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왔니?"

무표정으로 태형을 반긴 여자는 옆에 선 정국을 한 번 흘기고는 문에서 비켜섰다. 들어가보렴. 애써 내뱉는 그 목소리가 잔뜩 떨리고 있었다. 태형만 목례를 하고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이 열리며 기계가 간헐적으로 소리를 내며 미약하게 호흡을 유지시켜주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몸이 어떻게 나쁜건지, 뭐 때문에 이렇게 된 건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것까지 알게 되면 겉잡을 수가 없어질까봐 일부러 묻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발악이었다. 그것도 겨우, 할 수 있는 게 너무 비참했다.

"..."
"...태형아."

아버지는 깨어 있었다. 옛날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여기에서 벗어나면 죽어버릴 것 처럼 살이 빠져서 뼈가 도드라진 얼굴 위로 참던 그리움이 묻어났다. 오랜만이구나. 아버지의 말에 태형은 대답 없이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힘없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주저 앉고 싶은 걸 얼마나 참았는지 모른다. 무심코 정국이 있는 밖을 흘깃 돌아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게 고작 뒷통수만 보이면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멍하니 아버지를 다시 돌아봤다. 전정국이 이쪽을 쳐다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다. 그런데 한켠에서는 자꾸 이기적인 생각이 차올랐다. 전정국은 알고있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그 생각은 한잠이고 잘못됐다는 걸 자각하면서도 태형은 자신이 가진 비참함과 역겨움이 전정국과 완전하게 별개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해요. 이해하고 싶지 않아요. 태형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쥐면 으스러질 것 같은 손이 태형을 한 번이라도 만져보려고 움직이는 게 보였지만 이기적이게 안 보이는 척 손을 뒤로 숨겼다. 얼굴만 보러 왔어요. 엄마는 모르니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공터를 몇 바퀴고 뛰었던 적이 있었다. 저 멀리에서는 여자가 집 창가에서 태형을 끈질기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드시 50바퀴를 채워야 했다. 이유는 아버지의 외박이었다. 태형이 침을 질질 흘리며 버거워하는 걸 지켜보던 아주머니 한 분이 태형에게 다가왔다. 아가, 왜이렇게 뛰니? 무슨 일 있니? 그러자 여자가 헐레벌떡 달려와 이렇게 말했다. 태형아 여기에 있었니? 엄마가 한참 찾았잖아. 달리기 연습 하고 있었니? 태형의 손목을 쥐는 아픔에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마.

"미안하다...태형아."
"..."

뒷걸음질치는 태형을 여자가 뒤에서 그의 팔을 잡았다. 바르르 떨리는 손을 알아채고 한 행동이었지만 태형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여자의 손을 쳐냈다. 자기도 모르고 한 행동에 당황하며 어쩔 줄 모르던 태형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 저 이제 가볼게요. 몇 년이 지났건 아버지는 이 여자와 살고 있고 아버지에게는 유일하게 남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태형은 차마 그녀를 뭐라고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일까? 저 여자와 자신이 아들에게 인정받지 못해서일까? 이렇게 아직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허우적대던 게 불쌍해서일까? 끝 없는 물음을 지우며 문을 닫지도 못하고 나가버린 김태형을 쫓으려 뒤돌아선 정국의 어깨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굳어 멈춰선 정국이 이내 여자가 열린 문을 닫으려고 다가오는것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안녕히 계세요. 여자의 눈이 정국의 얼굴과 어깨를 타고 지나갔다. 섬칫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건 뭐든 상관없었다.

"...야."

복도에 멍하니 서 있던 태형을 잡은 정국이 물었다. 왜 날 데려왔는데. 김태형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정국이 손을 뻗으려다 거뒀다. 사실 태형과 닮은 얼굴을 한 번 보자마자 태형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잠시 김태형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 괜찮아졌을지도 모른다고 착각했다. 아버지와 다시 만날 만큼. 그러나 김태형의 무너져내린 얼굴을 보고 그저 일방적인 방패로 자기를 데리고 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던 거리감이 한순간에 커다란 웅덩이처럼 눈 앞에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머리가 이성을 되찾으면서 전정국은 심연으로 빨려들어갈 사람처럼 착 가라앉았다. 몇 년만에 본 어릴 적 김태형이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어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만남을 원한 그가 이해도 가지 않았고 이런 반응이 나올 걸 뻔히 알면서도 자신을 난도질하는 김태형도 전부 맘에 들지 않았다.

"가자."
"아주머니한테 말 할거야."
"두 번 다시는 안 올거니까 됐어."
"너 지금 상태가 어떤 줄 알아?"

이번이 마지막일 뿐이야. 앞으로는 안 찾아올 거야. 애초부터 입을 여는태형의 눈이 촛점이 맞지가 않고 있다. 이미 잔뜩 겁먹고 있으면서 뭐가 마지막이라는거야. 정국이 태형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앞서 나가는 전정국 때문에 자꾸 삑,삑 로비에 신발을 끄는 소리를 냈다. 너, 다 알고 있었지? 중얼거리던 태형이 끌려가면서 정국의 뒤통수에 물었다. 내가 병신처럼 병원에 처박혀서 있느라 학교도 못 다녔던거 알고 있지? 왜? 누가? 내 얼굴에 써있어서? 아니면 저 여자가 너한테 알려준거야? 태형이 이제는 발악을 하며 정국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다. 놔, 놔!! 그는 대답이 없었다. 온 세상이 전정국을 제외하고 자기를 비웃고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았다. 제발 지금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죄인마냥 질질 끌려가는데 그놈의 전정국은 김태형을 놓치면 큰일 날 사람처럼 손목이 빨갛게 달아오르도록 병원을 빠져나갈 때 까지 놓지를 않았다.

사람들이 둘을 한 번씩 뒤돌아 쳐다보고 사라졌다. 비웃음거리가 되기는 싫었는데, 전정국은 그런거 다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부산스러운 로비를 지나 병원 앞까지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걸었다.

"전정국!"
"니가 소리치면서 원망이라도 했으면 했어."
"..."
"봐, 너. 아직 여기 무섭다는 소리도 못 하고 있는거."
"..."
"난 너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 알아?"
"...거짓말."
"우리엄마도... 너랑 같이 1206호에 있었고."

넌 내가 그냥 굴러들어온 돌인듯 대했지만 난 그러질 못했다는 걸 너는 알까, 둘 사이의 암묵적으로 금지되던 과거의 이야기들이 정국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태형은 그 말을 들으며 정말 여자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기억 속 퇴원하던 날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꽃바구니가 태형에게 도착했었다. 엄마는 우리것이 아니라면서 쓰레기통에 그 이쁜 꽃들을 죄다 처박았고, 그게 그 여자가 보냈던 꽃이라는 것을 자라고 나서야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노란 장미. 그녀는 노란 장미를 내게 보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아버지는 태형이 지냈던 이 병원에서 죽어버릴 것 처럼 침대에 누워있었다. 결말 참 뭣같다. 기억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가라앉으려는 태형에게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한 마디로 모든 걸 용서해달라 애원했다. 이제와서 바라는 것도 없었지만 차라리 끝까지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않고 있었더라면 태형이 가지말리며 울고 애원해도 다 싼 짐을 끌고 집을 나가던 그 단단한 어깨만 끝까지 원망하다 끝났을 것을,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이제 괜찮을거야."

괜찮아야만 했다. 정국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태형을 응시했다. 갑자기 다가온 전정국을 밀어내지도 못하고 마냥 어색하기만 한 자신이 생소했다. 무너져버린 자신 앞에 선 그가 너무 강해보여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정말이야. 기어코 확신을 들게 하는 말을 뱉는걸 듣고 나서야 전정국은 물러났다. 그 동안 아무것도 모른다는 척 하던 전정국은 김태형의 생각보다 더 깊숙하게 들어와 있었다. 그래서 더 뭐라고 덧붙일 말이 없었다. 더 어렸을 때는 아무리 기억해내려고 해도 그 여자를 제외한 기억이 없으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한 마딜 꺼내지 않던 정국이 그대로 집에 들어가자마자 방으로 향했다. 안에서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물어볼 수도 없으니 그냥 생각을 접으려는 것 처럼 보였다. 평소대로 돌아온 건가 싶어서 시선으로 뒤를 쫓다가 대답없는 등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정국은 훨씬 더 오래 전부터 자기를 봤었다는 사실을 왜 이제야 말했을까. 오로지 그 여자 중심으로 기억이 이루어진 김태형은 고작 이것 밖에 못한다. 그래서 그에게 이해해달라는 말도 못한다. 옛날 기억에 아직도 잡혀 산다는 걸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 되었지만 태형은 혹시 전정국이 다른 사람에게 전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왜인지는 모른다. 썩어 곪아가는 건 난데, 아파보이는 건 다른 사람도 아닌 전정국같아서.





-






"김태형!"
"...왜."
"천원만 빌려주라."

그지새끼. 태형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천원짜리를 꺼냈다. 내일 안갚으면 뒤진다. 괜히 심술부리면서 주먹을 들이미니까 박지민은 깔깔대면서 김태형을 따라했다 '눼일 안가푸면 뒈진다-?' 얼굴을 오만상으로 찌푸리며 따라하니까 김태형의 얼굴이 따라서 찌그러졌다. 와, 존나못생겼어 진짜. 이런걸 친구로 달고 있으니까 일이 안풀려요. 그의 푸념이 들리기가 무섭게 이홍빈이 뒷문을 우렁차게 열고 들어왔다. 야 콩새끼!!! 박지민이 반갑게 이홍빈을 부르자 놈은 얼굴이 시퍼래져서 어버버버 거리다가 문도 안 닫고 토셨다. 저거 왜저래? 박지민이 어벙하게 뒤돌아 태형에게 묻자 김태형이 기가 차서 웃었다. 몰라서 묻냐?

"아 맞다."
"..."
"다음에 아니라고 말하지 뭐."

이건 또 무슨 태세냐. 원래같으면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나올 놈이 맞는데 박지민의 대답은 생각외로 온순하다 못해 멍청해 빠졌다. 태형이 뭔 이상한 놈 다보겠다는 듯 눈을 흘기자 박지민은 아이스크림 사먹겠다고 천원짜리를 들고 팔랑팔랑 사라졌다. 병신새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새 또 붕 뜬 박지민으로 돌아와서 자기를 잔뜩 휘젓고 사라졌다. 사실 이게 맞는 것이지만 오랜만에 오는 관계의 평온이라서 태형은 눈물이라도 흘릴 지경이었다. 폭풍이 가고 남은 주말에는 죽어버린 사람처럼 가만히 있다가 밥 시간이 되면 알아서 식탁앞에 앉아 밥을 먹고 반도 넘게 남긴만큼 돌아오는 걱정스런 물음에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처박혔었다. 계속해서 침대위에 누워 잠을 자려고 뒤척였다. 전정국은 자신의 뒤척이는 소리가 신경이 쓰일법도 한데 책상 위에 앉아서 계속 뭔가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기적이었던 태형은 그가 화장실에 가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알게 됐다. 애초부터 책상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서로의 존재만으로 잠을 잘 수도, 그렇다고 다른 일을 하거나 자리를 떠버릴 수도 없다는 게 참 서로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독과도 같은 말을 서로 나눈 것 치고는 잔잔했지만 그만큼 속에서는 치열하게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전정국에게 내가 해만 되는건가. 그 뒤통수에 대고 속으로 물었다. 아침조회시간에 이어달리기 영웅으로 잠시 추대받았던 전정국은 1교시 이후로 한결같이 책상에만 앉아 있었다. 평소같은 모습이었지만 계속 신경이 쏠려서 나중에는 아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놓고 엎드려서 자기도 했다. 그렇다고 알아주는 거 하나 없는데 그냥 그러고 싶었다. 내가 모르는 내 모습을 전정국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되려 묻고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참고 있는 중이었다. 예전에 나는 조금이라도 웃던 적이 있었는지, 견디는 게 힘들지는 않았는지. 그러다가 또 그 여자가 기억 나서 두 눈을 감고 큰 숨을 들이쉬었다. 쇠사슬에 엮인 것 처럼 의문을 가질 수록 다른 기억들도 딸려 올라왔다. 김태형은 그게 더 자길 난도질 하는 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전정국의 뒷통수에 대고 물었다.

육성재가 왜 그날 그렇게 이성을 잃고 날뛰었는지 한상혁은 그 이후로도 계속 답장이 없었다. 보내려다 까먹었는지 읽고 씹었는지는 신경쓰지 않았지만 박지민이 자신에게 거짓말 한 건 분명했다. 육성재는 박지민에게만 민감한 새끼였다. 자신의 상식선과 많이 멀어진 새끼한테만 유독 펄쩍 뛰는 미친새끼. 무슨 말을 들었길래 피까지 봤나 싶었지만 한상혁은 당사자 입으로 말하지 않고서는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았다.





하교하기 전에는 너때문에 살 탔다고 칭얼대는 김민석의 주둥이에 아이스크림 하나를 물려주고 그나마 죄책감을 턴 기분으로 교실을 나올 수 있었다. 슬리퍼를 신발장에 던져넣으면서도 학교가 끝나자마자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지는 전정국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확실히 그가 새롭게 보이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야 근데 박지민이랑 육성재랑 쌩까는 사이 아니었냐? 근데 왜 박지민때문에 육성재가 싸워?"
"몰라 박성우가 최근에 박지민 욕 하고 다녔다는데, 전에 다니던 지역에서 몸대주고다녔다 이런식으로 구라치고 다니니까 쌩깠어도 빡치지. 몰라 박성우그새끼 원래 구라 잘치는새끼였는데 언제 한 번 큰일 날거 알았어, 병신새끼."
"야. 너 그거 어디서 들었어."

복도에서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본 이과반 두명이 김태형을 보더니 좆됐다란 표정으로 한참을 머뭇거렸다. 박지민을 만나고 생전 처음 듣는 말에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니까 이과반애들은 거의 다 아는 얘기라고 했다. 그제서야 박지민이 왜 그 자리에 있다가 김태형을 보자마자 자기가 더럽냐고 물어봤는지 전부 퍼즐처럼 맞춰졌다. 사실일까? 란 물음이 김태형을 삼켰다. 전부 이게 사실이 아니면 뮈냐고 속으로 계속 되물었다. 다른 놈들은 박성우가 좆같은 소리를 듣고와서 친구한테 뭐하는 짓이냐고 그냥 넘긴다는 늬앙스였지만 태형은 그러지를 못했다. 이상한 포인트에서 비정상적이게 돌변하는 박지민이 그 날 그 표정으로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태형은 여느 남학생들처럼 박성우에게 병신이라고 하면서 무시했을 게 뻔했지만 상황이 달랐다. 넌 왜 다 체념한다는 표정이었는데. 차마 엄두조차 못낼 물음만 계속 허공을 맴돌다 가라앉았다.

맞다고 해도 관여하지 않는 게 답이라는 걸 굳이 돌아서 생각하려니까 머리에 쥐가 났다. 박지민에게 김태형은 그저 고등학교 친구 이상 이하도 아니니까. 멋대로 생각해버리고는 책을 덮는 것 처럼 생각을 닫아버렸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별다른 해명도 없는 이야기를 가지고 늘어져봤자 상처받는 건 서로가 되니까. 태형은 집 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아직 정국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듯 비어있는 신발장을 우두커니 서서 한참 내려다 봤다. 다음주가 시험인데 연습이라도 하러 갔는지 먼저 돌아와 있지 않았다.

- 김태형!

들릴 리가 없는 환청에 놀라 퍼뜩 고개를 들었다. 숨도 제대로 못쉬는 줄도 모르고 기억속에 빨려들어갈 때 끌어당기던 목소리가 다급해서 대답도 못하고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켁켁댔다. 예전에는 떠올리면 짜증부터 치밀어 올랐던 전정국이라는 이름도 이제는 자기 자신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감정이 되어버려서 자꾸 태형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그게 무엇인지 들춰서 확인하기가 두려웠다. 자기 자신보다 훨씬 김태형을 알고 있는 게 전정국이 될 줄은 몰랐으니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지도 잘 몰랐다. 가방도 안 내려놓고 멍하니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데 별안간 바지춤에서 진동이 울렸다. 시계의 짧은 바늘이 7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보세요."
- 태형아. 아줌마야.

여자는 김태형에게 별거 아닌 것 처럼 굴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쓰는 중인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이렇게 자기 맘대로 전화를 걸어서 이것저것 떠들어대는 게 이해가 안 되니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무시하려고 해도 본능적으로 그게 안된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알아채고 있는 걸지도. 아직 제대로 여름이 오지 않았는지 해가 진 거실에는 빛이 사라지고 차가운 어둠만이 남아서 태형을 좀먹어갔다.




변호사아저씨 말 잘 듣고 네가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 말해줘야지 엄마한테 갈 수 있어.







-





"엄마..."
"일어났어? 몸은?"
"...무슨 말이야?"
"너 또 침대에서 끙끙 거리길래 정국이가 약사러 간다고 나갔어."
"..."

정국이 오면 밥 먹고 약 먹자. 응? 정말 무슨 일 있는거 아니지? 이리와 봐. 엄마의 미심쩍은 물음에 태형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거 없어. 이마에 닿은 엄마의 손을 느끼며 깔끔하게 대답했지만 병원에 한 번 가보자며 다이어리를 꺼내 든 엄마가 회사 비는 시간대를 찾았다.

"내일 학교 끝나고 다녀올게."
"미열있어. 엄마가 바빠서 매번 같이 못가니까 몸이 정확하게 무슨 상태인지 모르잖아. 맞지?"
"..."
"내일 점심시간에 같이 병원 갔다가 엄마랑 맛있는 거 먹고 집에 오자. 정국이도 같이."

태형아, 응? 슬퍼보이는 눈빛의 엄마를 보며 태형이 눈을 찌푸렸다. 분명 무슨 일이 있어보였다. 항상 일이 좋다고 한다지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거나 회의감이 들 때면 늘 태형과 함께 있기를 원했다. 그 때마다 태형은 어머니에게 지고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경제적 여유 때문에 태형을 아버지에게 보냈던 자격지심과 죄책감에 시달리길 수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빛은 옅어지지를 않았다. 태형이 거실소파에 앉아 몇 번이고 시계를 응시하다가 눈을 감고 푹 널부러졌다. 머리가 아파지려고 한다.

"다녀왔습니다."
"고맙다 정국아. 공부하는데 괜히 부탁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전정국은 흰 비닐봉투를 부스럭거리며 들어왔다. 식탁에 놓은 약봉지에 태형이 한 번 관심을 가지지 않자 그를 응시하던 정국이 약을 들어 태형에게 들이밀었다. 먹어. 툭하니 짧은 대답에 순간 태형이 짧은 숨을 뱉어내며 눈가가 붉어졌다. 순식간이었다. 뭐라고 딱히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그를 옭아맸다. 머릿속에서는 이걸 당장 처리해버리고 싶은데 애써 꾹 눌러담았다. 이대로 멈춰져서 붕 떠버릴 감정이었다. 당황해서 봉투를 잡아채듯 집어가자 정국이 뻗은 손 그대로 태형을 한참이고 내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발가벗겨진 기분에 짜증이 나서 자리에서 일어난 태형이 아직 다이어리를 뒤적이며 일정을 조절하는 엄마에게 향했다. 엄마 배고파. 그렇게 말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전정국쪽을 흘깃 본다.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는 정국의 등이 보였다. 전정국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그렇게 깊게 생각하고싶지 않았다.

태형이 무슨 바람이 불었나 배가 고프다고 하는 걸 들은 엄마가 화색이 돌았다. 아이고 내 정신좀 봐. 하며 냉장고로 향했다. 고기 재워둔 거 금방 해줄테니까 앉아서 기다릴래? 정국이도 와서 앉아. 그 말에 정국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게 부러 돌아앉은 등 뒤로 느껴졌다. 이렇게 숨이막힐 정도로 누군가의 존재가 크게 느껴졌던 건 따지자면 두 번째였다. 손이 벌벌 떨렸다. 왜 이러지? 양 손을 꾹 잡고 버텨보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온 몸이 떨렸다. 옆에 앉은 정국이 태형을 돌아봤다.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강하거 마주잡은 손 한 번,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한 번 눈으로 확인한다. 김태형.

"조용히 해."
"..."
"제발."

허공에서 시선이 맞닿았다. 다행히 숨이 차오르지 않아서 들킬 이유는 없었다. 닿은 시선에서 벗어나려고 눈을 감았다. 자기가 그 여자와 전정국이 겹쳐보이는 것도 아닌데 온 몸이 떨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제발 그만해. 그만해.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돌아오는 건 터지듯 나오는 큰 숨이었다. 태형이 헉, 하고 막힌 숨 때문에 어깨가 떨리자 옆에 앉은 정국이 본능적으로 그의 내려앉은 손을 잡았다. 괜찮아. 숨 쉴 수 있어. 여기에는 니가 있고 니 옆에는 내가 있으니까. 괜찮아질거야. 전부. 어디에 홀린 것 처럼 중얼거리던 정국의 손 아귀힘이 더 강해졌다.

거짓말. 태형의 숨이 트이면서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밥을 준비하는 엄마와 옆에앉은 전정국. 태형에게는 일상적인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아예 달랐다. 그의 손이 감싸 쥔 손등부터 시작된 열기가 도화선에 불을 놓은 것 처럼 화끈거리며 전신을 타고 흘렀다. 완벽하게 타인인 것 처럼 가면을 쓰고 앉아있던 정국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그는 마치 태형에게 전부를 내어줄 사람의 얼굴을 하고 태형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순식간에 그런 얼굴을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마치 처음부터 너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람처럼 어루만지듯 바라보는 그 시선 끝에는 김태형이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 처럼 마주보고 있던 태형과 정국을 보며 데워진 냄비를 식탁에 내려놓은 엄마가 웃었다. 둘이 드디어 친해진거야? 와, 진짜 엄-청 오래 걸린다 걸려!

깜짝 놀란 태형이 정국의 손을 털어내듯 움직이자 정국이 강하게 그의 손을 잡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잡고 있는 건 전정국인데 둘의 머리속에는 같은 물음이 떠올랐다. 왜?

"정국아 내일 점심시간에 아줌마랑 태형이랑 같이 맛있는거 먹으러 갈까?"
"...네."
"아니면 아예 집에 일있다고 해버릴까."
"엄마, 지금 시험기간인데."

그래? 몰랐네... 미안해. 그녀가 자리에 앉자 그제서야 잡은 손이 떨어졌다. 괜찮아요. 하루정도는. 정국이 입을 열자 얼굴에 조금 화색이 돌았다. 아줌마가 담임선생님한테 거짓말정도는 해줄 수 있다? 장난스럽게 말하자 정국이 소리내어 웃었다.






-





부스럭대는 소리에 눈뜬 지민이 일어나 앉았다. 뭐해. 그의 물음에 석진이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의 앞을 보던 지민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탁자위에 있던 자신과 태형, 성재, 상혁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이제는 절대 저렇게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탁자위에 늘 자리하던 걸 치울 수가 없어서 미루고 미루다가 그냥 체념하고 관둬버린 탓이었다. 자신이 카메라를 들고 성재와 투닥거리며 앞에 있고 뒤에 나란히 앉은 태형과 상혁이 마지못해 브이를 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자신의 고등학교가 전부 들어있는 사진이 아직도 혼자 탁자 위에서 멈춰있었다.

"친구들이야?"
"...응."

친구였었지. 뒷말은 삼켜버렸다. 학교로 돌아가면 저 세명이 저를 혐오하며 피할까봐 무서워서 제 입으로 통보하듯 내뱉었던 게 잘못이었다면 가장 큰 잘못이다. 일종의 자기방어였다. 내가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 아무렇지 않겠지. 사실은 상처에 소금을 들이붓고 칼로 난도질하는줄도 모르고 생각나는 대로 내뱉고는 집으로 돌아와서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었다. 김태형이든 육성재든 한상혁이든 누구 한 명이 제게 찾아와서 죽이려고 들 것 같았다. 모든것을 토해내듯 밝혔던 날, 정신없이 쓰러지듯 잠들고 일어나서는 갑자기 벌벌 떨며 지칠 때까지 울부짖었다. 왜 이렇게밖에 끝낼 수 없는거지? 난 영원히 혼자 괴로워해야 되는 걸까? 제 손으로 관계를 박살내 버리고는 겁먹고 괴로워하는 건 본인이다. 이기적인 박지민.

뒤돌아있던 석진이 몸을 돌려 지민에게로 다가왔다. 행복해보여서 다행이다. 말하는 그의 오른쪽 가슴부근이 길게 생채기가 나 있었다. 정신없이 찾아들던 그 날. 지민이 차오르는 두려움을 막으려고 발버둥치다가 생긴 자국이 딱지가 내려앉아 썩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는 지민의 요구를 들어줬다. 하지만 그것을 이후로 지민은 더이상 석진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무서웠다. 본능적으로 떨리는 몸을 항상 좋은 말로 달래며 자신을 안아왔던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게 석진은 결국 도중에 그만두고 지민을 꽉 껴안았다. 제발 이러지 말자. 다른 방법을 찾자. 애원하듯 말하는 그에게 무방비하게 껴안긴 지민이 정신차렸을때는 그의 상처가 꽤 깊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를 원했으면서 벌벌 떨며 무서워하는 걸 보고 전혀 아프다고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졸리면 더 자. 5시밖에 안됐어."
"다 깼어. 원래 이 시간에 일어나니까."

석진이 맨 몸으로 안아올려 제 다리 사이에 지민을 놓고 껴안아주자 지민이 멍하니 그를 마주안았다. 기계적으로 불안함을 달래려는 수단인 것을 알면서도 거부할 수 없었다.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 알 것 같아. 자기 자신에게도 암시를 걸 수가 있으니까. 지민의 중얼거림에 석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넌 무슨 암시를 걸었는데?

"지금은..."

더이상 말이 없는 지민을 바라보던 석진이 지민의 뒷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 안해도 돼. 그의 말이 애써 덤덤했지만 지민을 쓰다듬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난 형을 이용하게 될 거야."
"괜찮아."

지민에게 무척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에 한참이고 말이 없던 석진의 눈가가 붉어졌다. 고마워. 네 앞에 존재할 수 있게 해줘서. 니가 나를 이용한다고 해도 상관없어. 차마 떨어지지 않는 말은 씹어서 삼켜버렸다. 무슨 말을 한 들, 금방 떠나갈 사람같아 보여서 석진이 먼저 그런 태도를 보여버리면 지민이 미련없이 자신을 놓아버릴 것 같았다. 한참이고 체온을 공유하던 지민이 석진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학교 갈 준비해야지. 지민의 말에 석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다녀와.

석진은 지민에게 이제 더 이상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옛날과는 달리 그냥 앞에서 사라지지만 않으면 그걸로 된 거라고 위안한다. 데려다줄까? 그의 물음에 셔츠를 입던 지민이 고개를 돌려 석진을 응시했다. 필요 없다는 소리만 들은 석진이 멍하니 지민이 학교 갈 준비를 지켜봤다. 지민은 석진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지민이 없는 시간에 이 집에서 무엇을 할건지도 묻지 않고 그가 없는 사람처럼 평소대로 굴었다.

"지민아."
"나 여기있으니까 부르지마."
"...지민아."

교복마이를 입다 말고 멈춰선 지민의 눈이 감겼다. 난 형이 원하는걸 전부 들어줄 수 없을 만큼 망가졌는걸. 아무 말 없이 다시 마이를 껴입고 가방을 손에 들었다. 바라보는 눈길을 애써 무시하며 현관문에서 신발을 신는데 뒤에서는 전혀 움직이는 기척이 없다. 그 날 처럼 함부로 말하던 어떤 태도를 취하던 김석진에게 자신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던걸까. 그는 자길 버리고 새로운 장소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라고 떠났으니까. 하지만 김석진은 다시 돌아왔다. 그러면 그럴 수록 더 비참해지는 줄도 모르고 그는 계속해서 박지민을 찾았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거야?"
"..."
"...먼저 나갈게."

대답을 기다리면 아마 학교에 늦을 것 같아서 말 없이 나와버렸다. 어떤 태도를 취해야 될지 갈피를 못 잡아서 매번 피하기만 하면 상대를 더 부추기는 꼴만 된다는 걸 아는데 불구하고 계속 외면했다. 나 때문인걸까? 어슴푸레 해가 뜬 아침에 사람 드문 등교길을 걸었다.

난 아침잠이 많아서 지각도 겨우 면하고 다른 사람이 날 부르는 그 어감이 좋아서 계속 불러줬으면 좋겠어. 지민이 석진을 만나고 뜨거운 여름날 그늘 아래에서 대답했다. 난 항상 우리집에 누군가가 있었던게 사람사는 것 같아서 좋아했고, 이제 더이상 사진 속 걔들은 내 친구가 아니야. 거짓말 투성이로 대하는 내가 이래도 좋아? 김석진은 눈 앞에 없는데 계속해서 물었다. 마치 너는 이렇게 거짓말로 대하는데 그 사람도 너한테 진심일 것 같아? 하고 자신에게 묻는 것 같았다. 그래도 결국 그 대답듣기가 무서워서 도망쳐나왔으니 뭐라고 한들 지민은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이게 다 꿈이라서 깨어나면 석진을 처음만난 그 날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홍빈...?"
"...헐?"

홍빈이 아직 덥지도 않은데 땀을 흘린다. 지나치게 일찍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이홍빈은 처음이 아닌 듯 어색하게 인사했다. 너 항상 이시간에 학교오냐? 대답이 없었다. 저번에 그냥 도망가길래 사과할 기회도 없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지민이 대뜸 미안했다고 사과하자 홍빈이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뭐가 미안해하냐 그냥 그거 하나만 묻고 싶었다고. 괜찮냐고. 그 말에 지민이 씨익 웃었다. 괜찮아. 그 말에 이홍빈이 금방 풀려서 흐느적거렸다. 아니 난 또- 김태형이 존나 진지하길래 뭔 일 있는 줄 알고 쫄렸다니까? 흥분이 섞인 이홍빈의 말에 그냥 웃어넘긴 지민이 부러 걸음을 느리게 했다.

이홍빈은 좋은 새끼인것같다. 저새끼 더럽다며 벌써 피했을 놈이 언제 그런 걸 봤냐는 듯 그냥 이홍빈이었다. 하지만 제 속에서는 불안함이 쉽게 잠재워지지 않았다. 그래도 표현할 수 없다는 게 더 좆같지만. 김태형 겉보기랑은 완전 딴판이야. 신기한 새끼. 이홍빈이 기분좋게 말 했다.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덩치에 안 맞게 비실비실거리기나 하는 놈인데 자기까지 신경 쓸 정도면 좋은 새끼 인정이다 싶었다. 유일하게 남은 놈이기도 했으니까. 다만 지금 자신이 가장 두려워 하는 건 김태형이 자신의 일을 전부 알았을 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자신을 불쌍한 더러운 새끼라고 쳐다보는 것이었다. 세상 천지가 그런 눈을 해도 상관없는데 김태형 만큼은 안 그랬으면 했다.

다른 지역으로 와도 그 꼬리표가 남의 눈에 띌까봐 부러 다른사람과의 교류를 만드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셋은. 과거는 바꾸지 못한다고 했지만 잠시 잊게는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잠시 만끽하게 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너희 빨리 화해했으면 좋겠다."
"..."
"잘가라."

이홍빈은 아침 일찍부터 공부한다며 제 반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혼자남은 지민이 제 반으로 향하며 생각을 곱씹었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시간이 지나버렸다고 말로 꺼낼 수가 없었다. 육성재가 박상우를 갈겨버린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새끼 성격에는 그냥 듣기가 거북해서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직접 인정하지 않고서 이상한 루머를 퍼트리고 다니는 게 아니꼬워 보였다던가. 이런 잡생각을 늘어놓으며 책상 위에 교과서를 적당히 올려두었다. 허리가 아파서 나름 편한 자세랍시고 책을 껴안듯 기대어 엎어졌다. 김태형은 항상 교문 닫히기 몇 분전에 도착하니 아직 그가 오기에는 한참 멀었다는게 흠이었다. 별거 아닌 걸로 시비걸사람도 없으니까 좀이 쑤신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오늘 뭔일 있냐? 전정국이랑 김태형 둘다 조퇴했네. 이상한 조합끼리 나란히 교무실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점심시간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챙겨들고 사라졌다. 반장인 준면이 한 소리 하는 소리가 복도를 타고 들리더니 태형은 괜히 옆에 나란히 걷고 있는 정국과 멀찍하게 떨어져 걸었다. 붙어있어서 서로 도움이 될 게 없으니까 거의 벽에 붙어서 가던 태형을 보던 정국이 김태형을 병신보듯 했다. 뭐하냐? 그의 물음에 태형이 말 없이 앞서나갔다.

교문에 서 있던 차가 태형과 정국을 보자 시동이 걸렸다. 조수석을 열며 먼저 탄 태형이 콜록거리자 어디 아프냐면서 이마를 확인한 엄마가 물었다. 아니, 그냥 기침났어. 옆에 앉아 정면만 응시하는 태형을 두어 번 쳐다보던 그녀는 이내 차를 출발시켰다. 일단 점심 먹고 나서 어떡할래? 엄마가 묻자 뒷자석에서 아무말이 없던 정국이 부산스럽게 자리에서 움직이며 대답했다. 점심먹고 집에서 쉴게요. 정국이 그렇게 말하자 그래도 오랜만에 셋이서 나왔는데 어디 놀러가야되지 않겠냐 하다 옆에서 째려보는 태형 때문에 시험기간이니 안되겠구나. 하며 단념했다.

"회사사람들이랑 점심에 먹었었는데 꽤 맛있어서 꼭 같이오고싶었어."
"그래도 너무 많이 시킨거 아니야?"
"정국아, 열심히하는 건 좋은데, 몸 생각하면서 해. 알았지?"
"누가 아들인지 모르겠네..."

태형이 중얼거리자 어색하게 웃은 엄마가 태형의 접시에 가득 음식을 올렸다. 너무 많아. 태형의 말에 이거 다 안먹으면 큰일난다며 테이블 위에 붙어있는 코팅된 종이를 가리켰다. 남기면 환경부담금 5000원. 그걸 보던 태형이 고개를 저었다. 익살스럽게 웃은 엄마가 벌써 한그릇을 다 비운 정국에게 다시 음식을 담아줬다. 봐, 정국이는 벌써 다 먹었잖아.

"열-심히 먹으면 다 먹어. 알았지?"
"...엄마도 먹어."

태형이 손을 뻗어 엄마에게도 접시를 채워줬다. 괜히 콧등이 시큰해서 이내 접시에 코를 박고 먹는 척 깨작댔다. 이 평화를 깨고싶지 않기 때문에 전정국이 엄마에게 말하려는 걸 막았다. 반팔을 입은 제 몸에 푸른 멍들과 생채기를 보며 주저앉아 미안하다며 바들바들 떨던 엄마가 다시는 봐서는 안될 자신의 모습이 이대로 기억 너머로 사라졌으면 좋겠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빼앗겼다. 그래서 지키고 싶었으니까. 태형은 말 없이 크게 한술 떠 먹고는 애써 웃었다. 꽤 맛있네.

전정국은 집으로 들어갔다. 아파트 단지를 나서며 대학병원으로 간다는 엄마에게 큰 병도 아닌데 왜 비싸게 대학병원으로 가냐며 만류하던 태형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곳에는 아버지가 있었지만 태형은 혹시라도 그 여자와 마주치면 작아지는 자신을 보여주기 싫었다. 모르는척 한다고 아무렇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가 없어서 눈을 굴리며 고개를 숙인 태형이 말이 없자 엄마가 핸들을 돌리며 힐끔 태형을 쳐다봤다. 어디 안좋아? 체했어? 그 말에 태형이 고개를 저었다. 피곤해서.

계속 병실에 있는 아버지 때문에 그 여자를 만날까봐 태형은 계속 속으로 빌며 병원 입구로 들어갔다. 영양실조로 실려온 적이 있어서 그런지 일면식이 있는 의사가 태형을 보자 아는 척을 해왔다. 저번에 그렇게 퇴원시켜달라고 조르더니 또 오면 어쩌냐 짜식아. 그의 말에 엄마가 그러면 그렇지. 하고 태형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퇴원해도 된다고 하지 않았어? 엄마의 말에 의사가 웃었다. 태형이 아아, 그냥 빨리 가자. 하며 엄마를 접수처로 이끌었다.

괜히 오지랖넓은 의사라고 씹으며 자리에 앉아있던 태형이 접수를 마친 엄마의 꾸지람을 왕창 들어야 했다. 그러다가 몸 망가지면 어떡하냐고 타이르는 목소리에 태형이 칭얼대며 오래 있는게 원래 더 안좋은 거라고 하다가 등짝을 두 대 더 얻어맞았다. 아아 아파. 손이 닿지 않는 등을 문지르려고 온 몸을 비틀며 아파하고 있는데 태형의 뒤쪽으로 익숙한 남자가 지나갔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하며 눈으로 쫓다가 남자가 사라지자 그제서야 그 여자를 만난 이후에 주저앉아있는 자신에게 끝까지 괜찮냐고 물어보던 남자였다. 그리고 동시에 태형의 머리속에 박지민이 항상 뒷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던 지갑 속 증명사진이 저 남자라는 것도 다 기억이 났다. 왜 그걸 몰랐을까.

"엄마. 잠깐만. 잠깐만 여기 있어봐. 금방 다녀올게."
"뭐? 어디 가니! 태형아!"

어디에 홀린 사람처럼 뛰어가는 태형을 뒤에서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태형의 머릿속에서는 왜 긁어부스럼 만드는 일을 하냐고 아우성이었지만 몸은 그러지를 못했다. 로비를 나서 저 멀리 힘없이 걸어가는 남자를 향해 달려간 태형이 저기요! 하며 그를 불렀다. 그는 두어 걸음 더 걷다가 천천히 돌아서서 태형을 봤다. 가쁜 숨을 내쉰 태형이 콜록거리며 남자의 앞에서 숨을 골랐다.

"누구세요?"
"하...하아...혹시."

박지민 알아요? 목 깊숙히 올라온 말을 차마 뱉지 못한 태형이 한참을 뜸들이고 있자 남자가 들고있던 종이 봉투를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무슨 일이신데요?

"김석진. 왜이렇게 안 와."
"...아니. 잠시만. 이 분이 나한테 무슨 할말 있으신 것 같은데."

남자를 데리러온 다른 남자가 태형을 쳐다보자 태형이 겨우 숨을 다 고르고 대답했다. 아뇨, 사람을 잘못본 것... 태형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남자가 뭔가 알았다는 듯 혹시... 태형이 멍청하게 서 있자 석진이 말을 하다 말고 태형을 향해 웃었다. 저를 어떻게 아세요? 석진이 조심스럽게 묻자 태형이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 길가에서 도와주셔서요. 거짓말은 아니니 됐다고 생각하며 태형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조금 얼굴이 굳은 그가 한참 생각하더니 아, 저번에 앉아있던... 석진이 그를 내려다보며 괜찮냐고 묻자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감사인사를 못해서요. 태형은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자신의 입장에서 도가 지나친 것 같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석진은 괜찮다며 남자와 함께 사라졌다. 인연이 많네요. 하는 석진의 마지막 말과 그 의미를 알 수 없어서 한참을 덩그러니 남아있던 태형이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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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Zipd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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