자기할일을 하는 듯 싶었다. 그 들이 소란스럽게 모여든 관중들 사이사이로 보였다. 괜히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들은 괜히 더이상 상관없는 상대에게 살의를 느끼는 것 보다 다른 것에 신경쓰겠다는 태도였다.

- 내가 클립토에 들어와서 지난 5년동안 잃은 동료만 손가락으로 셀 수가 없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 중에 여기에서 몇이나 내 손으로 죽였을까 하는 물음이 들었다. 옆에 선 폴이 괜히 밝은 척 빨리 밥을 받고 자리에 앉자며 지민에게 식사배급방법을 가르쳐줬다. 제가 거북하지도 않은지 특별하게 지민의 몫으로 나온알약들을 챙겨주며 자리를 안내했다. 자리에는 동양인이 여럿 있었는데 지민을 보자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아해했다.

"덩치 큰놈이라고 하지 않았어?"
"내가 본 건 엄청 큰 놈이었는데..."
"다른사람 아냐?"

말라비틀어진 샐러드같이 생긴 놈 하나가 지민을 가리켰다. 지민이 대꾸하지 않고 식사를 시작하자 눈썹을 찌푸리며 기분나쁜듯 그를 내려다보는데 보다못한 폴이 옆구리를 쳐대며 말렸다. 샌디. 말 가려서 해. 샌디가 폴에게 몇마디 더 하려다 입을 꾸욱 다물었다.

"팀장님이 데려오신분이라길래 팀 내에서 엄청 궁금해했거든요."

말 안해도 이들무리와 한팀이라는 소리였다. 팀원이 어떻든 정보국만 없애버리면 상관이 없다는 눈빛에 팀원들은 조금 움찔거리긴 했지만 이내 흥미를 잃고 식사를 시작했다. 아마, 필리아에서 온 독종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잔뜩 나약해진 몸뚱이를 가지고 겨우 살아남은 사람한테.

식사를 끝마치고 식당에서 물 한잔을 받아 입 안에 털어넣는 것 까지도 눈들이 쫓아왔다. 인간동물원이 따로 없는 모양에 뒤따라오던 폴이 왜 사람을 그렇게 쳐다보냐며 대신 으르렁댔다. 지민도 모르는 사이에 친근함이라도 생겼는지 아니면 본인이 저지른 일이 마음에 걸린건지 주위에 맴돌면서 지민을 쫓았다.

"저새끼 그냥 필리아 앞잡이 같은데? 머리채잡고 싸우는 거 아냐? 내 오빠야 이 개년아-!"
"푸흐하하하!!!"
"입닥쳐 델로스."
"뒤에 게이하나 달고다니는 것 봐라. 너무 특별해서 두 눈으로 쳐다볼 수가 없네."

덩치가 산만한 놈 둘이서 낄낄대며 조롱했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듯이 시선을 피하며 한숨을 쉬던 폴의 눈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뭘 봤다는 제스처에 폴의 시선을 따라간 지민이 그들의 뒤에 등장한 키 큰 남자를 쳐다봤다. 그는 나른한 표정으로 그들의 뒤에서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언제 왔냐는 듯 소스라치게 놀란 놈들이 덜덜 떨었다.

"지옥으로 처박히기 싫으면 방으로 들어가."
"헤,헤이즈? 임무는?"
"내가 지금 너희를 봐주고 있다는 생각 안드나? 입닥치고 사라져 제발."

보기만해도 짜증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헤이즈가 꼬리를 내리고 순순히 방으로 향하는 놈들의 뒷통수를 노려봤다. 저 새끼들이 제일 시끄러워. 헤이즈가 툭, 하고 말을 건내자 폴이 그제서야 웃었다. 인기가 많으면 안티도 감수해야지 뭐. 말은 그렇게 하지만 딱히 표정은 좋지 않아보였다.

"임무는?"
"안그래도 보고하러 가려던 참이야. 목표가 행방불명됐어."
"뭐?"
"필리아와 접촉한 것 같아."

슬쩍 지민을 쳐다본 헤이즈가 먼저 가보겠다며 빠르게 사라졌다. 폴은 다시 몸을 돌려 방으로 향하는 지민을 다시 쫓아왔다. 이름이 뭐에요? 그의 물음에 짧게 로이라고 대답했다. 폴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새차게 끄덕였다.

사실 로이가 목졸라서 많이 아팠어요. 그렇게 강한 충격은 되게 오랜만이었는데. 거의 맨손싸움이었죠? 폴이 입을 열며 웃자 지민이 그를 쳐다봤다. 설마 공격했던 요원이 폴이었다니. 그가 아직 남아있는 멍을 보여주기 위해 티셔츠 목을 잡아당겼다. 아직 지민의 손자국이 멍으로 그대로 남아있었다. 대신 폴은 빠져나가려고 지민의 배를 걷어찼지않았는가. 지민이 딱히 사과할 생각이 없어보이자 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그냥 그렇다구요 하하.

"언제까지 따라올겁니까?"
"아, 피곤해요? 그럼 지금 갈게요."

폴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다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내일 훈련소에서 봐요. 그의 말에 지민이 대답 대신 방 문을 닫았다. 큰 문소리가 여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파묻혀 사라졌다. 지민이 마지막으로 발악하듯 한숨을 쉬며 그대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내가 나를 잊지 않는 법. 내가 나를 끝까지 놓치 않는 법. 지민이 마법주문처럼 중얼거렸다.










-










"독의 출처를 찾아봤는데 10년 전에 필리아가 인질 생포용으로 사용했던 물질입니다. 후유증이 심각해서 클립토 대원들도 초반에는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많이 죽곤 했었는데."
"..."
"여기 오기 전에 필리아의 공격을 받았던겁니까?"

도대체 놈들은 어디까지 흔적을 남기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힌바가 필리아와의 접촉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진 지금 지민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연구원도 지민의 표정을 보자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차트를 작성했다. 필리아에서 도망쳐나왔는데 끝까지 그들의 흔적에 괴로워하는 것 정도로만 여겼을 것이다.

지민이 팔에 주입되고 있는 약물을 올려다보다 다시 찾아오는 고통에 소파 깊숙히 몸을 기댔다. 숨을 깊게 들이쉬세요. 그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귓가를 때려서 인상을 찌푸린 지민이 귀를 손바닥으로 막았다. 해독 기간을 절반정도로 줄일 수 있다고 선택한 방법은 아마 지민이 느낄 모든 고통을 절반으로 축소해 놓은 것 같았다. 지민이 숨을 내쉬지 못하고 가슴을 내민 채로 괴로워하자 연구원이 급하게 호흡기를 꺼내 지민의 얼굴에 가져갔다. 미안하지만 정신을 잃으면 안됩니다. 지민이 괴로워하며 고개를 돌리자 지민을 연구실 창밖에서 지켜보던 두어명의 남자 중 호석과 눈이 마주쳤다. 호석을 붉게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던 지민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기분이 추락한다.

"저 남자가 고통스러운걸 보니 필리아에 복수하는 기분이 드나?"
"반대로 살려주고 있잖아."
"그건 그렇지."

수긍하는 동료를 뒤로하고 돌아선 호석이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방법은 아닌 것 같다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제 아래에 있던 녀석들이 죽어나간 것만 생각하면 온 몸이 떨렸다. 저 자식은 왜 제 발로 들어간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호석이 연구실 앞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자 치료를 마치고 파리한 모습으로 나타난 지민이 호석을 흘겨보더니 입을 열었다. 속시원한 얼굴이던데. 날 죽이지 못해서 아쉽게 됐어. 지민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지만 호석은 고개를 휙 돌려 그를 쳐다봤다. 동료들을 생각하면 찢어죽여버려도 시원찮을 관계지만 호석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폴을 호출하고 미련없이 걸어나가는 호석의 뒷모습을 보던 지민이 인상을 쓰며 비틀거렸다. 환영받지 못할거라면서 제일 탐탁치않아한다. 그렇다고 지민은 호석의 용서와 이해를 바라지 않았다. 언젠가는 나를 원망하는 사람이 생길거라고 줄곧 그렇게 생각해왔으니 하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천천히 걸어나가다 쉬길 반복하자 복도 끝에서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호석의 호출을 받은 폴일거라 생각하고 애써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려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세찬 발길질이었다. 나동그라진 지민이 숨을 참고 아픔을 이겨내고 있자 다시 한 번 발길질이 돌아왔다. 아으! 신음을 뱉으며 괴로워하고 있는데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그는 폴이 아니었다.

"개자식!"

남자는 화를 내며 지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 할 힘이 없어 그대로 바닥에 웅크리고 있자 뒤따라온 폴이 기겁을 하며 지민의 앞을 막아섰다. 지금 제정신이야? 만난 이래로 가장 큰 소리를 낸 폴은 남자를 향해 달려들 것 처럼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병신처럼 누워있지 말고 어디 덤벼봐. 어?!"
"괜히 시비걸지 말고 꺼져. 죽여버리기 전에."

받아친 것은 폴이 아니라 엎어져있는 지민이었다. 살의가 끓어오르는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자 남자는 폴을 밀쳐내고 지민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딱 봐도 힘 하나 못 쓸 것 처럼 굴던 지민이 그의 손을 뿌리치며 주먹을 휘둘렀다. 남자는 이제야 본성이 나오냐는 듯 비웃으며 지민의 복부를 무릎으로 올려쳤다. 벽으로 나가떨어진 지민이 다시 일어서서 남자에게 다가섰다.

"로이. 상대하지마요."
"..."
"로이!"

지민이 그대로 돌진하려고 하자 폴이 소리쳤다. 그 외침에 삐이이- 귓가에 울리며 고막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지민이 귀를 감싸자 그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든 남자가 지민의 귀를 후려쳤다. 가까스로 피한 지민이 뒷꿈치로 남자의 발등을 내려찍고 반사적으로 굽혀진 허리에 머리를 무릎으로 올려쳤다. 안면이 그대로 찍힌 남자가 코피가 터지며 뒤로 나자빠졌다. 헉헉거리면서 남자를 노려보자 지민을 향해 괴성을 질렀다. 더러운 필리아새끼들은 죽여버려야 해!! 지민이 남자의 손목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남자의 손은 의수였다. 의수가 망가져서 괴기한 모습으로 꺾여있자 신경질스럽게 잡아 뽑아버린 남자는 지민에게 다시 달려들듯 일어섰지만 폴이 그를 다시 막아섰다.

팀장님 호출했어. 이 이상 공격하면 내가 널 공격할거야 벤. 폴의 목소리에 분이 풀리지 않은 남자는 코피를 문질러닦으며 말했다. 더러운 새끼들. 너희는 사람탈을 쓴 악마야. 여러차례의 모욕이 지민에게 날아왔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긴 했지만 지민이 바닥으로 침이 섞인 침을 뱉었다. 지민이 기분이 나쁘다는듯 휘청이며 그들을 지나쳐갔다. 내게서 뭘 어쩌라는거야. 속죄같은 건 예전에 할 생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로이 정말 미안해요."
"...됐습니다."
"로이..."

머리가 부딪히면서 충격때문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지민을 뒤에서 불안하게 쳐다보던 폴이 무전을 했다.

"벤에게 로이 위치 알려준 망할 새끼가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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