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아... 짧은 신음소리에 놀라 방 안에 들어선  사토우가 울부짖고 있는 지민의 손을 잡았다. 분명 한동안 움직이기 힘들거라 했던 것이 무색하게 떨리는 양 손으로 머리를 쥐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틀을 잠들어만 있던 지민이 갑작스럽게 발작하며 힘겨워하자 사토우를 따라 들어온 남자는 이내 고개를 숙이며 마주하지 못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속일 작정이었냐는 듯 눈을 크게 뜨며 그를 응시하던 지민이 발버둥을 치며 옆에 두었던 유리잔을 벽에 던졌다. 산산조각이 난 유리 잔해가 남자의 발치로 흩어졌다. 마치 산산조각 난 둘의 신뢰와 같았다. 넌 내가 그동안 속는 걸 보면서 뒤에서 비웃고 있었겠지. 고작 날 이렇게 만들 작정으로 처음부터 내게 접근해온거야. 맞지?

"...김태형."
"..."
"김석진 어디 있는지 넌 알지?"

말해! 찢어질듯한 온 몸의 근육들이 내뿜는 고통에 입가가 온통 피투성이었다. 각혈을 하는 모양이었다.

"말해..."
"..."
"어디있어!!!!"

말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처럼 맹렬하게 응시하던 지민은 몸이 견디질 못하고 몸이 강제로 그의 정신을 잠재우듯 눈을 뒤집어까며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앞으로 몇 번을 반복할지 모를 그의 분노에 태형은 말 없이 발치에 흩어져있는 조각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았다. 제일 큰 조각부터 천천히 손 위에 올려놓는 그를 보며 사토우가 한숨을 쉬었다.

"그만해줘."

바닥만 보며 말을 내뱉는 태형을 보던 사토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겨우 시작이야.

"우리가 영원히 벗어날 길은 이것밖에 없겠지. 그런데, 로이가... 로이가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당신은 모르잖아."
"어쩔 수 없어."
"어쩌면 평생 우릴 용서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제발. 모르게 해줘. 당신은 할 수 있잖아. 애원하듯 말하는 태형의 손에서 피가 멍울졌다. 엘레나를 증오했던 그 눈으로 나를 원망할지도 몰라. 루크는 온전하게 진실을 털어놓고 울던 그를 안아주며 서툰 영어로 당신이 무엇을 하던 따르겠다고 했지만 지민은 다르다.

루크는 자길 믿을 수 있다고 했으면서 그렇게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반란군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고 했다. 차라리 그라도 제게 욕을 하며 미쳤다고 말릴 줄 알았던 믿음이 처참하게 깨졌다. 이제 더는 지민을 온전하게 볼 수 없었다.

죽은듯 누워있는 지민을 내려다보던 사토우는 곧 모든 기억을 되찾을것이라며 중얼거렸다. 그는 모든것을 바로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처럼 온 신경이 지민에게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까지 구해내지 못한 엘레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이리라.











13 : 반란











암전을 반복했던 기억들을 되풀이하는 탓에 체력 소모가 심했다. 발작하듯 분노하며 몇 번이고 울분을 토해내던 지민이 수십 번 반복한 분노 끝에 그것마저 포기했을 땐 변하지 않은 사실에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혼란스러워했다. 지민은 태형과 사토우가 번갈아 방에 찾아와 제 상태를 체크하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지민이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더이상 잃어버린 기억들을 찾고 싶지 않았다. 계속되는 두통과 그것을 증명하듯 떠올리고싶지 않은 처참한 기억들이 지민을 매일 밤 괴롭혔다. 그는 아직 두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것은 아직 그가 떠올려야만 하는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흔적과도 같아서, 그것이 무엇이든 이젠 지쳤다는 것을 안다는 듯 빈 잔을 치우던 태형이 고개를 들어 지민을 쳐다봤다. 허공에 닿은 시선은 원망하지도 그렇다고 해서 아무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 죽기 싫으면 꺼져.

다만 기억속의 김태형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 지옥같은 시간을 넌 어떻게 버텨 여기까지 왔을까. 태형이 빈 잔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고 지민을 향해 다가왔다. 날 용서하지마. 체념한 말과는 달리 태형은 이미 잔뜩 상처받은 표정으로 지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짓말."

지민은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천천히 감겼다 떠지는 태형의 눈에서 눈물이 차올라있었다. 코 끝이 붉어지고 붉은 눈동자를 가진 눈에 핏발이 선 채였다. 전혀 모양새가 좋지 않을 걸 알면서도 통제가 되지 않는 감정들이 손끝부터 발끝까지 차오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온 몸이 떨리는 것을 짓누르며 지민의 손을 붙잡았다. 한 번도 전해보지 못한 마음을 이제는 털어낼 때가 된 것 같았다. 지민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태형의 뺨을 어루만지며 눈을 감았다. 모르는 척 해서 미안해. 이기적이라서 미안해. 아니까, 그래서 더욱 격렬하게 외면했다.

빈틈 없이 가득 차있는 그의 흔적에 괴로워하는 지민을 옆에서 지켜보며 함께 견뎠지만 그렇게 제 마음을 표현할 자격이 없었다. 애초부터 그랬으면 안될 사이였으니까. 이 마음이 언젠가는 모순을 불러일으킬게 뻔했으니까. 그동안 그를 위한다는 명목아래 행해졌던 모든 행동들과 현재의 모든 상황들에게서 자유로울 순 없겠지만 태형은 마지막까지 지켜왔던 작은 마음조차 미련없이 놓아주는 것이 지민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동정심으로 유지해왔던 사이라고 해도 태형은 지민과의 시간이 불행하지 않았다. 그거면 됐다. 꼬여버린 인연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기까지 오래 걸릴테지만 기다릴 수 있었다.

"넌 잊은게 아니야."
"..."
"기억해 내야 돼."

그들은 기억들을 지운게 아니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게 무의식에 종속된 기억으로 의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민과 태형이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된 것은 단기간에 많은 본능들을 각성시키고 운동신경들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약물로 인해 민감한 감각들이 기억에 반응한 것이었다. 사토우는 필리아 연구실에서 빼돌려온 약물을 잠들어있던 지민에게 지속적으로 투약했다. 엘레나가 죽기 전 까지 두려워했던 반란군 취조 시 행해지는 고문중 한 종류였음에도 불구하고.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어."
-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어, 로이.

괴로운듯한 엘레나의 얼굴과 태형의 얼굴이 교차하며 지민이 눈을 감았다. 모든 사실은 모두에게 독이었다. 이 모든것을 감내하면 우린 과연 나아질 수 있을까.

"앞으로 어떤 과거를 떠올리든 난 상관 없어."

지민은 태형의 말에 더이상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진실이 앞으로 눈앞에 보이는 어떤 걸 바꿔놓을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태형의 말은 꽤 좋은 면죄부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현재는 그 광기가 익숙해져 제어할 수 있다고 해도 과거의 자신은 이리저리 휘둘려 되돌릴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한들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마치 과거의 자신이 현재와 별개의 사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지민은 빠른 회복속도를 보이며 점차 활동범위를 늘릴 수 있었다. 침대위에서 무리없이 일어설 수 있을 때 사토우가 찾아와 방의 커튼을 걷어냈다. 눈이 부셔 한동안은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창 밖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 뿐이었다. 필리아에게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틈 속에서 지민은 피가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헤레이스를 배신하던 그 날의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들어왔을까. 그는 내게 얼마나 날 죽이고 싶었을까.

작전 중 필리아 기지 한복판에 떨어져 죽었을지도 모르는 놈의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었지만 항상 태형의 곁을 지키던 루크가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무의적적으로 주변을 확인하는 지민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태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 얼굴로 식탁에 앉아있는 지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루크는 잠깐, 러시아로 돌아갔어. 무미건조하게 내뱉은 말에 지민이 제 앞에 놓인 빵을 응시했다.

"파이!!!"
"..."
"회신이 왔어. 아직 살아있는거야!"

그릇을 잡은 손을 벌벌 떨던 태형이 집에 들어와 큰 소리로 외쳐대는 동료를 충혈된 눈으로 쳐다보다 지민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곧 나갈테니 밖에서 기다려. 한껏 들뜬 표정으로 달려들어온 남자는 식탁에 앉아있는 지민을 슬쩍 곁눈질 하더니 굳은 표정으로 다시 돌아 나갔다. 지민이 그의 눈빛을 보며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반란군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한 기억이 없어 찝찝한 기분으로 손에 있던 물기를 털어내는 태형을 눈으로 쫓았다. 혹시라도 내가 이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사람이라면 내가 과연 기억을 찾고 나서 행복할 수 있을까.

"잠깐만 밖에 다녀올게. 사토우도 조만간 돌아올테니 선반 위에 놓아둔 약도 챙겨먹고 있어."

지민은 두통을 느끼며 식탁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새 스트레스를 받을 게 뭐가 있다고 손 끝에서부터 통증이 찌르르 타고 올라왔다. 손가락을 오므렸다 펼치며 그 고통에 익숙해지기까지 기다리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말한 대로 선반 위에있던 약을 꺼내 입안에 털어넣었다. 시간이 지나며 점차 더디게 두통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기계적으로 방문을 열었다. 그 날 처음 사토우가 지민에게 주삿바늘을 찔러넣었을 때 이후로 기억에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하지만 지민은 아직 기억해내야 할 것이 더 남아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음에도 사실은 더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그를 위해 배신들을 수없이 반복하고 사람의 숨통을 끊어놓는 과정을 떠올리면서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깨달았다. 여기서 더 힘든 기억을 끄집어내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지민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 당시의 그리움과 상처들이 고스란히 지민의 현재 기억에 전이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주 빠르게 지민을 집어삼켰다. 석진을 눈앞에 두고도 멀리 떠나기 위해 비행기로 올라탔던 자신에게 다시 밀려오는 미련들과 애달픔이 이제 더이상 그를 놓지 못하겠다고 제게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김태형은 분명 제게 김석진의 위치를 알면서도 알려주지 않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알아내야만 했다.

"오늘은 좀 어때."

지민은 사토우가 말하지 않아도 그 약물이 기억에 자극을 주는 것을 알았다. 사토우의 눈빛이 제게 향해있다는 것을 알고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려 눈을 맞췄다. 흰 얼굴에 초록빛과 가까운 색의 머리. 그가 조금 당황하자 지민이 정신을 차린 이후로 처음 입을 열었다. 여기서 나가고 싶어. 지민의 말에 사토우의 눈이 차갑게 식는 것이 보이는 듯 했다. 난 네가 말을 못하는 병에 걸린 줄 알았어. 반대로 사토우의 입은 호선을 그리며 말려올라갔다.

"지낼 장소는 있고?"
"있겠지."
"내 말은 네 목숨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곳이 있냐는 뜻이었어."

문득 뉴욕으로 향할거라는 카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라면 어떻게든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 기억 속에 남아있는 남자는 오랜만이라 그도 모르게 떠올라 지민의 머리속을 맴돌아 다시 빠져나갔다.

"항상 나한테 괴로우면 죽어버리라고 했으면서 지금까지 날 살려두는 이유가 뭐야? 고작 내가 기억에 괴로워하는걸 보기 위해서?"
"..."
"나도 그쪽 의도를 모르니 원하는 걸 해줄 수가 없잖아."

잘도 다해줄 것 처럼 말하는군. 사토우가 지민에게 다가왔다. 고작 괴로워하는 거라면 어떻게 할래? 사토우가 묻자 지민이 얼굴을 굳혔다. 당신이 내 고통에서 얻을 수 있는게 없을 게 뻔한데 그런 거짓말 누가 믿는다고!

"널 위해 죽은 사람이 편하지 못할 것 같아서. 고작 네 행복을 빌어주기 위해 희생한 사람들은...!"
"항상 그 빌어먹을 기억, 기억, 기억!!!"
"..."

죽으라면 죽을거고 살아남아 평생을 괴로워하라고 하면 죽느니만도 못하게 하루하루 괴로워하며 살아갈테니까 제발 내가 뭘 잊고 있는지 알려줘 제발. 지민이 빌듯 물기어린 목소리로 대답하자 사토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 이 모든 건 필리아에서 부터 시작된 절망이 여기까지 이끌고 온 것이리라. 지민에게 원망을 다시 제자리로 돌릴 때가 온 것 같았다. 항상 엘레나는 지민을 감싸고 돌곤 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민도 필리아의 희생자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눈에는 지민이 길 잃은 어린 양마냥 보였을지는 몰라도 사토우에게선 이보다 더한 애증은 없을 것이다.

반란군 블랙리스트에까지 올라와있는 네가 여기서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는지 궁금하면 입닥치고 가만히 있어. 사토우가 밖으로 나가면서 한 말을 곱씹던 지민이 눈을 감았다. 솔직히 자신이 없어, 니가 기억이 돌아온다고 해서 모든게 제자리로 돌아올지. 사토우가 지나가듯 말하며 문을 열었다. 그의 눈과 호석의 눈이 닮아있는 것 같았다.

"지민아?"
"..."
"지민아!"

미동도 없이 허공만 바라보던 지민이 거세게 흔드는 손아귀의 힘에 밀려 휘청거렸다. 미안해, 어디가 아픈 줄 알고. 놀라서. 두어걸음 뒤로 물러선 태형이 빠르게 다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사토우가 무슨 말이라도 한 거야?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지만 신경은 잔뜩 지민이 아닌 동료가 전달해준 소식으로 향했다. 괜히 나서서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한다면 변명조차 필요가 없어질테니까.

"내가... 여기서 나가고싶단 얘길 했어."

놀란 태형이 힐끔 고개를 돌려 지민을 쳐다보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렸다. 지민의 목소리는 그가 잠잠해진 이후로 처음이라 놀랐는지 숨을 잠깐 참았다 내쉬는 숨소리는 조금 거칠어져 있었다. 아직은 여기가 안전할지도 몰라. 필리아가 그 날 침입과 관련된 인물을 전부 조사하고 있어. 지민이 어디에도 쉽게 나서지 못하는 신분이기 때문에 주의해야 했다.

"아무리 필리아 반란군이라고해도 어디까지나 필리아였던 놈들이야. 너무 깊게 연관되지 않는 게 좋을거야."

그렇다는건, 거기에 너도 포함인건가. 지민이 말이 없자 손에 있던 물기를 털어낸 태형이 마주보고 앉아 그의 손을 쥐었다. 내가 비록 말하지 못하는게 있더라도,

"지민아."

날 믿어줘 제발.

"모두를 경계해."

제발.










-










필리아는 발전된 기술의 증명을 위해 나를 포함한 600여명의 사람들을 실험했고 나는 1차 실험에서 살아남은 6명의 사람들과 함께 요원으로 활동했다.

신체능력을 최고치로 끌어올릴 수 있었고 근육이 파열되거나 뼈가 부러지지 않는 이상 일반인의 몇백 배가 되는 활동을 견딜 수 있게 훈련받았다. 그러나 임무 도중 대부분의 요원들이 부작용이 발생했고 결국 나 밖에 남지 않았지. 난 다음 연구를 위해 처분될 목숨이었고 내 삼촌은 실험에 연관되어 제거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면서 우리 둘은 필리아를 이탈해 도망자가 되었지. 우린 반란군이 되기도 싫었어. 필리아라면 지긋지긋 했으니까. 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로 했지. 그러나 결국엔 그러지 못해서 이지경이지만.

- 못알아듣겠어요.

알아. 네가 알아듣고 모르고는 상관없으니까.

- 파이. 난, 당신이 필요해.

내 이름은 파이가 아니야

- 그럼요?

음... 유스?

내가 처음 루크를 네게 데리고 왔을 때 몰래 준비하던 선물을 드디어 보여주는 기분이었어. 이유는 모르겠어, 난 걔가 처음 시장통같은 항구에서 발에 걷어차여 더럽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을 구르는 걸 보면서 불쌍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가 더 불쌍한 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무조건 놈의 손을 잡고 가짜 신분을 두 개나 구해서 비행기에 올랐어. 내가 숨을 작은 울타리 하나에 눈이 돌아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루크는 대단해. 거처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며 항상 목숨줄을 계속 붙잡고 있어야하는 개같은 처지에서도 본인이 해야 할 일을 바로 알고 있었고 단 한번도 내게 화를 낸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동시에 미안했어. 네게 버림받을까봐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끝내 대답할 수 없을만큼 난 유스가 될 수 없는게 견디기 힘들었어. 나는 유스도, 너도 둘 다 사랑해. 그래서 난 널 원할 수 없어.

- 파이...

힘 있게 돌아간 얼굴을 다시 되돌려놓지도 못하고 서서 벌벌 떨던 루크가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에 시선을 두던 태형이 괴로운 듯 눈을 감으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루크는 분노에 못이겨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그를 잡지 못했다. 네가 뭘 안다고 김석진을 구하러가? 네가 뭘 안다고! 가면 못돌아올 수도 있다고 했잖아.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게 아니라고. 쥐어짜내는 목소리에 루크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쉽게 결정했던거 아니야. 난, 나는...

- 다신 우리 일에 끼어들지마.

태형의 눈을 보던 루크가 고개를 돌려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제서야 안도감에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은 태형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무릎에 처박았다. 너까지, 너까지 잃기 싫어. 그러나 아침이 밝고 루크는 반란군 신분으로 필리아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남긴 채 사라져 있었다. 태형은 당장 돌아오라는 무전을 했지만 이미 필리아 한복판일거라는 말에 무작정 구하러 뛰쳐나갔었다.

- 무슨 생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앨 데려가?!
- 마지막 무전하는 순간 다른 사람 옷을 입고있는 걸 들켰다더라. 입구까지 통과한 마당에 다시 돌아갈 수는 없잖아.

루크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모두가 괴로워하며 희망을 놓지 못해 구질구질하게 지내고 있는 모습이 답답해 보였겠지. 하지만 자기까지도 희생하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겨우 생사조차 이제 확인하게 될 정도로 필리아의 감시가 심해졌고 그 한가운데에 있는 김석진과 접촉한다고 해도 그의 기억이 온전한지 장담할 수 없었다. 태형이 무릎을 모아 고개를 묻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에 누군가 바로 태형의 목을 조를 것 같았다. 삼촌이 죽었을 때도.










"유스를 만났어?"
"..."
"로이."

엘레나가 어둠에 잠식된채 의자에 앉아있는 지민을 불렀다. 마치 마지막을 목전에 두고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끈질기지도 않은 숨을 내뱉고 있었다.

- 어떻게 여길...

그가 가까이 다가올 수록 목구멍에 두려움이 차올랐다. 그렇게 애원하고 갈망하던 사람이 오히려 석진이 한 번 다가올 수록 한 번 뒤로 멀어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듯 입술을 들썩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를 다시 만난다면 돌아가라 애원이라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미 그럴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무슨 권리로?

- ...오지마.
- 유스, 정도껏 해. 잊었어?

작은 외침이었지만 석진의 발이 멈췄다. 그는 지민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는 과거의 사람이 아니었다. 이젠 한쪽이 얼마든지 끊어버리면 그대로 끝장나버릴 관계라는 것도. 석진이 더 다가가려 하자 무표정의 파이가 석진을 불러세웠다. 경고였다. 당장이라도 김석진의 머리에 칼을 던져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지민을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김석진은 사이먼들의 인질이었다.

- 엘레나에게 가서 전해. 추적을 멈추지 않는 이상 돌려보내주지 않겠다고.

여전히 눈빛은 지민을 죽여버릴 것 같이 노려보고 있었다. 석진은 뭐라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끝내 입을 열지는 않았다. 둘 사이의 무언가가 있음을 짐작했다. 자신과 석진은 겨우 이것밖에 되지 못한다는 걸 알게되자 이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자신에대한 배신감이라고 하기에는 분노가 차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욕이라도 해줬으면 그 감정을 거울삼아 흉내라도 낼 것 같았는데, 자기가 먼저 도망칠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석진이 지민의 모습을 끈질기게 쫓았다.

지민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더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을 때 까지. 아무도 눈길주지 않는 곳에 도달할 때까지 제 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휘청이다 벽에 기대어 주르륵 내려앉았다. 결국 얼마 못가 자신이 필리아 소속 요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겠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래를 약속한 사이도, 그렇다고 뜨거운 사랑도 나눠본 적 없었잖아. 그렇게 합리화 했지만 심장이 터질 것 처럼 견딜 수가 없었다.

엘레나에게 기억이 잠식당하는 것 보다 더한 것이 있다면 이걸 두고 하는 것일테지.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이 기억도 전부 사라졌으면 했다. 형은 왜 그 사람들이랑 같이 있으면서 웃고 있었어? 형은 왜 날 그리워 하지 않는거야? 묻고싶은게 많았다. 하지만 그럴 기회조차 자신에겐 없다. 지민이 엘레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우두커니 서서 지민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욕심이 나서. 미쳐버릴 것 같아서.

툭. 툭.

"끄,으..."

주먹을 쥐고 제 가슴을 두드렸다. 꾹 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했다. 나아지는 게 없지만 그래도 답답한 마음을 어떻게든 도려내고 싶었다. 날 죽여줘요. 더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살아있으면 계속해서 원할거 아니까,

"그러기 전에 내 숨통을 끊어버리면..."
"내가 말했잖니."
"..."
"널 이용할 거라고."
"제발..."

내 이기심에서 비롯된 모든 것은 서서히 그 끝을 내보이고 말았다. 엘레나가 지민과 같은 눈높이를 하고 말 없이 그를 감싸안았다. 지민이 무너져내리며 끝없이 눈물을 흘렸다. 지민을 천천히 다독여주던 그녀가 지민의 뒷 목에 차가운 금속 기기를 접촉하자 그의 고개가 뒤로 훅 꺾이더니 온 몸에 힘이 빠지며 정신을 잃었다. 항상 그래왔듯 바닥에 흩어진 눈물들과 비슷한 모양새로 찬 바닥에 널부러진 지민을 언제부터 보고있었는지 사토우가 나타나 그를 안아들었다. 뼈마디가 앙상하게 드러난 그의 어깨를 내려다보며 자리를 옮겼다. 최근 음식을 제대로 먹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지민이 사라져버린 기억들을 인지하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엘레나는 항상 그의 끔찍한 기억들을 지우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침대에서 잠들어있는 지민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깊었다. 지민을 통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제대로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토우는 대신 외면을 택하기로 했다.

"반란군 쪽에서 정보를 원해."
"...엘레나."
"우리 팀을 노출시키기로 했어."

우리 팀의 상당수가 전 클립토(CLYPTO) 요원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더이상 방법이 없어. 말을 잇지 못하는 사토우를 지나친 엘레나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필리아의 요원들은 서로를 감시하며 생활하고 있다. 이탈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지, 반란군과의 접촉은 있었는지 아주 조금의 틈도 서로에게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갈까. 엘레나는 항상 끝을 생각해온 사람 중 하나였다. 이미 사이먼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 남아있는 필리아의 동료들을 위해 남아있는 사람. 반란군이나 현 클립토 요원들이 이들을 구출하면 책임자인 엘레나가 필리아에게 모든 기억들을 검사받아야 할 것이다. 대답을 할 때까지 고문을 당했다면 차라리 죽을 수야 있겠지만 그것은 그보다 더한 고문이겠지.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심연의 모든 기억들까지 전부 끌어올려 적나라하게 리마인드 시키는 그 과정들은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게 분명했다.

사토우의 메세지함에 트룰린들의 다음 거처와 의뢰 내용을 담은 메세지가 도착해 있었다. 해킹을 통해 얻어낸 정보였지만 꽤 믿을만 해 주로 쓰고있는 방법이었다. 액정을 바라보던 사토우가 혼란스러운 듯 눈을 감았다. 끝을 알면서 방관하는 것은 그보다 더 한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었다.










- 지원 바란다.
"알겠다."

굳은 표정으로 버려진 건물 옥상에서 동태를 파악하던 지민이 도약해 도주하는 놈 둘의 목을 잡아 눌렀다. 그대로 면상이 아스팔트에 찍혀 코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아직 정신을 잃지 않은 듯 지민의 손을 벗어나려 발버둥쳤다. 그의 무전에서는 다른 놈들을 전부 잡았다는 보고가 들렸다. 익숙하게 동료와 함께 두 놈의 양 손을 묶은 지민이 그들 중 하나를 질질 끌고 미리 대기중이던 차에 올라탔다.

지민이 탄 차가 문이 닫히기도 전에 출발하려 하자 골목에서 튀어나온 중형트럭이 옆면을 강타했다. 그 충격으로 잡고 있던 놈과 함께 열린 도어 바깥으로 튕겨져나간 지민이 놈들 중 하나가 바닥에서 일어서 도망가려는 것을 뒤쫓으려 벌떡 일어섰다.

"젠, 고개숙여!!"

지민이 즉시 고개를 숙이며 다른 차 뒷편으로 숨었다. 차에서 내린 놈들이 총을 갈기며 지민이 탔던 차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젠이다. 조엘과 다이나가 적에게 노출됐다. 지원 바란다. 지민의 무전기가 고장이 난 듯 반응이 없었다. 조엘이 운전석에서 나오자 놈들은 그를 포박하며 창에 얼굴을 박게 했다. 다이나 역시 그의 옆에 서서 지민에게 눈을 깜빡이며 신호했다. 어서 지원요청을 해. 하지만 지민은 먹통인 무전기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이나에게 박살난 무전기를 들어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경찰 옷을 입고 있던 지민이 서서히 누군가가 다가오는 인기척에 바닥으로 낮게 엎드렸다.

"성가시게, 경찰도 죽었잖아."
"상관 없어."

놈들이 바닥에 엎어져있는 지민을 지나쳐갔다. 확인 하지 않을 정도로 기본이 되어있지 않은 일반 갱 수준의 놈들이었다. 경찰모를 눌러쓰고 널부러져있던 지민이 큰 숨을 들이키며 두 놈 중 뒤에 있는 놈의 발목을 잡아 끌었다. 앞으로 고꾸라진 놈의 입을 막고 목을 잡아 비틀어 숨통을 끊어버리고 빼앗은 나이프를 앞 놈의 머리통에 명중시키자 그대로 넘어가 소리도 없이 죽어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아직 조엘과 다이나쪽의 놈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동료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분명 이쪽으로 올 것이다.

지민이 큰 엔진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쪽으로 온다! 놈들이 차를 향해 샷건을 갈겼지만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돌진한 차는 지민이 타고 있던 차를 다시 한 번 들이박았다. 차가 종이장처럼 구겨지며 폭발했다. 놈들이 피하느라 아수라장이 된 사이 다이나와 조엘이 건물 속으로 탈출하는 것을 보던 지민이 죽어있는 시체에게서 총을 빼앗아 건물쪽으로 내달렸다. 놈들이 지민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총을 쏘기 시작했다. 허벅지와 옆구리에 총알이 날아와 박혔지만 대응사격하며 벽으로 붙어선 지민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놈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눈에 보인 건 다섯 명. 방금 전 돌진해온 차는 필리아 소속의 차가 아니었다.

"젠장!"

누군가 지민의 손을 잡고 건물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버려진 건물은 한때 식당이었는지 시선의 끝에 프랑스어로 '새끼양 로스트'라고 적혀 있는 메뉴판이 걸렸다. 그것 말고는 색이 바래 더럽혀지고 뭉개져 처참한 것들 뿐이었다. 먼지를 뒤집어 쓴 모양새가 지금 지민의 모습과 딱 맞기도 했다. 지민이 등 뒤에서 거세게 뛰고 있는 심장소리를 느끼며 숨죽였다. 지민의 어깨를 감고 있는 팔이 긴장으로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적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놈들의 발자국소리와 총성이 가까워졌다가 이내 다시 멀어졌다. 지민이 괴로운 듯 눈을 감고 흐느끼듯 신음했다. 이미 오래 전에 눈물은 멈췄다고 생각했는데 응어리졌던 감정들이 목구멍을 타고 울컥 쏟아져나오려고 했다. 그것을 광기라고 착각할 정도로 통제할 수 없었다.

"아니라고 해줘, 제발."
"..."
"아니지?"

지민이 두통을 느끼며 석진에게서 벗어났다. 꺼져. 기억이 수십 번을 삭제되고 깨달은 것은 영원히 그에게 가까워질 수 없는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이다. 믿기힘들다는듯 그가 지민의 뺨을 감싸왔다. 온기가 내려앉아 차가운 뺨을 녹여왔다. 그는 지금 악마에게 손을 뻗고 있다. 제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는 괴물에게. 지민은 으르렁대듯 경고했다. 팔 뽑아버리기 전에 치워.

"치워!"

그는 울고 있었다. 생채기가 가득한 지민의 얼굴을 쓸어보며 죽을 것 처럼 괴로워했다. 2년 동안의 기다림은 고작 이걸 위해서 그렇게 힘들고 괴로웠던 걸까. 피를 토하는 고통에서 발버둥쳐도 제자리인데 우리는 알면서도 여기까지 버텨왔던 걸까.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지만 한 단어로 귀결되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지민은 당장이라도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싶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애초부터 엘레나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박지민은 절대로 김석진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을 수십번이고 지워내도 불가항력인 그를 밀어낼 수 없다고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석진이 지민의 어깨를 잡아왔다. 가지마. 지민이 석진을 밀어내려 손을 뻗자 석진이 반대로 그의 손을 더 단단하게 휘감아왔다.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
"내가 고작 너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착각하지마."
"..."
"예전에 다 잊었으니까."

지민이 그의 손을 거추장스럽다는 듯 털어냈다. 그가 다가와 지민의 머리를 당겼다. 맞닿은 입술에서 욕지기가 튀어오르며 손을 뻗어 그의 몸을 밀어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강하고 굳은 몸이 지민을 배로 당기며 그동안의 그리움을 쏟아냈다. 내가 왜 네게 돌아가지 못했는데. 이 말도 안되는 엿같은 신세가 너까지 불행하게 만들까봐 매일 밤 그리움에 발버둥 쳐도 네 행복을 위해서 그렇게 버텨왔는데. 너는...!

"도대체 왜 이런거야..."
"..."

지민이 헐떡거리듯 몸을 들썩이며 심장을 쥐어왔다. 동공이 확장되며 전과 확연하게 달라진 힘으로 석진을 밀쳐냈다. 빌어먹을 약물 부작용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흥분한 탓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벽을 잡고 서서는 차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는 석진을 올려봤다. 이미, 이미 늦었어. 지민이 석진을 향해 천천히 다가서자 그의 옆구리로 총알이 박혀들어왔다. 석진이 눈이 뒤집어지는 고통과 함께 눈을 감는 지민을 데리고 다시 가게안쪽으로 들어섰다. 놈들이 자신과 지민을 노리고 있었다. 파이와 사이먼이 타고 돌진한 차는 이제 쓸모없어 버려졌을 게 분명하니 여기서 선택권은 얼마 없었다.

그는 김태형의 부작용과 자신의 부작용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 처럼 지민을 붙잡고 눈을 맞춰왔다. 잔기침을 하는 지민을 진정시키려고 짧게 키스하고 머리를 쓰다듬고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지민에게 쏟아냈다. 그들이 석진과 지민이 숨어있는 가게에 들어와 수색하는 인기척을 냈다. 비무장일게 뻔했지만 둘은 겨우 한 자루의 총 뿐이었다.

죽을까? 지민이 일순간 충동을 느끼며 권총을 손에 쥐었다. 석진이 그의 손을 잡았다. 여기서 기다려.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밖으로 향했다. 총성이 들리고 누군가가 죽었는지 모를 정적이 흘렀다. 바닥을 기듯 몸을 움직여 카운터쪽으로 향했다. 2년 동안 많은 일이 흘렀다. 무용밖에 없었던 남자는 피를 흘리며 바닥을 기어다니고 누구보다 밝고 자상하던 그는 총성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지민이 바닥으로 피가 섞인 침을 뱉어내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걸었다. 석진이 흥분에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지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지마."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지민이 그대로 몸을 돌려 건물 밖으로 향했다. 멀리서 조엘과 다이나가 달려왔다. 젠, 어디 있던거야. 조금 타박하려다 크게 휘청이는 지민을 부축한 다이나가 제 손에 뭍어오는 흥건한 피에 기겁을 하며 무전에 알렸다. 식은땀을 흘리며 힘겹게 돌아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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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Zipd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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