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키다 10







"있잖아."

가만히 위에 누워있는 석진에게 말했다. 그래놓고서는 본인이 한참이고 입을 열지 못했다. 이유를 서로 알고 있어서 재촉하지 않았다. 김재혁 이야기를 꺼낼거라는 것도 알까?

"김재혁은 나한테 사랑한다고 했었어."
"..."
"사랑하니까 이러는거라고."

일방적인 폭력에 가까운 짓을 해 놓고는 나더러 왜 자길 받아주지 않는거냐고 물었다. 아래는 전부 피가 굳어 허벅지가 덜덜 떨리고 있는데 정수리 위로 떨어지는 그의 물음은 참 아이러니 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네가 왜 응하지 않느냐는 말투였다. 그리고서 입을 더 열었다. 김석진이랑 다를거같냐는 물음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충분히 부정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무슨 대답을 해도 믿지 않으려들것이고 결국 나도 그에게 세뇌당해 여기까지 치달것이라는 걸 아니까.

나도 결국 똑같은 새끼였어. 지민이 소리내어 울었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졌지만 엄마는 차마 아들의 소리를 듣고도 다가올 수 없었다. 평생에 걸쳐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이니 섣불리 다가올 수 없는거겠지. 피해자인 척 자신을 감춰가면서 마지막 남은 석진에게까지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형을 이용할거라는 말이 김재혁이 내게 했던 말과 동일한 의미라는 것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지민이 피어오르는 자기 혐오감을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석진이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내가 상처받았을것 같아?"
"아흑, 으..."
"그랬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졸로푸트, 렉사프로... 규칙적으로 드세요. 석진은 눈을 감았다. 이 모든것을 버티기위한 과정이라면 박지민이 아니라 내가 감당하고 싶어. 그럴수만 있다면 내 모든 걸 줘도 상관 없을텐데. 작고 약해진 지민이 석진만 찾아댔다. 앞에 있어도 계속 찾았다. 오랜시간 외로움에 잡아먹혀서 현실을 부정했다. 제발 날 놔줘, 당신은 죽었잖아. 날 이렇게 만들어놓고서 무책임하게 죽었잖아. 그런데 왜 자꾸 괴롭혀. 발목을 타고 그의 손이 휘감아 올라왔다.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아 벌벌 떨자 석진이 그를 가만히 안았다.

- 김석진이랑 어디까지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새끼는 그럴 자격 없어.
- ...그만해요.
- 그새끼 앞에서 나한테 다리벌리는 꼴 보여주고 싶어? 상상해봐.

지민이 몸을 크게 움직이며 괴로워했다. 역겨워, 역겨워!!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아도 저녁이 죄다 쏟아져나올 것 같았다. 침대에서 빠져나와 급하게 방 문을 열자 엄마의 젖은 눈과 마주했다.

"나는, 난..."

살려달라고 할 수 없었어. 내가 가진 불행이 다른 사람한테 옮을까봐 모든 사람이 내게 다가오지 않길 바랬어. 난 잘못한게 없는데, 난. 먹은 걸 게워내면서 숨이 막혀 가슴을 쾅쾅 내려쳤다. 그래도 자꾸 속 안에서 뭐가 걸린 것 처럼 답답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칼을 가져와줘, 도려내서라도 없애버릴거야. 격렬한 몸부림은 눈앞에 그저 작은 움직임만 만들었다. 석진이 잔뜩 어지러진 화장실에 들어와서 지민을 들어올렸다. 지민이 오늘 제가 데려갈게요. 죄송합니다. 그의 말에 엄마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쳐버린 아들이 믿기지도 않겠지. 지민이 미친듯 웃었다. 그가 다시 현관으로 이끌었다. 벽에 걸린 시계가 12시가 넘은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음에 올게요. 주무세요. 현관문을 닫은 석진이 멍하니 서 있는 지민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걸을 수 있겠어?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그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 벌벌 떨려오는 걸 눈치채고 감싸쥔 석진이 앞서나갔다. 교복을 입고 나란히 하교하는 길에는 석진의 뒷모습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눈 앞에는 어른이 되어버린 그가 영원히 자라지 못할 손을 잡고 있었다. 왜 나야? 지민이 물었다. 짧은 질문이었지만 석진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단 한번도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내가 여기 존재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듯이 이유를 찾으려는 너에게 영원히 대답해줄 수가 없다. 차 내부 공기가 식어서 오한이 들었다. 석진이 아무 말 없이 출발하지 않고 있었다. 지민이 불안한 듯 석진을 쳐다봤다. 금방이라도 모든걸 외면하고 떠나버릴것같은 모습을 한 석진은 환상이라고 해도 믿을만큼 간절했다. 이런 정신병자 같은 내가 이상하지 않아? 역겨울만큼 이기적이고 주위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잖아. 채워지지 못한 애정은 끊임없는 재앙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고있다.

옛날에 넌 누군가에게 화 한번 내지 못했고 난 오히려 다른사람에게 가차없었잖아. 석진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건 과거였을 뿐 지금은 둘 다 서로를 닮아서 그 반대가 되어 있었다. 그랬던 때도 있었나? 하고는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멍청하게 그를 보고 있자 석진이 옛날 기억이 떠오르려는 듯 표정이 어두워졌다. 출발할게. 그가 무슨생각을 하고 밌는지는 물어볼 자격조차 없는 것 같았다.

"사랑해."
- 사랑해.
"형이 없으면 안 돼."
- 박지민 네가 없으면 안 돼.

과거의 김석진처럼 그렇게 말을 한다. 석진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차가운 지민의 손을 잡았다. 날 구해줘서 고마워. 항상 상대방이 해야하는 말을 대신 했다.











-










"멀어지는 건 한순간이야."
"어. 그러게."

아침부터 졸랑졸랑 찾아온 이홍빈이 안그래도 정신없는 김태형을 잡아두고 연설을 했다. 학원 같이 다니던 옆학교 여자애가 있는데 전까지는 자기한테 잘 대해주다가 갑자기 다른 남자애랑 같이 다닌다며 열분을 토해내는데 딱히 관심이 없는 태형은 그냥 고개를 끄덕여줬다. 참 내가 하고싶은 말을 하고 있네. 속으로 쩝,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렸다. 조회시간이라는데 뭐 때문인지 쌤들이 전부 반으로 돌아오지 않아서 시간이 붕 떠버렸다. 발등에 불똥이 일찍 떨어진 놈들은 책에 코를 박고 열공하지만 대부분이 아직 정신도 못차리고 인서울을 외치고 있었다.

"야, 학원 재미있냐?"
"재미로 다니냐? 거기서도 경쟁인데."
"하긴."
"하긴은 뭘 하긴이야. 한상혁도 학원다닌지 꽤 오래됐잖아."

딱히 한상혁한테는 궁금해본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늘 같이 놀기만 했지 놈이 무슨 공부를 하는지 얼마나 하는지는 상관이 없었으니까. 아마 가장 순진하게 놀았던 것 같다. 태형이 말이 없자 그럼 그렇지, 하고 종이 치는 걸 들은 홍빈이 손을 흔들었다. 넌 원래 남한테 관심 없었잖아.

"간다."
"어? 어..."

이홍빈이 쿡 찌르고 간다. 태형은 멍청하게 놈의 등을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내가 이상해진건가 싶었다. 항상 본능적으로 깊게 연관됨을 싫어했었는데 정신차리고 보니 이미 전정국과 얽혀있었다는 건 뭘로 설명해야하지?

나이로 치자면 두 학년씩이나 윈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박지민이나 한상혁이나 육성재, 전정국까지. 따지자면 훨씬 더 어른스러운 사람은 자기보다 주변사람들이겠지. 하지만 태형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너희보다 더 나이가 많다고 하면 벌어져버릴 그 거리감때문인지 몰랐지만 그것보다 더 신경쓰이는건 놈들이 왜 2년을 뒤쳐졌는지 이유를 궁금해할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마땅히 대체할만한 이야기가 없었다. 사실 애초부터 놈들과 멀어지기 싫었다. 잃어버린 2년을 어떻게든 없는 척 살고 싶었다. 태형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매마른 입술이 적셔지는 듯 했지만 이제는 입 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태형이 불꺼진 방 안을 서성였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금방이라도 누군가 들어와서 자기를 찌를 것 같았다. 전정국은 아침부터 교무실에 불려나갔다 돌아오기를 수십 번 했다. 아마 쉬는시간마다 불려갔다고 해야 정확할 듯 싶었다. 그리고선 돌아올 때 마다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것이 마치 날 무시하지 말라는 것 같아 입에서 쌍욕이 튀어나와도 이상할 거 없는 기분이 됐다. 그 새끼한테 휘둘리는 내가 싫어. 주먹을 쥐었다.

- ...김태형.
- 동정해주고싶었냐?
- ...
- 더러운 새끼.

상처받은 건 난데 왜 니가 그래? 턱이 덜덜 떨렸다.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목을 쥐고 어서 죽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찬 바닥을 굴렀다. 쓰러지면서 전정국의 책상위에 있던 유리잔이 산산조각이 나서 바닥에 함께 짓눌러졌다. 팔뚝에 파편이 잔뜩 박힌 것 보다 목을 긁어내리는 손톱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켁켁대며 살려달라 울부짖었다.

- 살, 려주세요 엄마. 끅, 숨, 막혀요.
- 엄마라고 부르지마!!! 제발 죽어...!!!

희고 가는 손이 태형의 목을 타고 올라와 숨통을 조였다. 그렇게 까무룩 정신을 잃고 죽은 것 처럼 암흑의 시간을 지냈다. 차라리 내가 이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어. 계속해서 속삭였다. 본능적인 생존을 갈구하는 내가 너무 역겨워.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자기혐오에 몸서리쳤다. 태형이 눈을 떴을 땐 병원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데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 관심받고 싶어서 그래?
- 아뇨. 그 반대에요. 사람들이 내게서 관심을 돌렸으면 좋겠어요. 난 그럴만한 가치가 없거든요.

다시 또 소란스러운 병실이었다. 6인실에 커튼을 전부 쳐 놓고 단절된 사람처럼 흰 벽을 쳐다보고 있던 태형이 제게로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전화드리고 왔어. 넘어져서 다쳤다고."
"..."

대답없는 태형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돌린 정국이 손에 쥐고있던 피뭍은 교복 셔츠를 가방에 쑤셔넣었다. 갈게. 어짜피 같이 있어봤자 불편할테니 제가 꺼져주는게 더 나을지도 몰라 먼저 돌아섰다. 김태형은 끝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정국은 여렸을 적 병원을 큰 아귀를 벌린 괴수라고 생각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보냈고 어머니도 긴 투병생활을 마지막으로 갑작스럽게 혼자 남겨졌다. 그리고 이젠 저 병원에 김태형이 누워있었다. 너마저 삼켜져 버리면 어떡해? 난 너 밖에 안남았는데. 흥건한 피와 자기목을 감싸쥔 손. 그걸 모르는 척 해야하는 것. 지금까지 강하게 다져왔던 모든 다짐을 철저하게 짓밟아대는 너. 버스를 기다리던 정국이 괴로운 듯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타려고 했던 버스의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말 하지 않아도 되지? 너 이대로 가다간 목표로 하는 대학 원서도 못 넣는거. 숨이 턱턱 막혀왔다.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야. 마지막으로 붙잡아왔던 것들조차 등을 돌리고 있었다.

"전정국?"
"..."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교복차림이 아닌 윤기가 정국의 앞에 서 있었다. 이 시간에 밖에 나와 있어도 되냐? 장난스럽게 물어오자 눈이 커졌던 정국이 눈동자를 굴렸다. 일 때문에 잠깐 밖에 나와있었어요. 물끄러미 정국의 얼굴을 보던 윤기가 다가왔다. 무슨 일인데 그래. 오랜만에 얼굴을 본 그였지만 단번에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채는 걸 보면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정국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꾸 기대고싶어지게 되는 건 그만큼 힘든걸까. 김태형 앞에서 강한사람인 척 버티고 있는 게 너무 괴로워서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정국의 입이 반대로 꾹 다물리자 윤기가 피식 웃었다. 임마, 말 안해도 되는데 너 지금 표정이 위로받고싶어서 안달난 사람처럼보여. 그 말에 정국이 고개를 숙였다. 혼자 남게 된 이후로 누구에게 그렇다고 고민을 털어 놔 본 적도 없었다. 이 상황을 누가 이해해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었고 모든게 내 잘못이니까.

"무뚝뚝한 건 알아줘야돼."
"...형. 제가 가진게 없어요."
"무슨소리야."
"여기서 아무것도 못하겠어요."

윤기가 더 말하려다 말고 입을 꾸욱 닫았다. 정국이 얼마나 참고 참아왔던 말을 힘겹게 내뱉었는지 이해했다. 많이 힘들다는것을 표현했지만 윤기가 자신을 위로해주는 걸 원하지 않았다. 윤기는 평소처럼 씨익 웃으며 말 없이 제가 탈 버스에 올라섰다. 다음에 보자 전정국. 고개를 돌려 하는 말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물끄러미 보던 정국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마워요. 윤기가 해 준 건 그저 스쳐지나가듯 듣기만 했는데 정국은 말끔하게 씻겨내려간 것 처럼 서 있었다. 이제 더이상 힘들다고 말하는 것도,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것도 안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 태형이가 병윈에 자주 왔으면 싶은데 그게 안되니까 혹시 학생이 좀 도와주면 안될까? 보다시피, 얼마... 안남으셨으니까.
- ...
- 태형이가 싫어하는 거 알면서 이러는거 염치 없다는 거 알아. 그래도 마지막은 지켜줘야하는 거잖아. 태형이가 있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병실에 안들어 갈게. 학생이 좀 설득해주면 안될까?

같이 산다고해서 가족처럼 모든 걸 다 꺼내어 놓으란 법은 없다. 정국은 고개를 숙였다. 태형이는 누가 관여하는거 싫어할거에요. 죄송합니다. 그 말을 하려고 했다. 박지민이 입원한 병원이 이 곳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게 실수였지만 해명하려 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나아질 수 있을까? 살려달라고 발버둥대는 태형이 제 손목을 붙잡던 그 감각이 지워지질 않았다.










-










신경쓰지 않겠다는 다짐은 전적으로 당사자가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때를 가정하고 할 수 있는 거라더니.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니까 김민석이 너 팔에 뭔 붕대냐? 하면서 쿡 찔러왔다. 아무것도 아냐. 아니긴 뭐가아냐. 너 싸우고다니냐? 그의 물음에 피식 웃었다. 싸우고 다녔으면 벌써 담임이 지랄을 했겠지. 하니까 그제서야 끄덕였다. 벌써 둘만의 비밀이 또 생겼다. 놈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이제 상관할 게 아냐. 혼자 되뇌이며 눈을 감았다. 이제야 떠오른 햇살이 조금 머리를 비췄다. 왜 쟤여야만 했을까. 난 원한적도 없는데 저렇게 가까이에 있었다. 그리고 밀어내지 못할 것을 잘 안다.

점심시간이 되어가도록 자리에서 한 발작도 움직이지 않는 태형을 보며 놀러온 한상혁이나 육성재가 고개를 저었다. 야, 어디 아프냐? 다크가 무릎까지 내려왔어. 야동보냐? 어디서 고리타분한 유머를 주워와도 미동도 없는게 아무래도 맛이 간 것 같아서 두어 번 찔러보다 제 반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나 이홍빈이 놀러오지 않아서 그런지 다행이었다. 누구라도 붙잡고 화라도 낼까 싶어서 그냥 내버려뒀으면 하는 마음이 너무 강했다.

"김태형! 담임이 너 급하게 찾는대."

그것도 모자라서 계속 울린다 전화가. 왜이렇게 울리지? 멍하니 전화를 들어 확인했다.

엄마.

무슨 일이야? 태형이 전화를 받아들고 묻자 잔뜩 침착한 표정으로 가차없이 말이 터져나온다. 아버지가 많이 위태로워 태형아. 엄마가 이렇게까지밖에 못해줘서 미안하다. 결국엔 그 말을 시작으로 목소리가 무너져내렸다. 멍하니 일어서서 가방을 챙겨들었다. 뭐라도 해야할 것 같아서 몸이 떨렸다.

오래 전에 잃었던 희망 중 하나였다. 아버지처럼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난 그거 하나면 충분했고 행복했는데. 엄마를 이제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난 내 편이 필요했는데 왜. 생각보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미 예견된 마지막이라도 조금은 슬플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보네. 그것도 아니라면. 가슴께를 툭툭 치며 걸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가방을 꾹 쥐며 걸었다. 영원히 위로받지 못할 사람은 이제 없다.





"아이고, 태형아."
"..."
"불쌍해서 이걸 어째."

아버지는 태형이 오기 전 숨이 끊어졌다고 했다. 미운 아들의 죽음에 다 제쳐두고 먼곳에서 달려온 할머니가 멍청하게 앉아있는 태형의 손을 붙들고 한참이고 울었다. 볼 면목이 없다면서 아버지와 함께 연락이 끊겼던 친가와의 조우였다. 그래도 아들인데 왜 옆을 지키지 않았느냐는 친척의 큰 소리가 태형의 정수리를 쩌렁쩌렁 때렸다. 태형은 그 말을 전부 들으면서 단 한번 입을 열지 않았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지만 태형은 언제나 참고 견뎠다. 이번엔 엄마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아버지의 새여자에게 학대받았다는 연민의 손길들이 태형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숨이 차는 기분이었다. 다 견뎌봐도 그 손들은 다시 그를 불쌍한 인간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어서. 다들 불쌍하다고 하지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애비는 바람나고 자식새끼는 정신병자니 집안 꼴 돌아가는거 봐라."
"......"
"저 여자는 어디면전 앞이라고 알짱거려?"

그 당당하던 얼굴이 잔뜩 움츠러들어서 눈치를 봤다. 그래도 부끄러운 줄은 아나보네. 친척들이 하나 둘 혀를 찼다. 병문안을 와도 기겁을 하며 벌벌 떨었던 손주가 배는 커져서 제 아버지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니 다들 곁눈질로 태형을 흘겨봤다. 그래도 첫째 아들이라고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지켰지만 하나도 불편하지 않은 게 없었다. 기억이 흐릿하거나 아예 모르는 친척들이 태형에게 아는채를 하며 들어왔다. 어렸을 적 대부분의 기억은 감쪽같이 없어졌어도 그런 티를 내면 안된다. 더 이상 불쌍한 놈이되긴 싫었다.

오랜 투병기간 끝에 아버지가 남기고 간 건 병원비와 그의 오래된 전원주택이 전부였다. 마지막을 가장 쓸쓸하게 보낸 사람치고는 사진에서는 아무 걱정 없이 웃고 있었다. 반대로 태형은 오랜 시간 감정에 매마른 사람처럼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혼자 자리를 지켰다.  계속해서. 혼자.

"마지막으로 정말 미안하다."
"..."

그녀의 뒷모습은 마치 모든 걸 빼앗긴것같았다. 왜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냐는 물음도 무색하게 누구보다 가장 불행한 얼굴로 울고 있었다. 그녀의 세상은 마치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못하겠지. 만난다 하더라도 그냥 스쳐지나갈 사람일 뿐이었다. 악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남은 사람은 방치되어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괴롭힐 거라는  것을 알면서.

태형이 3일만에 집에 돌아왔을 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자기보다 더 큰 아들을 더 감싸줄 수 없어 흐느끼며 껴안는 엄마에게 잘 다녀왔다는 말을 했다. 괜찮다는 말을 되뇌이며 방에 들어섰을 땐 비어있는 줄로만 알았던 방이 2층에 누군가가 있다는 걸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고 싶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말 없이 방 안에 들어섰다. 전정국은 자고 있는지 어두운 방 안에 실루엣만 보인채 등을 돌려 누워 있었다. 그래 이런 게 보통 둘과의 관계가 맞는데 마치 예전과 다른 기분이었다. 멍하니 돌아누운 등을 쳐다봤다.

왜 자고있냐.

속에서 물었더니 거짓말처럼 정국이 태형을 향해 돌아누웠다. 널 어떻게 대해야할지 다 잊어버려서 도망치고싶은데 그게 안된다.

"동정같은게 아니면 뭔데."
"..."
"그렇다고 대답해."
"..."
"제발."

내가 불쌍한 놈이라도 될 수 있게 해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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