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키다 9




"고비는 넘겼대. 고맙다."
"...네."
"태형이랑...잘 돌아가."
"네."

여자의 눈이 다시 한 번 정국의 어깨를 훑고 지나갔다. 그 눈에 알 수 없는 의문이 들었지만 고개를 돌려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아있는 태형을 응시하다 그에게로 다가갔다. 갈곳 잃은 손은 무릎에 고이 내려앉아 있지만 정신은 어디론가 떠나버린 사람처럼 좀처럼 정국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동그란 정수릴 보며 차마 그에게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전화로 대뜸 병원이라고 계속 중얼거리는 김태형 때문에 뛰쳐나와서 집에 가니 김태형이 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떨며 울고 있었다. 그래도 꼭 가야된다면서 떼를 쓰는 김태형을 정국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태형의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중환자실에 있다가 온갖 기계에 가려져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게 된 아버지를 보던 태형은 죽을 것 처럼 병실 밖으로 나가버려 줄곧 이렇게 앉아있었다. 김태형이 지금 혼란스러운 건 미운 마음과 그리움이 이리저리 엉켜서 그를 쥐고 흔들기 때문이리라. 김태형이 자신에게 의지한다는 것이 정국에게는 반갑지 않았다. 자기가 떠나면, 결국 김태형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 되니까.

"김태형."
"..."
"가자."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거라서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김태형은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정국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다. 정국의 앞서 걷자 그제서야 태형이 천천히 걸었다. 네가 금방이라도 쓰러질까봐 울부짖을까봐 발걸음을 맞춰 걷는다는 사실을 너는 알까. 김태형의 마음을 당장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저 정국은 그를 지켜본다. 네가 숨쉴 수 있게. 나에게서라도 편안할 수 있게. 쥔 두 손이 떨렸다. 행복을 빌어달라고하면 빌어줄 것이고 힘들다고 하면 얼마든지 기대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김태형은 혼자 서서히 바스러진다. 굴러다니는 낙엽처럼.

집으로 돌아와 방으로 사라지는 태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국이 급하게 나와 자리를 정리하지 않은 독서실자리를 정리하러 다시 밖을 나섰다. 그날 그 키스가 무슨 의미였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해도 서로가 위로받듯 한 그 행위는 여러가지로 입장정리를 힘들게 했다. 무섭게 자리한 김태형을 밀어내지 못하고 삼켜진 감정들이 정국을 괴롭게 했다. 네가 김태형 없이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잘 지낼 수 없다고해도, 잊을 수 없다고 해도 상관 없다고 대답하고 싶은데 이젠 그런것도 못하겠다.걷다가 멈춰선 정국이 눈을 감았다 지금껏 잘 참아온 것을 한 순간에 전부 내보이면 이 생활은 전부 끝장 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










"제가 지켜볼테니까 집에가서 눈좀 붙이고 오세요."
"지민아... 지민아..."

죽어갈 것 처럼 지민을 부르던 엄마가 눈물을 훔쳤다. 지민이 옷이랑 쓸 거 가져올게. 그때는 일어나서 말도 해야된다. 응? 주문을 거는 것 처럼 중얼거리더니 작고 마른 몸의 엄마가 병실을 빠져나갔다. 박지민은 죽은 사람처럼 자다 깨어나서 눈만 뜨고 천장만 바라보다 다시 잠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눈 뜨면 보이는 모든것들을 부정하는 것 처럼, 영원히 잠들어 버리면 어떻게 해야 될까 불안해서 석진은 지민의 옆을 떠날 수가 없었다. 많이 바껴있어도 좋으니 눈에만 벗어나지 말라고 했던 지민이 이제는 그 눈으로 석진을 담지 않았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부모들이 한 번 찾아오지 않고 돈봉투만 던지듯 놓아두고 간 것도 전부 맘에 들지 않았다.1년간의 악몽을 다시 겪는 것 같았다. 아예 말문을 닫아버린 지민은 웃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고 물건처럼 굴었다. 제발 원망이라도 해달라며 빌어도 박지민은 모든 화살을 자신과 김재혁에게로 돌렸다. 지금도 별다를 게 없다. 검사를 한 번 받아봐야 한다며 정신과 진료예약이 잡히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김석진."
"어."
"얘야?"
"..."
"미친새끼."

남준이 짜증난다는 듯 중얼거렸다. 제 인생 망친 것도 모르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꼴을 두고보지 못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석진이 술에취해 울부짖으며 제발 지민이좀 살려달라고 밤마다 울다 지쳐 잠드는 꼴이 좀 사그러든다 싶더니 눈 앞에 그 원흉이 누워있으니 기분이 좋지 않은 탓이었다. 너, 갑자기 우리집에서 나간다고 했을 때 설마 했는데 정말 얘한테 끝까지 이럴려고 나간거야? 니 앞가림이나 잘 하지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냐고 새끼야. 어? 그의 말에 석진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남준을 응시했다. 여기에서 할 말은 아닌것 같다 남준아. 딱봐도 입닥치고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인데 남준은 빠드득, 이를 갈며 석진을 내려다봤다. 너 그러다가 정말 뒤져 새끼야. 그의 작은 소리를 당연히 들었는데 그는 대답이 없다.

"너도 이만 들어가봐."
"너는 어디서 잘건데."
"...여기."
"제발 니 인생 더이상 망치지마."

망가질 거 없어. 이제 가라, 김남준. 그의 단호한 대답에 더이상 대화가 불가능할거라 짐작한 남준이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니가 후회라는걸 할지 모르겠지만 니가 여기 버티고 서 있는 거 자체가 쟤한테 도움될것 같지는 않다. 마지막까지 좋은 소릴 들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석진은 미동 없이 창백한 얼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옛날에. 내가 그랬잖아. 뭐든 받아줄 수 있다고. 니가 무슨 감정을 표현하던, 그 자리에 서서 같이 웃고 울고 해줄거라고. 대신 너는... 그대로만 있어달라고."

내가 더이상 한결같지 않아서 너도 나한테서 떠나가 버린걸까.

"니가 날 위해서 떠난 것도 알아. 근데, 날 위해서 여기 그대로 있어주면 안돼?"

애원하듯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히 울렸다. 소란스러운 병실에 그의 목소리가 아무렇게 묻혔다. 자고 있는 그가 들을 리 없지만 주문처럼 그가 다신 곁에서 떠나지 않게 빌었다. 과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래를 갈망하는 것도 아니다. 딱 지금. 이 순간을 박지민이 나를 봐주길 그렇게 바란다. 석진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침대 시트를 구겼다. 석진은 다니던 학교를 휴학했다. 항상 뭐든 잘할 것 같은 아들이 제 또래 남자애를 책임지겠다고 이리저리 나도는 걸 참지 못한 부모님은 끝내 석진을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는 공황에 빠졌다. 모두가 자신에게 뒤돌아선 그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어서 외면하고 또 외면했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되돌리려고 하다가도 지민을 보면 죄책감이 그를 좀먹어갔다. 김남준은 그런 그를 보고 바보같은 새끼라고 했다. 사실 그를 강간하고 몰아세운 건 니가 아니라 그의 형이고, 그 아이는 니가 이렇게 망가지는 걸 원하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왜 넌 서서히 죽어가?

- 지민이랑 계속 같이 다니던데, 무슨 사이야?
- ...
- 내가 알면 안되는거라도 있나보네.
- ...아는 형이에요.

나는 과연 뒤늦게 알았을까? 그가 무슨 의도로 자신에게 물어봤는지 그때의 나는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극도로 경계하며 다 아는 것 처럼 물어보는 그에게 석진은 어느것도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구라도 알게되면 둘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한순간에 아수라장 속으로 향하게 될거라고 생각했다. 기대에 찬 그 눈들을 속였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박지민을 속였다. 형은 아닐거야, 형은 지민이에게 관심이 많아서 그랬을거야.

"그게 아니었잖아..."

석진이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죽어서도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어쩌면 평생을 과거에 시달리게 만드려고 둘의 세상을 깨버렸을지도 모른다. 그의 비뚤어진 애정은 겨우 이런 결말을 만들어 냈는데 그는 마치 모든 걸 바쳐 사랑했던 사람처럼 재가 되어 사라졌다. 남아있는 사람은 그의 그림자 아래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










아 존나 김태형 저새끼... 김준면이 씩씩대면서 태형을 흘겼다. 시험결과가지고 저렇게 씩씩대는 걸 보니 놈이 이번 시험은 여간 신경쓴게 아니다. 정국은 그 벌게진 얼굴을 한 번 보다 제 성적이 누가 보고 가든 신경쓰지않고 펼쳐놓은 채로 잠만 잘 자고 있는 태형의 뒷통수를 쳐다봤다. 그러다 이홍빈이 반에 쳐들어오니 귀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말로만 사기캐라고 하지 같이 사는 입장으로서 놈이 머리가 좀 된다는 걸 주변인들은 잘 모르는가보다. 가끔 박지민이나 이홍빈이 놀러와서 백치미 하면 김태형이지! 하면서 놀렸긴 했지만. 정국이 한숨을 쉬며 제 성적을 내려다봤다. 완전히 자신과의 싸움을 져버렸다. 겨우 자보에 이름정도 올릴 만큼 떨어져서 처참할 지경이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을 수록 그걸 깨고 들어오는 누군가를 받아들여야 할까 계속해서 고민했다. 피할 수 없으면...정국이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들어 태형을 쳐다보자 김태형이 줄곧 자길 보고 있었다는 듯 눈이 마주쳤다. 누구도 피할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것 처럼 쳐다보고 있으니 김태형 옆에서 앓는 소리를 하고 있던 이홍빈이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내 먼저 고개를 돌려서 다시 앞을 보는 전정국 때문에 일시 소강상태.

너 전정국이랑 친해? 완전 다른나라 사람인 줄 알았는데 둘이 서로 쳐다보고 있으니까 어색하기 짝이 없어서 홍빈은 어벙하게 김태형 눈 앞에 손을 휘휘 저었다. 이 새끼, 쳐다본 게 아니라 그냥 멍 때린건가? 싶을 정도로 반응이 없었다. 완전하게 자신의 세계에 빠져버린 김태형은 숨은 쉬는 건지 한참을 미동이 없었다. 종이 쳐서 자기 반으로 돌아가야 하는 홍빈이 한숨을 쉬며 말없이 교실을 나갔다. 그 종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태형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 오늘 있었던 일 전부 없었던거야.

그걸 소원이랍시고 들어주길 바라고 있는 전정국이 이상한거다. 태형이 심장부근을 그러쥐고 툭툭 주먹으로 내리눌렀다. 언제 이렇게 지대한 관심을 표했다고 놈이 멋대로 침범해 들어와서 태형을 꼼짝 못하게 했다. 놈은 분명 자기한테 동정한 건데 멋대로 상상하고 멋대로 기대하게 만들었다. 샤프를 쥔 손이 벌벌 떨렸다. 숨을 못쉬어서 발작을 할 때도, 어긋난 감정에 제대로 찾아가지 못했던 아버지를 찾아갈 때도 전정국이 함께였다. 불가항력. 그것은 태형이 노력한다고 해도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갑자기 느낀 감정에 혼란스러워 하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태형은 그의 행동들이 어색하지가 않았다. 마치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다는듯 이제와서 외면하고 있던 전정국의 얼굴 하나까지 전부 그를 흔들어놓고 이제와서 전정국은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일관된 표정으로 김태형을 바라본다. 착각했던 걸지도 모른다는 환상까지 가지게 할만큼. 뭐든 감정표현에 서툰 김태형은 버티는 게 너무 힘들었다. 내가 너때문에 이러고 있다는 걸 알리기 싫어서 발악해도 결국에는 전정국에게 모든 걸 다 내줄 것 같이 굴까봐 불안했다. 이미 너무 많은 신경이 쏠려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면 안됐다. 절대로.

"야, 박지민은 괜찮냐?"
"어, 일어났대."
"다행이네."

김민석이 시험을 조져서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태형에게 물었다. 그냥 인사치례로 물어본 건 맞지만 화분이 깨져있고 애들이 난리가 난 걸 보긴 본건지 얼굴이 근심에 찌들어 있었다. 넌 안빡치냐? 박상우가 너네보고 게이새끼라고 했다며. 마치 자기가 들은 것 마냥 더 흥분한 것 같아보이는 민석의 얼굴을 보던 태형이 그냥 피식 웃었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물론 그 자식을 두어 대 패주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았다. 육성재 한상혁이야 둘 다 여자에 죽고 못사는 새끼들이라 당연히 빡쳐서 한동안 씩씩거리면서 거울을 종종 보곤 했다. 육성재가 야, 내 얼굴 게이같냐? 하면서 이러저리 살펴보면 농담으로 완전 마성게이. 라고 한상혁이 놀려대던걸 떠올렸다. 자기는 그 꼴을 지켜보면서 피식 웃어넘겼는데 잘 모르겠다. 그냥, 동조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 키스가 자꾸 떠올라서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지부터가 급했지.

태형은 그냥 박지민 깨어나면 알려주겠다고 말을 아꼈다. 그랬더니 김민석은 문흥이망- 하면서 이상한 노래를 불러댔다. 저 병신새끼, 어디서 저런걸 배워와서 저러냐 그랬는데 앞자리에 앉은 새끼가 갑자기 동조하면서 김민석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요즘 유행하는 거냐? 웃겨서 낄낄대며 웃었더니 조금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다. 웃어서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새끼들.










"왔냐."

아직도 창백한 표정의 박지민이 침대에 앉아서 씨익 웃었다. 옆에 아무것도 안 남은 사람처럼 파리하게 앉아있는 놈을 보던 태형이 욕을 하며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하나 꺼내왔다. 내일 퇴원한다며? 태형이 묻자 박지민이 어벙하게 웃었다. 6인실이 부족해서 2인실로 들어와서 오래 못있어. 여기 존나비싸거든. 지민이 장난스럽게 웃자 태형이 따라서 피식 웃었다. 하여간, 골때리는 새끼. 어째선지 며칠 전 부터 저를 찾는다는 지민의 소식 때문에 본의아니게 하교길에 항상 들려서 두어시간 말동무나 해 주다가 지쳐서 집에 돌아가는 게 허다했다. 그래도 처음봤을 때 보다 많이 나아진 것 같아서 괜찮긴 했다. 박지민이 자기 병실에 찾아오게 하는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지만. 태형은 더는 그 일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았다. 알려고 할 수록 지민과 자신이 어딘가 많이 닮아 있다고 여기는 자신이 싫어서 지민의 병실에서는 알맹이 없는 우스갯소리가 많았다.

육성재는 처음 박지민을 보고 뭐라고 했더라. 미안? 그것도 아니었다. 픽픽 쓰러지기나 하고, 약해서 어디에 쓰냐? 하며 과일 한바구니를 지민에게 냅다 던졌다. 억! 소리를 내며 어벙하게 과일을 받아든 지민이 뭐냐는듯 성재를 보자 육성재는 뭘봐! 얼른 학교 오기나 해. 하며 뒤돌아서 병실을 나가버렸다. 제 딴에는 많이 부끄러운지 고대로 집에 가버렸단다. 한상혁도 어이가 없어서. 육성재 욕을 씨부리며 학원으로 돌아갔던 게 기억났다. 저새끼 김첨지 아니냐고 뚝빼기로 한대 후릴까, 하면서 툴툴거렸었지. 이게 넷 사이의 결말이었다. 예전보다는 좀 달라지더라도 항상 붙어다녔던 넷이 아주 천천히 돌아서 다시 정착하는 그 모습이 태형의 눈에는 신기했다. 한 사람의 가치관이 움직이고 뭐 그딴건 모르겠고 그냥 제자리를 찾았다는 느낌이 생각보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박성우에게 고맙다고 절이라도 할까 생각해봤는데 그새끼는 그새끼대로 나쁜놈이라 그건 무리였지만.

"오늘 한상혁 답안지 뒷번호 밀려썼는데 다맞았대.  미친새끼."
"푸하하하하!! 올해 운 다썼네."
"그래서 오늘 밥쏜다고 떵떵거리다가 학원 특강잡혀서 토셨어. 시발... 내가 기필코 받아낸다."

한가지 달라진 점은 박지민이 내년에도 2학년일지라도 모른다는 점이다. 결국에는 이렇게 되어버렸는데 병신. 걍 좀 나오지 학교를 뭘 그렇게 빠져대냐. 놈은 예상하고 있던 일인지 소식을 들어도 그대로였다. 역시 병신. 태형이 지민이 들고 있던 귤을 낼름 뺏어먹었다. 아 시발, 내가 이쁘게 깐건데 왜 먹고 지랄이야! 태형이 실실 웃으며 입안 가득 귤을 씹었다. 겁나 달다.

"김태형."
"왜."
"너 좀 많이 달라진것같다."

귀찮은 건 딱질색, 남 일에 끼어들기 싫어서 저 멀리 도망가있기가 특기 아니었나. 너 완전 순해졌어. 이제 만물을 통달한거냐? 어디 산이라도 들어가서 살거냐? 나름 진지한 말에 태형이 입술을 삐죽였다. 뭐가 달라져, 달라진거 없는데. 그래도 어느 한편에서는 정말? 하는 물음이 떠올랐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한결같아야되는 건 아닌데, 왠지 그래야 될 것만 같아서.

박지민이 손을 휘휘 저었다. 내일 나 없는데 여기 와서 뻘짓하지 말고 오고싶으면 나중에 내가 초대하마. 꽤 선심쓰듯 말하는 모양이 맘에 안들어 가운데 손가락을 저어주니 지민이 이불을 휙 젖히고 쫓아오려고 했다. 야 내가 못달려서 여기있냐? 빽 소리를 지르자 태형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러섰다. 이제 조금 있으면 엄마가 퇴근시간이라 집에 가봐야했다. 나름 아쉬운 표정의 박지민을 뒤로하고 문을 닫았다. 병실 복도를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태형에게 인사했다.

"아,이제 돌아가는 거에요? 오늘은 일찍 가네."
"아...네."
"데려다드릴게요."
"아니에요. 이 근처 살아서 금방이에요. 안녕히계세요."
"아...그럼 조심히 들어가요."

지나치게 배려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병문안 온 친구인데 한 공간에 있지 않고 항상 밖에서 태형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행동에 괜한 거리감을 느끼게했다. 한 번은 왜 안들어오시고 밖에서 계시냐 물었더니 남자는 그냥 씨익 웃어버릴 뿐이었다. 친척인가. 싶었지만 지민이 그런 언급은 없었으니 그냥 친한 형동생 사이인가 싶어서 고개를 내저었다. 말하지 않는다는 건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치부해버렸다. 그렇게 생각하는게 차라리 속이 편했다.

"..."

지민이 입원한 병원이 익숙한 곳이라 엘리베이터에서 8층 표시를 계속 쳐다보다 눈을 감은 태형이 미련을 버렸다. 아직까지 혼자 현실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굴어버린다.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를 바라지도 않는 사이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남아있는 정들이 쉽게 태형을 돌아서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거다. 기억들은 생각보다 괴로웠고 그 고통은 생각만큼 길다.

태형이 고개를 저으며 건너편 카페를 무심코 쳐다봤다. 익숙한 옆 모습의 교복입은 소년이 누군가를 만나고 있다.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기가 어떤 얼굴인지조차 신경쓰지 못했다. 니가 왜?제발 다른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서서히 가까워질수록 그 얼굴은 정확하게 그녀를 만나고 있었다. 전정국에게 무슨 개소리를 짓거리는 지는 상관이 없었다. 자신의 온갖 치부를 다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숨이 가빠지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렇게 갑자기는 아니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서 잠시 시선을 두곤 다시 고개를 돌리는 알바생을 지나쳐 시야에 들어온 전정국의 팔뚝을 잡았다. 여자는 태형을 보자마자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다는 듯 기겁을 했다.

"태형아, 니가 생각하는 그런거 아니야."
"나와."
"태형아!"

큰소리 친 건 그쪽인데 겁먹은 쪽도 다르지 않았다. 나와! 태형이 소리치자 정국이 아무 말 없이 일어섰다. 지금 무슨생각하고 있는지 아무한테도 알려주지 않을 것 처럼 태형에게 순순히 끌려나오는데 태형이 여자에게 소리쳤다. 엄마인척 굴지마세요. 이제 남이잖아. 아버지만 아니었으면 평생 안 볼 사이잖아. 결국 날 나쁜놈 만드는 건 그쪽이고 내 모든걸 뺏어가려고 하잖아. 내말이 틀려요?

"내가 다 설명할테니까 일단 앉아, 응?"
"이제 나타나지 마요."

이미 예전부터 평생 안 볼 사이였는데 왜 나한테 미련을 가져요? 내 모든걸 가져가놓고 왜 자꾸 주변 사람들까지 힘들게 만드냐구요! 말이 끝날 때 까지 아무 말이 없던 전정국이 벌벌 떨리는 턱과 손을 쳐다보고는 오히려 제가 밖으로 태형을 끌고 나가려 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제 화를 주체 못하고 떨고있던 태형이 정국에게 끌려나갔다. 그녀는 더이상 말이 없었다.

계속해서 걸으며 이 상황이 도대체 무슨 일인지 해명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는데 뒤에 끌려오는 전정국은 아무 말이 없었다. 대로변에서 큰소리 내며 싸우기 싫어 집 앞까지 다 오고서야 뒤돌아선 태형이 정국을 쳐다봤다. 너는 내 어디까지 들어올 작정이야? 내가 원한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넌 끝까지 날 비참하게 만들어. 김태형이 아무 말도 못하고 노려보기만 하니까 전정국이 그의 잡은 손을 들어 흔들어보였다. 다 설명할테니까 그만 불안해 해. 그제서야 전정국을 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나갔다. 어찌나 세게쥐었는지 전정국의 팔이 좀 붉어진것도 같았다.

"김태형."
"니가 뭔데...?"
"..."
"니가 왜 그러고 있는건데."
"..."
"우리가 언제 가족이었나? 날 위해주는 척 하면서 뒤에서는 비웃고 있으니까 좋아?"

태형이 이성을 잃은 사람 처럼 몰아붙였다. 지옥같은 과거를 되세김질 하듯 그녀를 만나는 것도 모자라서 김태형은 제멋대로 단정지었다. 전정국은 분명 자길 동정하는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하기는 커녕 화만 날 뿐이었다. 숨을 못쉬어서 제 가슴을 쿡쿡 치며 고개를 숙인 태형이 힘들어했다. 쌀쌀한 겨울에 얇은 옷 하나만 입혀서 문 밖에서 하염없이 서 있게 만들었을때도, 감기에 걸려서 걱정하는 아버지를 뒤에서 노려보고 있던 그 여자의 표정을 봤을 때도 멍청하게 전부 당하고만 있었던게 생각났다. 이게 세상의 전부인줄만 알았지 별다른 해결책도 찾을 수가 없어서 순응하고 그게 또 습관이 되어버려 안으로 썩어곪아들어갔을 때. 딱 그 꼴이었다.

벽에 기대어선 태형의 얼굴을 손으로 잡아올린 정국이 그를 안았다. 다른 사람들과 어딘가 다른 자기가 너무 혐오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온 몸을 떨어대는 그를 아무 말 없이 감싸안으며 참던 그리움을 쏟아냈다. 옆에 있어도 그런 것 같지가 않다. 애처럼 가만히 안겨있다가도 자길 안고있는 사람이 전정국이라고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와서 손을 들어 밀어냈다. 자기랑 체격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밀려나는 기색이 없었다. 초라했다. 이 세상에 혼자 도태되어 나뒹구는 꼴이 그렇게 안쓰러웠는지 전정국은 그렇게 김태형을 감싸고 있었다. 적어도 태형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 일에서 꺼져 제발."
"..."
"그 전까지 잘 지냈잖아 우리. 있어도 없는 새끼마냥 잘 지냈으면서 왜!!!"
"그런 적 없어."

태형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전정국의 눈이 김태형의 얼굴을 담았다. 난 단 한순간도 너를 신경 안쓴 적 없어. 건들면 바스라질까 몇 걸음 뒤에서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던 수년간의 시간동안 자기가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는지 그가 안다면 도망가버릴게 분명했으니까. 나같은게 갑자기 너에게 원하는게 생겨버릴까봐. 끝까지 목너머로 삼키고 있었어. 정국이 입술을 깨물고 두어걸음 물러섰다.

"...김태형."
"동정해주고싶었냐?"
"..."
"더러운 새끼."

모든 감정을 떨쳐내듯 입술을 문질러닦은 태형이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미친놈처럼 그 키스에 의미를 부여하려 했던 자신이 너무 초라해졌다. 더러운건 본인이다. 단순한 동정이었는데, 그걸 애초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애써 부정하고 있었다. 왜 모든 관계가 뒤틀린 기분이 들까. 달라진 건 애초부터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원해본 적도 없는 관계에서 뭔갈 바란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으니까.










-










"나 진급못할거래."
"..."

조수석에 무표정으로 앉아있던 지민이 입을 열었다. 지민의 말을 모르는 척 본가 앞에 차를 세우던 석진의 눈꺼풀이 떨렸다.

"김태형은 이제 고3이라서 나 상대 안해주겠지?"

석진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러나 이내 다시 움직였다. 웃고 있어도 그 눈을 잘 아니까. 형을 이용할거라던 눈과 닮아있었다. 석진은 애써 웃으며 도착을 알렸다. 퇴원하고 본가에서 첫 저녁이었다. 제 방이었던 곳이 그대로였고 가끔 청소는 해 둔 건지 먼지는 없었다. 천천히 과거를 생각하던 지민이 비교적 빠르게 다시 거실로 빠져나왔다. 근처에 주차를 하고 오던 석진과 마주 보는 상태가 되었는데 그걸 보던 엄마가 지민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에 와서 아들이 좋아하던거 많이 했으니까 빨리 와서 앉아. 응? 얇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먼저 식탁에 앉은 지민이 과하게 종류가 많은 음식을 보고 입을 열었다. 잘먹겠습니다.

내가 힘이 좀 더 강했다면 이런 꼴은 아니었을텐데. 적어도 화분을 들던 그 새끼보다 덩치가 컸다면 내가 불쌍한 새끼는 아니었을텐데. 그 날 이후로 모든 관계에서 불쌍한 쪽은 본인이었다. 그러니까 애들은 다시 날 찾아왔고 손목에 있는 붕대는 날 더 불쌍하게 만들어. 맛있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석진도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엄마는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길 원했고 식사는 오랜 시간 계속됐다. 기계처럼 대답하며 식사를 마친 지민을 바라보던 엄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순진한 애가 가지고 있던 상처가 가늠이 되지 않아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그 거리는 아득했다. 자길 범하는 형을 애지중지하던 엄마를 원망하겠지. 전 남편을 닮은 지민을 지옥에 밀어넣은 엄마와 마주보는 것 조차 어떤 결심을 했는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오늘, 자고 갈거니?"
"그러려구요."
"그래. 방에 들어가서 좀 쉬어."

다리를 절뚝이며 방에 들어가는데 지민의 뒤로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형도 피곤해? 지민이 돌아보지 않고 묻자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피식 웃은 지민은 침대에 앉아 멍하니 석진을 올려다봤다. 불쌍한 나를, 언제까지 위해주고 같이 있어줄 수 있을까. 우리엄마가 내가 형을 좋아하게 된 걸 김재혁 때문인줄 알아. 그것보다 훨씬 더 전인데. 멍청하게 웃으니까 석진이 창문의 커튼을 치고 컴컴한 방에 불을 켰다. 지민아. 넌 내가 불쌍해?자기가 먼저 물어야했을 질문이 석진에게 먼저 나왔다. 그게 무슨 말이냐며 희미하게 웃던 지민이 석진의 표정을 보고 입을 꾸욱 눌러 닫았다. 그 동안 도망치듯 사라졌던 지민을 조금도 놓지않고 다 받아줄 것 처럼 대하던 석진의 표정이 자기와 닮아있다는 걸 처음 알아버렸는데 이기적인 박지민은 그것조차 무시하려고 한다. 어디서부터 그런 감정은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을까. 내가 형을 이용할거라고 했을 때 부터? 아니면, 형이 날 다시 찾아왔을 때 부터? 그 복잡한 감정들을 한 번 쏟아낸 적이 없을 김석진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망가져 있었다. 성숙해보이는 그도 겨우 지민과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던 어린 소년이었는데.

"잘자."

지민의 방에 걸어두었던 겉옷을 집어든 석진이 등을 보였다. 그가 밖으로 나갈 때 까지 한 마디도 할 수 없던 지민은 괴롭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제발 날 버리고 가. 둘 사이가 죄책감밖에 남지 않았을 때가 올거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 김석진은 널 버릴거야.
- 제발, 그, 만...!
- 언제까지 저새끼가 널 생각해줄 수 있을 것 같아?

김재혁은 틀렸다. 좆같은 소유욕에 빠져 남의 진심을 짓밟았다. 니가 말하던 김석진은 아직도 내 아픔에 빠져서 살고 있어, 기분 좋아? 그의 침대도 모자라서 내 침대에까지 끌고 와 고통을 줬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 내가 이 침대위에서 편하게 잠들 수 없다는 것도. 지민이 웃었다. 양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안되겠어. 집에 가ㅈ..."

문을 벌컥 연 석진이 잔뜩 불안한 눈과 마주했다. 그리고서는 말도 다 하지 않고 다가와 지민의 입술을 물었다. 날 이용하라고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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