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이 열이 펄펄 끓는다고 했다. 원래 아무 일이 없어도 자주 골골 거리는 걸 봤는데 아침부터 앓던 놈이 학교도 못나오고 계속 집에 누워있으니 맘이 편할 리가 없었다. 아무도 물어보지 못하는 그 3일의 시간동안 김태형이 어떻게 버텼는지는 몰라도 정국이 생각하는 태형은 본인이 받은 상처를 저런 식으로 표현하곤 했다. 그래서 항상 어떤 일인지 설명해 주지 않는다고. 약을 책상위에 올려두고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누가 앞에 있는지도 모르고 침대를 부여잡고 그렇게 앓고 있었다. 잠결에 뒤척인 탓인지 놈이 누웠던 자리가 조금 젖어있었다. 이래놓고 병원으로 데려가면 기함을 할 놈이라 정국은 한숨을 쉬며 그 발치에 앉았다.

"일어나서, 약이라도 먹고 자."
"...으,"
"김태형."

꿈을 꾸는지 이번에는 운다. 열에 달떠서 숨도 제대로 못쉬는 주제에 뭘 더 울게 있다고 서럽게도 울었다. 정국은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같이 울고 싶었다. 그건 동정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ㅈ..."

태형이 다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눈은 반쯤 뜬 상태였지만 제 앞에 있는게 전정국인지 또 다른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인 듯 자꾸 눈을 굴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꾸 중얼거리는 그 입을 따라서 귀를 가까이했다. 잠깐 닫혔던 김태형의 입이 다시 열리면서 전정국은 모든 마음을 포기했다.

저, 정신병자 아니에요.

누구에게 차마 다 전하지 못한 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삼켜왔던 모든 마음이 목구멍에서부터 터져나왔다. 너 정신병자 아니야. 넌 항상 왜 다른 사람들한테 미안해야돼? 정국이 물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그냥 전정국 혼자 제정신 아닌 김태형에게 쏟아붓는 꼴이었다. 그렇게 혼자 널 짓밟아버리지 말란 말이야.

김태형의 젖은 머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차갑게 식어있는 머리칼과는 다르게 열이 내려가지 않은 건지 그의 머리는 뜨거웠다. 그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입을 맞췄다.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되니까 제발 그러지 마. 김태형에게 바보처럼 처음 했던 그 키스는 두 번째보다 못했다. 항상 그 전이 현재에 비할 바가 못되겠지. 과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항상 마지막처럼 생각하던 정국이 깨달았을 땐 이미 김태형은 다시 잠들어있었다. 그가 잡고 있던 손을 더욱 세게 쥐었다.

- 항상 다른사람 약만 타가는 것 같네요?

흰 가운을 입은 약사가 사람좋은 인상으로 웃었다. 마주 웃어주지 못하는 정국이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약 봉투를 받아들었다. 자주. 아픈사람이 있어서. 그의 말에 약사는 정국의 다 헤져버린 슬리퍼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항상 급하게 뛰어오길래. 누군지는 몰라도 이렇게 급하게 오는 거 알아요? 정국은 대답할 수 없었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정국에게 괜한 소릴 했다며 영양제를 하나 챙겨주는 손이 걱정을 담았다. 그는 알고 있었을까?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해 대강 증상만 알려주고는 초조한 표정으로 한참을 제조실만 쳐다보다 돌아간다는 것을.











삼키다 11












"병신새끼."
"알아."
"개병신."
"안다니까."
"어휴."
"알아!"

아무말도 안했어 시벌롬아! 소리를 빼액 지른 한상혁이 육성재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도 그럴것이 잠깐 휴일에 박지민이 학교를 쉬게 되는 동안 생긴 시간을 어떻게 알차게 보낼것인지에 대해서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왕 조진거 존나 놀다오라는 한상혁의 말에 멍청하게 웃고 있던 박지민이 자기가 하고싶은 걸 하겠다면서 학원을 다닌다 했다. 뭐냐고 물어봤더니 그림을 배우고 싶다는데 육성재가 역대급으로 비웃으며 1학년때의 박지민을 떠올렸다. 고등학생이야 미술은 안중에도 없지 시벌놈들아? 하며 본인이 가진 도구 아무거나 가지고 그림이라도 그려보라며 자유시간을 주니 남자애들이야 원래 준비성은 쥐뿔도 없는 것들이니 학기 초 샀던 크로키북에 그나마 있는 삼색볼펜으로 야한 그림이나 그리고 앉아있는 게 전부였다.

자네는 뭘 그렸나? 아 전 혼신의 마음을 담아 가슴 존나 큰 여인을 그렸습니다. 왁자지껄떠들며 인터뷰 놀이를 하는 놈들 사이에서 박지민만 그날 유독 진지해서는 색연필까지 꺼내들었다. 한 30분을 그렇게 공들여 그리더니 대뜸 당당하게 미인도를 그리고 있던 한상혁과 육성재, 김태형에게 펼쳐주었다. 그러고서는 어때, 이 형님이 한 그림 하지? 물었다.

'티라노 사우루스?'
'뭔 티라노야 로보트지.'
'이게 뭔지도 모르겠다. 추상화임?'
'...'
'아, 아아 기억났다. 저번에 니 생일날 육성재가 너 준다고 사왔다가 자빠져서 박살난 로보트폴리 케익 아니냐?'
'오 그럴싸 하네. 이것도 정물화냐?'

그 이후로 박지민의 화는 장장 이주동안 지속됐다. 이유는 제가 그린 4명의 친구얼굴들을 고작 육성재가 작살낸 로보트폴리인가 뭐시깽이 케익에 비유했다는 것이었다. 그땐 장난이었다고 상황을 무마시키려 했지만 정말 눈에는 뭉게진 케익으로밖에 보이지가 않아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차라리 티라노 사우루스가 낫다면서 이와중에 제 감상평이 좋다는 걸 어필하던 한상혁이 죽빵까지 얻어맞을 뻔 했었지. 그래서 얻은 결론은 박지민이 그린 그림에 함부로 품평하지 말자였는데 그새를 못 참고 그림을 배우겠다는 박지민에게 박장대소를 하며 그래 넌 좀 배워야겠다 1학년때 그 그림실력은 정말 역대급이었다면서 다 뭉게진 케익 어쩌고를 운운하며 배를 잡고 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길바닥에서 머릴 부여잡고있었고. 전부터 박지민 생일선물은 어떻게 주고 어떻게 생일빵을 칠것인지에 대해서 고뇌중이었던 셋은 그딴건 필요없이 화를 어떻게 풀리게해야할지 고민해야만 했다.

김태형, 듣고있냐? 오늘 학원도 쨀 각오로 왔다. 비장한 표정으로 서 있는 둘을 멍하니 있던 태형이 대답하며 쳐다봤다. 와, 진짜 한결같은 새끼들. 어쩜 저렇게 시간이 지나도 진상일까. 역시 또라이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 태형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괜히 기분이 상한 육성재가 씩씩거리며 넌 뭐 아닌것처럼 말한다며 반박했지만 김태형이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니네들만큼은 아님.

"크레파스 어떠냐?"
"애새끼냐? 그냥 야한 만화책이 짱이라니까."
"아니 그림그린다잖아."
"더 빡치는 꼴 보고싶어서 환장을 했네 이새끼가. 니 친척동생이나 줘."

한상혁과 육성재의 언쟁을 보며 박지민의 집에 도착한 김태형이 초인종을 눌렀다. 형이랑 같이 살게 되었다면서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참 길을 헤맸는데 결국 처음 돌아온 길이 맞는 길이었다며 신경질을 부리며 있자 문을 열어주는 건 예상외로 석진이었다. 그가 환하게 웃자 쭈뼛거리며 들어온 육성재가 크레파스가 든 큰 상자를 가지고 들어와 집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결국 12색 크레파스인데 사람은 포장이 중요하다면서 몸뚱아리만한 상자로 눈속임을 해 왔다. 누가보면 무슨 모니터라도 사들고 온 줄 알았네.

입술을 삐죽이며 박지민이 거실로 나왔다. 결국 그림에 대한 꿈은 접겠다고 선언했지만 아직 화는 덜 가신것같아서 잔뜩 긴장한 육성재가 박지민을 주시했다. 누가보면 뇌물이라도 주러 온 줄 알았네. 태형이 먼저 툭, 선물을 내던졌다. 오다주웠다. 하며 던진건 박지민이 얼마전에 박살낸 큐브였다. 엄청난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맞추다 조각내더니 한참 가지고 놀지 않길래 기억이 나서 샀다. 고작 플라스틱 덩어리가 좀 비싸길래 화내면서 샀던 기억이 있는데 박지민이 그나마 쓸모있는거라며 활짝 웃었다.

"너희 학원 갈 시간 아니냐?"
"쨀거임."

괜히 석진의 눈치가 보여서 입모양으로 상혁이  말해주니까 표정이 썩은 지민이 에휴 쯧쯧. 하며 고개를 저었다. 김태형과 똑같은 소릴 한다면서 짜고 치냐고 욱한 육성재가 앞에있던 박지민의 다리를 쳤다. 자기 선물이나 까보라고 하니까 박지민이 복도에서 크레파스인거 자랑하고 들어왔으면서 뭘 숨기는척하냐고 놈의 선물을 휙 열어봤다. 아, 아니 그거 아래에 병신아!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뭘 더 준비한 것 같은데 이상한 종이쪼가리를 더듬던 박지민이 꺼낸 건 이상한 과자였다. 형이 외국갔다가 나 처먹으라고 준거긴 한데 두개길래 하나 먹어보라고. 그거 줄서서 사야 된다던데 저, 형이랑 같이 먹으라고.

"나 말하는거야?"
"네..."
"육성재 부끄러워하는거봐 존나 개패고싶다. 별것도 아닌거가지고 저러냐."
"개새끼가?"

육두문자를 남발하는 대화에 석진이 웃었다. 오랜만에 웃는 것 같아서 끅끅 숨을 참으면서 웃는 석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상혁이 에이 씨 난 야한 책 좋아할줄 알고 사왔는데. 하며 만화책을 꺼내들었다. 박지민이 그걸 보더니 야 그건 니가 좋아하는거지 미친새끼야. 하면서 만화책은 휙 뺏어들었다. 도대체 이런건 왜 파는... 하면서 읽고있다. 한상혁이 그럴 줄 알았다며 배를 잡고 자지러지는데 뒤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던 석진이 지민이 들고있는 만화책을 뺏어서 가져갔다. 나중에 읽고 친구들과 놀라는 뜻이었다.

아 맞다. 우리가 선물 가져온 이유 알겠지? 하면서 서서히 다가오는 육성재와 한상혁에 기겁을 하며 뭐 시발! 저리안가? 소리지르는 지민이 한가지 간과한 사실을 깨달았다. 넷만의 무언의 룰이 있는데 생일선물은 주고 때리라는거였다. 생일인데 멍만들고 선물은 하나도 없냐 시발들아! 하며 육성재가 엄포를 둔 거였는데 놈의 머리끄댕이를 잡고 있던 지민이 그럼 내생일때 선물들고 찾아와 보던가!! 했더랬지... 태형은 지민이 둘의 손에 발버둥치며 눈물콧물 다 빼는 걸 지켜봤다. 차마 얼마 전까지 병원에 있었던 애를 때리진 못하고 유독 간지럼에 약한 지민의 포인트를 공략했다. 겨드랑이라던가 옆구리라던가. 발버둥치다 상의가 아예 벗겨진 지민이 그 틈을 타 도망쳐나와 석진의 등허리에 몸을 바짝 붙이고 그를 앞세웠다.

"야! 치사하게 너만 숨냐?"
"아 하지마 미친놈들아!!"

등허리가 굳는게 맨 살로 느껴졌다. 석진도 당황해서 그런걸 잘 아는 지민이 더욱 그 허리를 감싸안았다. 아직 석진과 서스럼없이 지낼 수 있는 관계가 아닌 둘이 뒤에 숨은 박지민을 어떻게든 빼내려고 하는데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집들이겸 온 건데, 맛있는거라도 먹으러 가자."
"쟤네들이 뭐가 이쁘다고 맛있는걸 줘!"
"나가자."
"..."

지민이 꼬리를 내리고 다시 주섬주섬 널부러진 옷을 주워 입었다. 석진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낮게 웃었다. 친구들이랑 이렇게 잘 노는 걸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모든 게 다 생소한 모습인것 같았다. 병실에서 웃던 것 보다 둘이 살게 된 집에서 웃는 박지민을 보는 게 꿈만 같아서 제발 영원히 꿈에서 깨지 말아달라고 빌었다. 갈 길이 많이 남아있던 아니던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










이제 곧 둘 다 3학년이네. 공부한다고 몸 축내지 말고 잘 챙겨먹어야지. 태형과 정국의 그릇 위에 고기몇점을 엊어준 엄마가 웃었다. 나름 공부한다고 태형도 비교적 늦은시간까지 학교에 남아 뭔가를 하는 것 같아 보인 탓이었다. 사실상 김태형이 무엇을 하냐는 건 전혀 관여하지 않지만 항상 무엇에도 관심이 없던 태형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는건 긴장관계 해소의 신호라고 생각했다. 무언의 압박에 태형이 마지못해 고기몇점과 밥 한숟갈을 입에 쓸어담았다. 오늘도 역시나 밥을 마셔버린 전정국이 먼저 인사를 하며 일어섰다. 태형도 힐끔 시계를 쳐다보더니 나가야 할 시간이라며 자리에서 따라 일어섰다. 겨우 몇 번 먹지도 못하고 나가려는 태형을 불러세운 엄마가 몇마디 하려다 고개를 저었다. 잘 다녀와.

태형이 닫는 현관문 사이로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쉬는 모습을 지켜보던 정국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어릴 적 절대 불행하게 하지 않겠다며 양 손을 붙잡고 다짐하던 엄마도 사랑하던 사람을 잃었다. 마지막까지 얼굴한 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사람. 김태형이 그런 모습을 쳐다보다 나란히 섰다. 엄마는 아버지를 아직도 사랑할까.

학기를 마무리하고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는 듯 고개를 들 생각도 못하고 평소의 전정국마냥 공부를 시작한 놈들로 넘쳐났다. 얼마 전부터 이홍빈의 그림자도 구경못하게 된 이유도 이러한 맥락일 것이었다. 육성재나 한상혁도 박지민 생일 이후로 꽉 잡혔다면서 정신없이 공부중이었고. 태형은 미래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 혼자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막상 현재의 일을 생각하느라 시간의 흐름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이미 늦었나.

"천하의 김태형이 공부를 하네."
"아니 왜 밥처먹는데 지랄이야."
"아니 넌 안할 줄 알았지. 너를 보며 힘이 난다 친구야."
"절로 꺼져서 처먹고 와."

태형이 손가락으로 다른 테이블을 가리켰다. 점심시간에만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두 놈은 살살 자존심을 긁으려고 혈안인지 한대 쥐어박아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한쪽 손엔 단어장을 쥐고 있으면서 읽는 걸 한 번도 본적이 없어 육성재. 태형이 꼬집자 발끈하며 친구한테 집중해줘도 난리냐고 따졌다.

"머리아파."
"안하던 공부를 하니까 그럴 수 있어."
"너희들 때문에 아파."

제발 꺼져줬으면.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다 먹고 점심시간은 차마 공부하지 못하겠는지 놀자면서 태형을 졸졸 쫓아서 태형의 반까지 찾아왔다. 이미 다 알고 있다. 박지민의 부재가 김태형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육성재는 그렇게 박지민이랑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했으면서도 막상 그를 이해하려 했던걸 생각하면 이상할것이 아니었다. 쓸데없이 이런 거에 세심한 새끼. 태형이 피식 웃었다.

"석진이형한테 과외받아볼까."
"지-랄."
"아 맞아. 나 썸녀생김."
"지-랄."

대화를 만담급으로 하는 둘을 보던 태형이 자리에 엎어졌다. 점심을 먹고 온 놈들이 서서히 들어오면서 책을 펴고 공부하자 놈들은 눈치가 보이는지 태형의 뒷머리를 헝클이며 사라졌다. 이상하게 잠이 쏟아졌다.










"넌 뒤졌다 깨어나도 모르겠지, 이 기분. 얼마나 좆같은지. 저새끼들은 쓰레기인데 항상 옆에 누가 있고, 난 없고."
"..."
"왜?"

당장이라도 갈아먹어 시원찮을 놈들이 깔깔거리면서 잘 지내고 있더라. 그의 말에 정국이 웃었다.

"넌 웃고만 있다고 행복할거라고 생각해?"
"..."
"틀렸어 개새끼야."









태형이 앓는 소리를 내며 제 옆에 앉은 박지민의 그네를 발로 퍽 쳤다. 그네가 밀려나면서 흔들거리는 박지민이 성격 파탄이라도 났냐면서 가만히 있는데 지랄이라고 성화였다. 니새끼가 사람 불러놓고 한마디도 안하잖아요. 벌써 해가 아파트단지 사이로 빠져나가며 붉은 빛을 몰고왔다. 노을 죽이네. 하고 쳐다보던 지민이 문득 태형을 돌아봤다. 움직임에 맞춰서 쇠사슬 찰랑이는 소리가 났다.

"나 이제 안그래."
"..."
"안그럴거야 새끼야."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듯 태형은 계속 노을만 보고 있었다. 박지민의 옆엔 제 자리인듯 자리잡은 석진이 있다는 것을 육성재도, 한상혁도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소한의 비밀. 모두들 굳이 다시 찾은 평화를 깨고싶지 않아 언급조차 하지 않는 모두의 비밀. 박지민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항상 제 이야기는 꺼내본적이 없는 놈이 제 행동을 인정했다. 이제와서? 태형이 눈썹을 찌푸리며 다시 그네를 발로 차버리자 박지민이 반동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태형의 그네를 휙 밀어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실랑이 하다 지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둘은 서로 다른 표정을 했다.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만큼을 돌아왔는지 김태형은 박지민이 아니고서야 모른다. 하지만 그 날 박지민이 괴로워하는 모습에서 제 모습을 찾았던 건, 피하려고 해도 괴로웠던건 닮아져있는 아픔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서로 죽어도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주제에 김태형이 피식 웃었다. 존나 별것도 아닌걸로 바쁜사람 불러대기나 하고. 할짓 드럽게 없나보다. 그 말에 박지민이 눈을 세모로 뜨고 김태형을 째려봤다.

"니가 나 존나 걱정하길래 난 또 내걱정에 질질 짜나 싶었지."
"..."
"아니야?"
"지랄"

맞으면서 아닌 척 쩐다? 박지민이 태형의 옆구리를 찔렀다.

"나 전정국이랑 같이 살아."
"뭐?"
"초등학교 때 부터."
"너희 반 전정국? 태권도 하는 애?"
"응."
"구라."

구라 아니야. 태형이 덤덤하게 대답하자 오히려 지민쪽에서 대답이 없었다. 왜 그런얘길 지금꺼내느냐, 그게 나랑 뭔상관이느냐, 너 지금 나한테 비밀털어놓는거냐 등등 선택지는 얼마든지 많을텐데 박지민은 할 얘기를 못찾겠다는 듯 입술을 들썩이기만 했다. 그리 특별한 건 아니지만 김태형이 지금껏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듯 지냈는지가 의문이라는 듯 눈에 물음표를 띄웠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옛날부터 같이 있었는데 항상 멀리 있어서 전정국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꽤 많이 숨기게 생겼잖아 걔. 그냥 지내다보니까 서로 신경 안쓰는게 익숙해서. 태형이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지금껏 제 얘기는 오로지 결과만 도출해내던 김태형이 제 속을 드러낼줄은. 지민이 그래. 하고 짧게 대답했다. 별다른 반응을 원하지 않을 걸 알았다.

그래도 결국 돌아온 건 똑같네. 말을 꺼낸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얼굴이 홧홧한게 마치 거짓말을 한 사람처럼 박지민의 얼굴을 다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왜? 난 있는 그대로를 말해준건데. 속은 그렇지가 않았다. 박지민이 입을 열었다. 전정국이랑 지내는게 불편하냐? 그가 묻자 태형이 피식 웃었다. 그럴 겨를도 없었다는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딱히. 박지민이 그러면 된거네. 하며 씨익 웃었다.

"반에서 1등하는 애랑 살면 좀 머리좋은 기운 받지 않냐?"
"...뭐?"
"어째 넌..."
"이새끼가."

태형이 그네를 박차고 일어나서 지민의 다리를 잡아들었다.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가서 머리부터 깨질것같은 자세가 된 지민이 악악 거리면서 버둥거리니까 그네에서 찰랑찰랑소리가 났다. 야 좀 봐줘. 어? 아아악!! 바지벗겨져! 있으라는 어린애들은 전부 어디로 사라졌는지 한산한 놀이터는 한껏 반항중인 박지민과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김태형이 있었다. 다신 안그러겠습니다 형님소리를 듣고 나서야 제자리로 돌아온 지민이 사람이 그렇게 무자비하게 뒤로 넘기는게 어디있냐면서 헉헉거리다 손으로 저 멀리를 가리켰다. 태형이 고갤돌려 그 근원지를 찾았다. 전정국이었다.

"쟤 전정국 같은데."
"..."
"같이 들어가던가."
"됐어."
"나 이제 가봐야돼 시간없음."

형 데리러가냐? 태형의 말에 지민이 버럭 화를 냈다. 아니거든! 그래놓고 석진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속 다 보이는 새끼. 멍하니 놈이 사라진 방향에 손가락욕을 하다 휙 돌아선 곳엔 생각하지도 못했던 놈이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
"...뭔데."

마주보고 선 모양새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처럼 위태로웠다. 머리 끝이 살짝 젖어있는게 식은땀을 흘리는 것 같은 모양새가 얼굴을 구기게했다. 아프면 집에 빨리 들어가서 약먹고 자던가 왜 나한테 시비야.

"맛있는것좀 해줘."
"..."
"답례."

그래놓고선 다시 집으로 향하는 전정국의 뒷통수에 대고 답례는 해주고싶은 마음이 있어야 답례지! 하려다 어디서 죄다 시달리고 온 모양이라 관뒀다. 억지로 끌려가듯 집으로 들어온 정국이 주저앉듯 식탁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교복차림으로 앉아있는게 마치 아무말도 걸지 말라는 것 처럼 보여서 태형이 가방을 소파에 던져두고 함께 부엌으로 들어왔다. 뭐 먹고 싶은데, 하며 냉장고를 열어보니 얼마 전 먹다 남은 고기가 또 자리하고 있었다. 남고생 둘이라고 있어봤자 라면이나 끓여먹을 테니 고기라도 먹으라며 매번 엄마가 채워놓곤 했다.

태형이 잔뜩 성가신 표정을 하고 다시 돌아섰다. 예전 그 날과 다른건, 식탁에 앉아있던 사람은 전정국이 되고 무심하게 저녁을 준비해주는 건 김태형이 되었다. 그러나 김태형은 외면했다. 너도 내 모습을 볼 때 울고 싶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금방 무너질것같아서. 너도 그랬을까.

그가 앞에 있어달란 말도 하지 안했지만 괜히 자리에 남은 태형이 냄새를 풍기는 고기를 먹지도 않고 바라보고 있는 정국 쪽 식탁을 두어번 두드렸다. 밥해달라며. 미동도 않고 그냥 있는게 그냥 고사나 지내버리라며 괜히 손에 폰을 들고 홈버튼만 눌렀다. 메세지가 열댓개가 와 있었다. 하나는 이홍빈 개새끼가 공부는 안하고 보내놓은 게임초대메세지와 네댓개는 한상혁 육성재. 그리고

"동정 아니야."

박...지민...까지 확인하고 눈이 휙 돌아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무심한 표정으로 태형을 보고 있는게 뭔가 확신에 찬 얼굴이라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음식은 한 번 입에 대지도 않고 뭘 그렇게 급한지 굳이 의문형이 아니어도 태형에게 꼭 답을 원하는 것 같았다. 동정이 아니면 어쩔건데? 전정국의 눈이 말했다.

"불안해하지마."
"..."

내가 왜? 웃기지마. 하지만 몸은 이미 방 안으로 도망쳐 들어온 후였다. 온 몸을 삼켜버릴듯한 분위기에 턱이 덜덜 떨렸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문에 기대어 앉아 짧은 숨을 골랐다. 알 수 없는 겁이 났다. 영원히 인정하지 못할 감정이 악문 잇새로 감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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