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키다 8



"김태형!"
"...연락 한 번 없더니 무슨 일이냐?"
"나 없으니까 또 심심해서 골골댈까봐 형님이 한 번 와봤다."

몸이 성치 않은데 지 혼자 또 가오잡으며 태형의 옆에 앉아있는 폼이 꽤 살이 올라 있었다. 뒤에 선 한상혁이 육성재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봐도 놈은 싹 무시하고 괜히 오버하며 태형에게 치댔다. 어유 우리 태형이 오빠가 연락 없으니까 삐져떠요? 이러는 놈의 면상을 당장 발로 차버리고 싶었지만 아직 팔뚝에 지얼굴만한 붕대를 감고 있어서 꾹 눌러참았다. 저리가 소독약 냄새나. 육성재는 애써 괜찮은 척 하는건지 진짜 괜찮은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상혁과 나란히 앉아 매점에서 사온 빵을 뜯었다. 태형은 괜히 놈을 건들고 싶지를 않아서 입을 다물고 꽤 추워진 날씨에 외투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그냥 말하지 않고 헤프닝으로 지나갈 것 처럼 하던 육성재가 먼저 말꼬리를 텄다.

"박성우 그 씨발새끼 전학시켜버리는건데. 내가 먼저 시비걸었다고 퉁치자네."
"공부 잘하는새끼네 부모님이 일커지는거 바랬겠냐? 니 상처보고 봐준거라고 생각해라."
"그새끼가 분명히 알고 긁었는데 정당방위라고 발뺌하는거보고 놀라서 두 번 쓰러질뻔."

왜 싸웠는지는 제 눈앞에서 만담하는 한상혁도 육성재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냥 박성우가 얼마나 십새끼인지를 곱씹고 있을 뿐. 그렇다고해서 태형이 직접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이런 복잡하고 아이러니한 박지민과의 사이를 생각하며 놈이 대단한 병신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게 차라리 정신건강에 좋았다. 아니면 옛정을 생각한 거였다던가. 아무래도 좋다. 제가 가진 이 물음들을 육성재가 잘도 해결해 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 뜬소문들을 죄다 들었다. 오기전에 몸을 대줬다던가 하는 이야기들. 그 말들은 전부 박성우 새끼의 입에서 나왔지만 벌써 그 소문을 짓거려대는 새끼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이게 계속해서 크기를 키워가다 종국에는 그걸 사실로 받아들여서 박지민에대해 색안경을 끼는 새끼들이 늘어날 것일 게 뻔했다. 평소에도 수업을 곧잘 빼먹는 놈이라 전부터 노는 애라던가, 자기들이 걷는 인생과는 조금 다르게 사는 새끼라고 치부하는 놈들이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가만 둘 성격이 아니다. 또 되는대로 짓거려댈 게 뻔하지. 박지민이 미련이 없었다면 그날 그렇게 세상이 무너져가는 표정을 하다 자리를 떠버리는 육성재를 망연자실한 시선으로 뒤를 쫓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항상 가지고다니는 병원 앞에서 봤던 남자의 사진까지. 박지민은 도망쳐버릴게 분명했다. 이제 태형은 그를 그냥 지나쳐버릴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지민이 먼저 손을 내밀지 않는 이상 그저 생각으로만 멈춰 있겠지.

"덕분에 하루 세 끼 고기만 먹음."
"너 그러고보니까 살쪄서 존나못생겼다."
"뭐? 김태형 이 씹새끼가. 야 한상혁. 넌 인정하냐? 아니지? 얼른 내가 우주최강미남 육성재라고해."
"야 김태형. 너무 심하지 않냐? 난 육성재 못생긴거 육성재 처음 보자마자 알았는데."
"난 태어나자마자 계시받음. 니친구 육성재 존못이라고."

이 시발 둘다 꺼져! 육성재가 한상혁이 제일 개새끼라며 벤치에 앉아있는 한상혁위에 올라타 그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간지럼에는 민감한 놈이 자지러지며 놈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키도 큰 게 힘도 좋아서 제대로 밀리지도 않았다. 한상혁이 깔깔거리며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자지러졌다. 아 시발 벤치 뽑혀! 하면서도 오랜만에 둘이 이러고 노는 꼴을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참 별 지랄 다 떠는 그들의 뒤로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올라오는 박지민이 한쪽팔에 가방만 매단채로 걸어 올라가는 것을 발견했다. 점심시간이 뭐냐 병신새끼.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야, 어디가냐?"
"화장실."

으아아악! 그만해 시발 그래 너 우주최강잘생겼아악! 이미 늦었다면서 괴성을 지르는 한상혁을 계속 괴롭히던 육성재는 한상혁이 기절이라도 해야 그만 할건지 낄낄대며 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그 둘을 무시하고 박지민이 올라갔던 그 입구를 향했다. 셋이서 웃고 떠드는 걸 봤을까. 너무 멀어서 못 봤겠지? 괜히 찔려서 이런 병신같은 생각을 하며 계단을 두 세개 씩 성큼성큼 걸어올라갔다. 그러나 계단 끝 우뚝 멈춰서 있는 박지민 때문에 얼마 올라가지 못하고 멈춰섰다. 그가 쥔 주먹이 바르르 떠는 게 조금 떨어진 태형의 눈에도 보였다.

박지민이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따라 올라오는 걸 못봤는지 평온한 눈이었다. 오히려 태형이 당황해서 눈을 조금 크게 뜨고 지민을 응시했다. 존나 그렇게 또 꾸역꾸역 등교하는 새끼가 있네. 하고 혐오하는 박성우를 무표정으로 쳐다보는 박지민이 어찌나 편안해 보이는지, 오히려 태형이 욱 해서 한대 치려고 했던 발걸음을 멈췄다. 박지민이 예전과 별다를 게 없는 표정을 하고 있으니까 그 표정을 하고 지금 옛날 자신들에게 했던 일방적인 통보라도 할까봐 금방이라도 뛰어가서 박지민의 입을 막아버릴 생각이었다.

"넌 육성재한테 그렇게 쳐맞아 놓고는."
"..."
"주둥이를 놀리고 다니네."

태형이 지민을 쳐다봤다. 태형이 지민을 올려다보는 상황이라 자세가 불편하긴 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 한 번 더해보라는듯 도발하는 박지민은 생소하다가도 어딘가가 익숙해서 괜히 그가 볼 수 없는 곳으로 몸을 숨겼다.

"니 형이 가서 내 인생 조지라고 그랬어?"
"..."
"말은 똑바로 해. 그새끼가 먼저 만나자고 했어. 내가 그렇게 전학 간 학교에서 닥치고 있으라고 했는데."

멍하니 이게 무슨 말인가 생각하던 태형이 계단을 올라왔다. 지금 무슨 개같은 소리하는거야 박지민? 박성우의 물음에 지민이 고개를 돌려 계단을 막 올라온 태형을 쳐다봤다. 뭔가를 들킨 사람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곳에 있던 태형을 알고 있었다는듯 했다. 박지민은 그 세명이 웃고 떠드는 걸 다 봤으면서도 모르는 척 했던 걸거다. 아, 이제 너도 큰일났네. 니 형이 나랑 사겼던거...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벽에 처박힌 지민이 소리도 못 내고 쓰러져서 박성우가 쓰는 주먹에 맞기만 했다. 벌써 밥을 다 쳐먹고 축구를 하러 뛰어나간 새끼들과 별개로 교실에 있던 몇몇 놈들이 그런 둘이 싸우는 소리를 듣고 모여들었다.

 태형이 멍청하게 일방적으로 맞고 있는 지민을 지켜보다 박성우에게 달려들어 놈의 목을 조르듯 팔을 끼우고 떨어지게 했다.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조금 떨어지나 싶었던 박상우가 작정했다는 듯 엄청난 힘으로 몸부림치며 김태형을 밀쳐냈다. 밀려난 태형이 교실문에 부딪히면서 튕겨나갔다. 시발새끼야! 죽여버릴거야!!! 박성우가 다시 지민을 때리기 시작했다. 저새끼 말려 개새끼들아! 복도가 난장판이 되서는 박성우가 화분을 집어들고 지민의 머리를 내려찍으려 하자 멍청하게 구경하고 있던 놈들이 그 고함소리를 듣고 박성우의 양팔을 잡아서 떨어지게했다.

"시발...!! 너희들 애초부터 좆같아서 맘에 안들었어. 뭣도 안되는 새끼들이 설치고 다니는 거 내가 다 죽여버릴거라고!"
"이 시팔새끼가 정신이 나갔나!"
"아아아아악!!!!"

박성우가 발버둥을 심하게 치다 멈추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상혁과 육성재 그리고 김태형까지 한 명, 한 명 둘러봤다.

"너희들도 다 호모새끼냐? 어?"
"..."
"그러니까 붙어다니지 시발!!!!"

성재가 저새끼 미친거 아니냐며 여차하면 달려들 것 처럼 씩씩대다가 등 뒤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뒤를 돌아보곤 사색이 됐다. 컥컥소리를 내며 숨도 못 쉬고 벌벌 떨며 우는 지민을 보다 이새끼 왜이러냐며 중얼거리듯 그를 흔들었다. 야, 야 너 왜이래. 어? 박지민! 박지민!! 덩달아 사색이 된 상혁이 급하게 바지를 뒤져 전화를 걸었다. 태형은 이 모든 상황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박지민이 왜저러지? 육성재는? 한상혁은? 그리고... 나는? 교실문을 등지고 스르륵 주저앉은 태형이 미친듯이 쏟아지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멍청하게 벌벌 떨었다.

이 상황이 빌어먹게도 태형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애처럼 아무것도 못하고 앉아서 곧 죽을 사람처럼 발작하는 박지민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안다. 사람은 아무리 숨기려고 발악해봐도 삼킬 수 없는 불덩이처럼 버티고 서있는 상처가 있다고. 하지만 태형은 이 상황을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여기 계속 있다가는 정말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았다. 학교에 구급차가 도착하고 지민이 실려나가는 그 장면들이 너무나 익숙한데 기억이 나지를 않아서 괴로웠다.

- 엄마. 엄마!!! 죽지마!!
- 정국아... 미안하다. 미안하다...

"김태형."

누가 자기를 부르는 듯했다. 쉽게 딸려 올라간 태형의 얼굴이 눈물을 닦을 정신도 없는데 목소리 때문에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손 잡아 태형아. 나긋나긋 말하며 손을 내민 정국을 잡은 태형이 자리를 떠나려는 그에게 딸려갔다. 아직. 박지민이. 저기에. 전정국을 내칠 수 있는 명분은 충분했지만 그날 그렇게 자기를 끌고 병원을 나섰던 전정국과 많이 비슷해보여서 차마 쳐내지를 못했다. 학교 뒤로 끌려와서 벤치에 앉혀질 때까지 한 번 말이 없던 정국이 애원하듯 말했다. 왜 자꾸 신경쓰이게 만들어. 이제 괜찮아질 거라며. 별 일 없을거라며.

멍청하게 김태형은 다른 말을 중얼거렸다. 나 어렸을 때 기억 나. 니가 울던 날. 죽지말라고 애원했던 날. 순간 그의 얼굴이 눈에 띠게 굳었다. 기억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태형이 말하는 건 정국의 어머니가 죽던 날이 분명했지만 정국은 어떻게 해서든 다른 의미로 해석하려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김태형이 기억나지 않게. 손이 벌벌 떨렸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는 듯 매일 밤 울부짖던 어린 김태형이 혼자가 된 나약한 전정국을 쳐다봤을 때 알 수 있었다. 나도 그를 그동안 그렇게. 불쌍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그래서 어릴 적 이야기는 꺼내고 싶지 않았다. 서로에게 상처뿐인걸 들춰내봤자 서로가 서로를 불쌍한 취급이나 더 하겠냐고. 차라리 김태형이 어렸을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게 낫다고 그렇게 여겨왔다. 뭐가 잘못된걸까. 병원 앞에서 어렸을 때 이야기를 꺼낸게 잘못이었을까.

"아무것도 못했어. 멍청하게 앉아서 니가 우는것만 바라보고 있었어."
"...알아."
"니가...그렇게 울고 있는데, 나는..."

마치 죄인인것마냥 태형이 어린 눈을 하고 정국을 벤치에 앉아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원 하나 들어준다고 했잖아. 김태형."
"..."
"오늘 있었던 일 전부 없었던거야."

풀린 눈이 전정국의 눈을 그대로 담아서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그 여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다가온 전정국을 피하려고 발버둥칠때 전정국은 어떻게 여기까지 나를 생각하고 있었을까. 혀가 쓸어올려지며 입술이 살짝 벌어진 사이로 더운 바람이 들어왔다. 숨이 차올라도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손이 벌벌 떨리고 숨을 쉴수 없었던 것과는 다른 감정이 차올라 눈물이 났다. 전정국이 김태형에게 향했던 관심은 부재가 아니라 침묵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밀어내려고 발버둥치던 사람을 잡아둔 건. 불안해하는 김태형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각인시킨다. 무책임하게 없었던 일로 하라는 그의 말이 반대로 들렸다. 오늘 있었던 일 전부 기억해.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기억해. 태형이 그의 대답에 응하듯 입술을 움직이며 정국을 받아들였다. 넌 죽을 것 처럼 후회하겠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며 날 밀어내겠지. 그러지마 제발. 혼자 남아 초라해질 자신의 마음을 무시하지 말라고 정국에게 애원하듯 키스했다.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어디 갔었냐는 한상혁과 육성재의 엄청난 양의 메세지를 들여다볼 생각도 안 하고 침대 위에 누워서 전정국의 빈 책상을 멍하게 쳐다봤다. 항상 그 자리에서 등만 보여주던 전정국이 없는 자리가 이렇게 크게 느껴졌는지 잘 모르겠다. 키스가 끝나자 마자 다시 손을 잡아 끌어 집까지 데려다주고는 저는 그냥 다시 학교로 가려는 듯 돌아선 그 뒷모습이 유달리 작아보여서 한참을 그 뒷모습만 바라봤다. 이제 같은 공간에 사는 그와 자신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 지 미궁으로 빠져든다. 발작을 하며 병원으로 실려가는 지민을 보다가 오열하며 힘들어하는 전정국과 그런 그를 미안하다고 다독이는 엄마가 떠오르다니. 정확하게는 흰 천으로 머리끝까지 덮은 사람이 정국의 부름에도 대답한 번 해주지 않고 그대로 병실을 빠져나가는 그 장면이 제 눈 앞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지민을 만나기가 겁이 났다. 박지민은 생각보다 많은 걸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태형을 지배해서 그런지 그에게 무슨 말을 먼저 해야하는지 모르겠다. 지민이 안정을 찾고 잠들었다는 메세지가 진동과 함께 액정에 떠올랐다. 팔뚝으로 눈을 가린 태형이 한숨을 쉬었다. 한달 동안 학교에 나오지 못한 이유가 박성우의 형 때문이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박지민이 여전히 자신을 그런 눈을 하고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목을 답답하게 했다. 우리는 평범해질 수 없는 걸까? 그런 척도 못하고 평생 괴로워해야될까? 박지민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 눈이 익숙해서 박지민의 옆에 남아있었다는 것을 그에게 들킨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지민의 소문을 처음 들었던 날 걸려온 여자의 전화는 다시 한 번 아버지를 만나달라는 애원과도 같은 말이었지만 그것을 거절했다. 많이 힘들어하신다며 덩그러니 상처와 함께 남아있는 태형을 잡아끈 그녀는 울먹이며 제가 그렇게 잘못했냐며 태형을 원망했다. 난 니가 부러웠어. 난 니가 부러워서 그랬어. 이상한 논리를 들먹이며 제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그녀의 목소리가 이미 통제를 넘어섰음을 깨닫고 어딘가에 쫓기듯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용서를 바라냐 묻고 싶었지만 그 물음도 과분했다.

"짜증나..."

그날 정국과 함께 찾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나를 불쌍하게 여겼을까. 그래서 나에게 키스했던걸까. 생각과는 다르게 거부감이 없었다. 애초부터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이라도 했던 것 처럼 오히려 그를 더 찾아들었다. 부끄러움이라고는 한 치도 못느끼는 사람마냥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눈물을 흘리며 키스를 마쳤다. 멍하니 제 눈을 바라보는 전정국이 아직도 머릿속에 가득차서 이제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대로 모든게 멈췄으면 좋겠다.









-










"지민아!"

죽은 것 처럼 잠든 지민의 손을 잡고 우는 작은 중년의 여인을 바라보던 성재와 상혁이 뒤따라 들어오는 남자를 바라보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지민의 어머니는 그런 둘에게 고맙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수척한 그녀의 얼굴을 보던 상혁이 대답했다. 아니에요. 저희는 가볼게요.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선 상혁이 성재의 옆구리를 찌르자 성재도 맞장구를 쳤다. 저희는 다시 학교에 가봐야해서요. 병실 문을 나서려고 하는데 지민의 형으로 보이는 남자가 둘을 따라나섰다. 태워다드릴게요. 그의 말에 성재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혁은 이미 남자의 차에 타서 성재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 병신이 진짜. 마지 못해 차에 올라탄 성재가 문을 닫자 백미러로 확인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네 명이 정말 친한가봐요. 핸들을 돌리며 묻는 남자의 말에 상혁이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지금은 만나지도 않고 서로 없는 사람인 척 지내고 있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죄를 짓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염병같은 것도 아니었고 박지민이 그렇다고해서 티를 내고 다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성재는 그 날 지민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머리를 맞대고 놀던 친구가 생각치도 못한 말을 했을 때 그것까지 전부 헤아려줄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물론 그 이후부터는 박지민의 말을 그냥 넘겨버릴만큼의 여유를 만드려고 노력이라도 했지만 정신차려보니 이미 너무 많이 지나버렸다. 이해하려고 노력하겠다는 말을 짓거릴 수도 없이 멀어져 있었다. 그래서 제 행동을 합리화했다. 더 밀어내려고 부러 싫은 척을 했다. 그래도 그게 정답인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지민이 잘 부탁드려요."
"..."

학교 앞에 차를 대며 남자는 다음에 꼭 다 같이 만나서 밥이라도 먹자며 둘에게 손을 흔들었다. 감사합니다. 하며 내린 성재가 차가 떠나가는 뒤를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자 상혁이 한숨을 쉬었다. 넌 아직도 박지민이 그렇게 싫어? 그의 물음에 성재가 아무 말 없이 상혁을 바라봤다.

"후회해?"
"...몰라."
"육성재. 야!"

갑자기 성큼성큼 학교 안으로 걸어가는 성재를 뒤따라가던 상혁이 뭐가 생각났다는듯 손뼉을 쳤다. 담임이 교실들어가지말고 우리 둘이 같이 교무실로 오라고 했잖아! 외침을 듣는 둥 마는 둥 언덕위를 올라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










태형아 정국아 시험 잘 보고. 알았지? 회사 일로 다급하게 출근하는 엄마가 아직 밥을 먹고 있는 둘에게로 외쳤다. 시험기간이라고 할 것도 없는데. 태형이 깨작깨작 먹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평소와는 다를 바 없는 움직임이었는데 눈치를 보는 건 태형쪽이었다. 그 날 이후로 아무 말 없이 지내는 전정국을 보고 정말 기억하지 말라는 뜻이었는지 묻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지내도 괜찮을까? 아무 생각도 없던 것 처럼 그 날의 네가 너무 힘들어보여서 그랬다고 변명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지만 전정국은 이미 그런 변명조차도 포기한 듯 했다. 밥을 먼저 먹은탓에 출발시간이 더 빨랐다. 하지만 부러 바르작거리면서 운동화끈을 만지작거리며 정국이 다 먹기를 기다렸다. 떨어져 걸어도 항상 같이 등교했으니까. 식탁을 정리하고 나오는 정국이 걸어오다 아직 앉아있는 태형을 보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운동화를 구겨신고 밖으로 나갔다. 이미 운동화끈을 다 묶어놓은 태형이 그를 따라 밖으로 향했다.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흐르는 시간이 서로를 의식할 수 있을만큼은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오늘 독서실 갔다가 늦게올거야."
"...어."

이제는 괜히 화가났다. 고작 첫 마디가 이런거라니.  태형은 씩씩대며 교실문을 열었다. 시험기간이라 그런지 자리를 넓게 한줄씩 늘어놓은 대형이라 창가 쪽 세 번째 자리를 앉아서 명목상 줄만 쳐놓은 교과서를 꺼내니까 전정국도 멀리 떨어진 제 자리를 찾아간 듯 한지 김준면이 이리저리 쑤시고 다니면서 전정국을 못살게구는 소리가 들렸다. 네 머리털이 안되면 다리털이라도 뽑아가겠다는 드립에 전정국이 미친놈- 하고 받아쳤다. 놈에게 몇이 더 달려들어 제발 한가닥만 달라고 칭얼댄다. 또 전교 50등까지 벽에 써붙인 종이 상단에 늘 이름이 들어가있는 전정국이니까. 태형이 교과서 위에 얼굴을 쳐박았다. 자야겠다.

시험이 끝나면 상혁과함께 지민의 병문안을 가기로 했다. 언제까지고 외면할 수 없으니까. 박상우는 그날부로 학교에 나오는지 안나오는지 신경쓰지 않았건만 아침부터 박상우로 떠들썩한 걸 보니 시험치러는 나온듯 싶었다. 또 육성재 한상혁을 보고 발작일으키듯 달려들어서 호모새끼들이라고 짓거릴까 생각해봤지만 그 날 그렇게 사람 한 명 병원으로 보냈으니 생각이 있으면 닥치겠지. 하고 넘겨버렸다. 박지민같았으면 쉬는 시간에 찾아와서 이번 촉은 3번! 하고 외쳤을텐데. 그럴 놈이 없으니 시험이 정말 고요하기만 했다. 배운 건 많은데 머리에 든 게 없으니 지금와서 공부하기도 너무 늦어버린건 맞다. 장난처럼 아침에 머리감으면 공부한거 다 날아가버린다고 했던 엄마가 생각났다. 차라리 이 복잡한 감정을 모조리 씻어낼수만 있다면 당장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시험은? 하고 물어보는 사람이 없어서 편하긴 하다만 정답 맞춰보는 놈들을 보다 그냥 시험지를 책상서랍에 집어넣었다. 나중에 맞춰보기나해야지- 하면서 가방을 싸고 있는데 옆으로 누가 다가와서 태형을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슬쩍 돌려 올려다본 시선에는 성재가 무표정으로 태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학교 끝나고 바로 전정국처럼 어디에 처박혀서 다음 시험이나 준비할 것 같은 육성재가 왜 여기 있느냐란 물음이 떠올랐다. 왜? 가방을 싸며 툭 던지듯 물어본 태형이 성재를 흘겼다.

"시간있냐."
"왜."
"시험 끝나면 어디좀 갈까 해서."

혹시 박지민한테 가는거냐? 태형이 묻자 성재가 얼굴을 찌푸렸다. 괜히 가서 안좋은 소리 듣기 싫어. 그의 말에 태형이 그제서야 가방을 어깨에 메고 쳐다봤다. 안좋은 소리 듣기 싫어도 나랑 같이가자고 할거잖아. 그 말에 성재가 대답이 없었다. 그는 그 만큼의 용기가 없어서 시간을 끌었다. 모든 걸 다 육성재 잘못으로 돌린다는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적어도 제 손으로 지민의 소문을 내고 다니는 놈의 얼굴을 갈겼으니 상관없다는 소리는 못하는 게 뻔했다. 태형은 부러 큰 소리를 내며 의자를 집어넣고 먼저 교실문을 나섰다. 육성재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잘 안다.

엄마는 항상 저녁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퇴근하니 독서실에 가버린 전정국 빼고 집에 혼자였다. 뭐 새삼스럽지도 않으니까. 가방을 책상 위에 던져놓고 홈키를 눌러 톡을 확인했다. 이홍빈이 시험 개망했다는 톡 스무 개, 한상혁과 육성재의 만담 톡 30개. 일일이 확인하기 귀찮아서 이홍빈에게는 이응 두개를 보내놓고 만담은 들어갔다가 나와버렸다. 자꾸 이상한 기분이었다. 좀처럼 몸이 편해지지가 않아서 교복도 벗지 않고 침대에 누워서 뒤척이기를 한참이고 반복하다가 다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 날 이후로 자꾸 저를 놓아주지 않는 감정이 발목을 붙잡고 이리저리 태형을 조종했다. 그냥 신경쓰이던 놈이 갑자기 침범해버린 그 벽을 다시 쌓아야 되는데 좀처럼 생각대로 되질 않았다. 무방비 상태의 태형에게 온 그는 태형의 모든 걸 쥐고 흔드는 열쇠가 되었다.

전화가 울렸다. 그냥 정적속에 전화만 울리니까 마치 태형을 구해주는 구원자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있으면 아마 심연까지 빨려들어갈 기분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발신자는 좀처럼 태형을 도와주지 않았다. 잠시 미쳤는지 아닌지 네 탓이라고 울부짖던 그녀의 마지막 통화 이후로는 처음이었지만 태형은 늘 그렇듯 통화버튼을  눌렀다.

- 태형아!
"..."
- 아버지가... 아버지가...

그녀가 뭐라뭐라 하는 게 들렸지만 태형은 전화든 손을 침대 밖으로 내놓고 눈을 감았다. 그래 난 뭐든 불행했던 사람이니까.



















분량이...적어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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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Zipduck

어...어...(죽어있다) 트위터 @zipzap_duck 비번 1995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